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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교단(1984~2016)에서

‘일베’와 우리 아이들

by 낮달2018 2020. 5.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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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이들과 일베

▲  트위터 일베 ( 일간 베스트 저장소 )  화면

일베(일간베스트 저장소)가 논란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진작부터 이 극우 성향의 인터넷 사이트가 가진 위험성과 해악이 우려되지 않은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5·18 광주항쟁 33돌을 즈음하여 수구 우익 매체들의 도발적 역사 왜곡이 전면에 떠오르면서 일베가 일상적으로 저지르는 ‘증오 범죄’의 해악은 심상치 않다는 게 분명해졌다.

 

나는 어저께 잠깐 일베에 접속한 것을 빼고 한 번도 이 극우 사이트에 흥미를 갖지 않았다. 보도를 일별하는 수준에서 나는 일찌감치 일베에 관한 관심과 흥미를 잘라버렸다. 매체라기보다는 비열하게 편향된 관점에 기초한 천박하고 지질한 배설적 언설로 점철된 이 쓰레기 사이트에 관심을 가질 일 따위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한 달 전쯤이다. 수업 중에 3학년 아이들이 ‘일베’를 아느냐, ‘오유’를 아느냐고 물었을 때, 간단히 답하고 나서 이어지는 질문을 중동무이로 분질러 버린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아이들의 분위기가 좀 야릇한 구석이 있었다. 아이들은 무언가 다른 할 말이 있는 눈치를 보였는데 그건 은근히 ‘일베가 재미있다’는 뉘앙스를 담고 있었던 것 같았다. 나는 이야기를 길게 끌고 싶지 않아서 단정하듯 아퀴를 지어 버렸다.

 

“일베? 재미있다고? 그러나, 일베는 그냥 ‘쓰레기’일 뿐이야!”

 

2학년 아이들도 일베를 알고 있는지 어떤지 해서 잠깐 떠보았다. 아주 소수의 학생이 재미 삼아 거기 드나든다는 정도만 확인했는데, 어려서 그런지 아이들은 좀 무심해 보였다. 일베에 자주 접속한다고 지목된 아이는 꽤 겸연쩍어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그걸 이내 잊어버렸다. 글쎄, 아이들이 뭘 보고 그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소년들의 호기심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나는 짐짓 생각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5·18을 전후해 앞서 말한 상황이 전개되면서 일베가 다시 논란의 핵으로 떠오른 것이다.

▲ 할인점 노트북 배경화면에 노무현 전 대통령을 희화화하는 사진을 올리고 찍은 인증샷 .

홈플러스 매장의 전시용 판매 노트북 배경화면에 노무현 전 대통령을 희화화하는 사진을 올린 사람이 우리 지역의 열일곱 살짜리 고교생이라는 뉴스 기사를 보면서 나는 우리의 가늠보다 일베가 훨씬 더 아이들 가까이 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베’는 아이들에게 훨씬 가까이 있다!

 

수업을 하다가 잠깐 일베의 해악과 문제를 몇 가지 이야기해 준 것은 작정한 일이었다. 너무 길게 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이 재미 삼아 접근하기엔 일베가 가진 문제가 너무 많다는 것, 단순 흥미에 매달리다 보면 일베가 일상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정치적 편향성과 폭력성, 선정성에 저도 몰래 빠질 수 있다는 걸 알려주는 게 필요하다.

 

나는 지역의 고교생이 예의 희화화 사진을 올린 뒤 경찰의 수사가 시작되자 자수해 왔다는 사실을 이이기하면서 말문을 뗐다. 경상북도 교육청에선 일베를 차단하고 있기도 하다. 청소년들에게 유해한 사이트라는 판단이 작용한 것 같다……. 아이들은 잠깐 긴장하는 듯하다가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이야기를 계속하는 동안 아이들은 웅성대기 시작했다. 저들끼리 뭔가 할 말이 많은 듯했다.

 

“일베를 너무 나쁘게만 보지 마세요!”

 

나는 소란을 가라앉히고자 내 의도를 건조하게 줄여서 말했다. 그런데 어디선가 그런 소리가 들렸다. 농조인 것 같았지만, 그것은 농이 아닐 수도 있었다. 나는 아이들 가운데 일베의 회원들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깨달았다.

 

“좋다. 그런데 내가 부탁하고 싶은 건 이게 결코 흥미로 접근할 문제가 아니라는 거다.

흥미로 시작한 일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알게 모르게 너희들의 가치관 형성에 심각한 영향을 줄 수도 있다는 걸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종이 울렸고 나는 거기서 이야기를 끊고 교실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몇몇 동료 교사들에게 나는 이 문제를 쪽지로 알렸고 교육적으로 지도할 방법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했다. 아이들이 일베에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던 동료들은 내 의견을 진지하게 받아주었다.

 

다음 반의 수업에 나는 인쇄한 <한겨레> 기사 한 편을 준비해 들어갔다. 일베, 또는 그 현상을 잘 분석한 기사였다. 관심 있는 학생들에게 기사를 읽어보기를 권하면서 나는 더 낮고 진솔한 자세로 이야기했다. 입시의 중압감에 시달리고 있는 학생들이 순전히 재미 삼아 일베를 찾을 수 있다는 것도,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경향성에 솔깃할 수 있다는 것도 인정했다.

 

앞의 반 아이들과는 좀 달랐는지 아이들은 진지하게 내 이야기를 경청했다. 내 진심을 아이들은 저항 없이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수업을 마칠 즈음 앞자리의 아이들과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떤 반에선 아이들 반응이 좀 다르던데, 회원도 있니?”

“있는 것 같아요. 많지는 않고요”

▲ 서울의 한 고교생이 역사 왜곡에 항의하는 1인시위를 벌이고 있다 .

쉬는 시간에 동료 몇 명과 의견을 나누었다. 젊은 담임교사들은 아이들 사이에서 일베가 화제가 되는 것을, 그것과 맺는 관계의 강도에 대한 이해도 있는 듯했다. 주로 문과 학생들 사이에서 일베가 논란이 되었던 것 같다고 했다. 하긴 일베에 관한 관심은 어떻게 보면 인문 사회에 대한 관심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듯했다.

 

‘사회적 관심’을 통해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기를!

 

비록 흥미에서 비롯하였다 하더라도 우리 사회의 의제에 관한 관심이 있다는 것은 나쁘진 않다. 공부와 공부로 이어지는 일상은 아이들에게서 세상과 삶에 관한 관심을 거세해 버린다. 인문계 고등학교에선 일반적 상황이지만 유독 우리 아이들은 그게 심해 보인다. 아이들은 입시라는 시스템 안에 갇혀 버린 자신의 현재 상황과 쳇바퀴 도는 일상을 기꺼이 추인하고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일베와 관련한 상황은 급박하게 전개되고 있는 듯하다. 글쎄 미더워 보이지는 않지만,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서 일베의 불법성과 유해성에 대한 심의에 착수했다고 한다. 또 최근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반인륜적 폄훼와 왜곡 등 일베의 일탈이 사회적 공분을 사자 광고대행사가 광고를 스스로 철회함으로써 일베에서 광고가 모두 사라지기에 이르렀다.

 

아이들은 최근의 상황을 통하여 무엇을 배우고 익힐까. 흥미로 시작한 일베 참여를 통해 아이들이 우리 시대, 세상과 삶의 일부를 들여다보고 그 모순과 불합리의 일단을 이해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표현의 자유와 무책임한 배설의 차이, 의견과 폭력의 상관관계를 이해하고 자기 인식의 지평을 단 한 뼘이라도 넓혀갈 수 있다면 우리 아이들에게 일베는 새로운 앎의 전기가 될 수도 있으리라.

 

 

2013. 5. 23.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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