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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교단(1984~2016)에서

다시 ‘외고’를 생각한다

by 낮달2018 2020. 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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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고하여라, 우리 사회의 ‘기득권’이여…

▲ 대원외고의 입시 풍경 . ⓒ 오마이뉴스 권우성

블로그에 ‘외고’ 관련 글을 쓴 것은 내가 <오마이뉴스>에 쓴 기사 때문이었다. 본 의도와는 달리 그게 첨예한 쟁점이 되었던지 블로그가 제법 북적댔다. 백 개가 넘게 달린 댓글을 통해 나는 사람들 생각의 향방을 잠시 가누어보기도 했다. 댓글뿐 아니라, 쪽지를 통해서 의견을 보내준 분들도 여럿 만났다.

 

특히 자신의 고민을 숨김없이 드러내면서 의견을 밝히는 낯선 이들의 글을 받으면서 나는 반은 농으로 ‘현대인들은 무척 외로운가 보다’ 고 말했다. 그랬더니 딸애가 거기에 자기 의견을 덧붙여 주었다.

 

“우리 모두가 그렇듯 자신의 고민과 내면을 나눌 만한 마땅한 상대가 없는 게 아닐까요? 삶 가운데서 그런 의견을 나눌 기회도 많지 않을 테고요…….”

 

나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랬다. 내게 의견을 보내준 이들을 통해 나는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의제를 새삼 확인했고 많은 것을 새롭게 배웠다.

 

‘외고’, 원점으로 돌아간 ‘의제’

 

다시 ‘외고’가 사회적 이슈로 떠오른 것은 알다시피 집권 여당이 빼든 ‘외고 개혁’의 서슬 푸른 칼 때문이었다. 그리고 한동안 내연하던 그 쟁점은 용두사미로 꼬리를 내리면서 ‘거의 없던 일’이 되어 버린 것 같다. 어제부터 오늘까지 나는 이 문제를 바라본 세 편의 글을 읽었다.

 

<오마이뉴스> 박상규 기자의 “외고는 보내지 마세요, 내 수입 반 토막 나겠지만…”은 한 외고 입시 전문학원 경영자의 고백을 통해 외고라는 체제가 만들어내는 부정적 측면을 가감없이 전했다. 자기가 자식을 기른 게 아니라 ‘괴물’을 키운 건지 모르겠다는 이 386세대의 고민이 대다수 외고생 학부모의 그것과 얼마만큼 같고 또 얼마만큼 다른지는 알 수 없다.

 

내가 쓴 지난번 글에 댓글을 단 두 분의 의견을 떠올린 것은 이때다. 두 분은 모두 외고를 졸업한 주부였다. 차이가 있다면 한 분은 공개 댓글을 단 데 반해 다른 분은 비밀글로 내게 의견을 제시해 준 것뿐이다. 모두 짤막한 글이었지만 거기 담긴 함의는 만만찮은 것이었다.

 

“외고 졸업생입니다. 지금은 평범한 주부구요. 낮달 님과 나리 양의 토론은 외고 재학 당시. 그리고 간혹 동창회에 나갈 때마다 느꼈던 불편함이 정리된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실제로 많은 외고 친구들이 ‘위너와 루저를 편리하게 양분’하는 생각을 바탕으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친구들의 얼굴에서 빛이 나지는 않습니다. 뭔가 답답하기도 하고……. 그들도 모르는 척하는 것이 편하기 때문에 그렇게 사는 거겠거니 생각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그들에게도 불편하겠지……, 라고 느껴집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친구들이 사회의 요직에 많이 진출한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사는 사회에 어떤 문제가 발생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문제 삼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혹은 외면하고, 혹은 대수롭지 않게 대합니다(대수롭지 않게 대할 때는 정말 기운이 빠집니다).

(만약) 외고 학생이 나라의 인재 중 일부라면, 그 인재의 (제 개인적인 경험상 적어도) 80%는 사회에 보수적이라는 뜻입니다. 이 비율은 건강한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토론과 각성이 필요한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

▲대원외고 입시 풍경 ⓒ 오마이뉴스 권우성

글쎄, 나는 외고와 관련된 어떤 경험도 없어서 이분의 의견이 실제 사실과 얼마나 부합하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의 의견이 본인의 경험 안에서 진실한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다고 믿는다.

 

‘용산 사태’를 아느냐는 질문에 ‘가난한 사람들 불타 죽은 거? 그러니 돈을 많이 벌어야 돼’라고 말했다는 <오마이뉴스> 기사에 나오는 명문대생의 사고와 이분이 말하는 염려는 정확하게 겹친다는 것도 분명하다.

 

비밀글로 의견을 밝혀준 또 한 분의 주부는 그 학생의 글을 읽고 ‘마치 12년 전의 제가 쓴 글 같아 깜짝 놀랐’다고 했다. 자신도 외고를 졸업해 강남에 살고 있지만, 그이는 ‘정말 열심히 살고 이래저래 가능성이 많은 아이’에게 ‘좋은 가르침’의 길이 별로 없는 우리 사회가 안타깝다고 했다.

 

<오마이뉴스>의 기사는 결국 ‘가능성 있는 아이들’이 가혹한 경쟁 속에서 길들며 ‘경쟁에서 승리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고 말한다. ‘좋은 대학 다니고 있을 뿐’인 자기 아들이 ‘글로벌 리더’겠느냐고 허탈하게 반문하는 이 아버지의 씁쓸한 현실 인식은 이 주부의 그것과 별로 다르지 않아 보인다.

 

오늘 아침 <한겨레>에서 나는 신기섭 논설위원의 칼럼 “문제는 계급 기득권”과 <프레시안>에서 시사평론가 김종배의 칼럼 “철벽 ‘외고 산성’에 대한 단상”을 읽었다. 두 편의 글 모두, 최근의 ‘외고 개혁’과 관련된 기사다. 그리고 두 글의 문제의식도 비슷하다.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것은 ‘기득권’이다

 

김종배 칼럼 “철벽 ‘외고 산성’에 대한 단상”은 제목이 가리키는바 그대로다. 그는 외고 개혁이 수포가 된 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닌 ‘힘겨루기’의 결과로 본다. 그리고 한 실세 국회의원의 의지를 꺾은, ‘현실을 운영하는 세력’은 ‘철벽’이며, 그들이 지키고자 한 것을 ‘외고 산성’으로 은유했다.

 

그는 ‘현실 세력’은 ‘타협책’과 ‘자율고로의 전환’조차 이상으로 몰아붙이면서 ‘바늘 하나 들어갈 틈조차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완강’하다고 진단한다. ‘외고 재단’만이 아니라, ‘한나라당 의원들보다 더 보수적인 언론, 이른바 실세 의원보다 더 힘이 센 권력 핵심의 위세는 하늘을 날고 있’다는 것이다.

 

<한겨레> 신기섭 위원의 칼럼은 훨씬 직설적으로 그걸 지적한다. 그는 김종배가 ‘현실 세력’이라고 말한 것을 우리 사회의 ‘계급 기득권’이라는 이름으로 실체화한다. 그는 1980년대 사북 탄광촌의 초등학생이 쓴 시로 논의를 시작한다.

 

삼 학년 때
밥을 안 싸 가지고
갔기 때문에
배가 고파서
집으로 왔다.
집에 오니 밥은 없었다.
나는
너무 배고픈 나머지
아무나 때리고 싶었다.

  - ‘화난 내 얼굴’ 전문


나도 익히 아는 시다. 나는 저 시를 조세희 선생의 <침묵의 뿌리>에서 읽었다. 그 시를 읽으면서 느꼈던, 등허리가 서늘해지는 전율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신기섭은 이 소년의 반대편에 ‘처지가 전혀 다른 서울의 초등학교 6학년생’을 세운다. 그는 물론 가난이나 배고픔 따위와는 거리가 먼 아이다.

 

그는 4학년 때 부모를 따라 영어 쓰는 나라에 가게 됐다. 거기서 현지 보조 교사의 도움을 받아 영어를 배웠고 1년 만에 고국에 돌아왔다. 그리고 그 아이는 한해 수백 명을 특목고에 보낸다는 어떤 학원의 ‘예비 중1반 선발시험’을 봐서 ‘외고생’을 향해 가는 대열에 낄 수 있었다. 물론 ‘영어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덕분’이다.

 

신기섭은 이 아이가 “3년을 잘 버티면 일부에서 ‘장래에 1만 명을 먹여 살릴 인재’라고 치켜세우는 집단에 들지도 모르겠다.”고 하면서 논의를 매듭지으려 한다. 그는 ‘국제경쟁력 있는 인재 양성’이라는 말 뒤에 숨은 게 ‘고학력’, ‘돈에 쪼들리지 않는 부모 만나’고 ‘외국 경험’ 따위가 아니냐고 반문하면서 다음과 같이 글을 맺는다.

 

어제 마침내 외고를 지켜낸 이들은 숨기고 싶겠지만 결코 감출 수 없는 진실이 있다. 외고 문제로 대표되는 교육 논쟁은 사실 계급 기득권 투쟁이라는 것 말이다. 또 그 기득권이 견고해질수록, 1980년대 사북의 배곯는 아이처럼 “아무나 때리고 싶”어지는 사람들도 늘어나리라는 것 말이다.”

 

외고, 기득권 재생산의 통과 제의적 과정?

 

그는 ‘외고’를 사이에 둔 ‘교육 논쟁’이 사실은 ‘계급 기득권 투쟁’이고, 그것이 우리 사회의 양극화를 조장한다는 진실을 우리의 눈높이에다 펴 보인다. 그러나 그 ‘진실’은 기실, 모두가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도 입 밖에 내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그들이 누리는 ‘기득권’은 어느새 ‘독점적 권한’이 되었다. 그 ‘기득권의 성채’를 향한 사람들의, 모든 것을 건 ‘무한 입시투쟁’이 2009년 우리 ‘교육의 현주소’인 까닭이다. 그것은 ‘선발’이 아니라 ‘배제’의 메커니즘을 통하여 우리 사회의 계급을 명확하게 ‘상류-비(非)상류’로 구분해 낸다. 그리고 그 배제의 잣대가 ‘영어’를 비롯한 사교육이고 또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경제력’이라는 건 불변의 진실이다.

 

외고가 각종 고시에서 합격생 점유율을 꾸준히 높이면 높일수록 그 성채의 벽은 높아질 것이다. 어느결에 외고는 상류계급과 지배 엘리트들이 자신의 기득권을 확대 재생산하는 ‘통과 제의적 과정’이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영남의 조그만 소도시 여기저기에 걸린 특목고와 명문대, 사법시험, 행정고시 합격 축하 펼침막을 스쳐 지나면서 나는 우리 시대의 ‘가난한 삶과 문화’를 우울하게 돌아다본다.

 

 

2009. 12. 11.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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