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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이야기] ‘불여튼튼’에서 ‘빼박캔트’까지

by 낮달2018 2019. 10.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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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이종교배(한자, 영어와 결합한 한글)

▲ 명동 거리에 즐비한 영어 간판. 영어는 공식 지위 없이 이미 주류 언어로 인식되고 있다. ⓒ 경향 DB

한 민족이나 국가 단위의 고유 언어가 오랜 역사를 통하여 그 혈통의 순수성(?)을 유지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교통과 통신 사정이 오늘날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전근대에도 이민족의 언어가 유입되면서 이런저런 언어적 변화가 이어졌으니 말이다.

 

그 변화의 으뜸은 외국어에서 빌려와 마치 우리말처럼 쓰는 외래어 가운데서 오랜 세월이 지나 자연스럽게 우리말이 된 낱말인 ‘귀화어(歸化語)’다. ‘붓, 먹’(중국), ‘부처’(인도), ‘보라매, 송골매, 수라’(몽골), ‘냄비, 구두, 가마니’(일본), ‘담배, 빵’(포르투갈), ‘가방’(네덜란드) 등 외래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익숙해진 낱말이 바로 귀화어다.

 

본래 ‘새말[신어(新語), 신조어(新造語)]’은 새로운 개념과 대상의 등장에 따라 대개 합성과 파생의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새말의 형성은 한자어는 한자어끼리, 우리말은 우리말끼리 서로 어울려 이루어지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더러 우리말과 한자어의 합성으로 이루어진 사자성어 형식의 낱말도 있다.

 

언어의 이종교배, ‘심심파적’과 ‘불여튼튼’

 

‘심심파적’이나 ‘불여튼튼’이 그런 경우다. ‘심심파적’은 “심심함을 잊고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자 재미로 어떤 일을 함.”을 뜻하는 말인데 한글에 한자어를 붙여서 만들었다. ‘할 일이 없어 지루하고 따분하다’는 뜻의 형용사 ‘심심하다’의 어근(語根) ‘심심’에다 ‘고요를 깨뜨린다’는 뜻의 ‘파적(破寂)’을 결합, 한글과 한자를 합성한 새로운 사자성어가 만들어진 것이다.

 

‘불여튼튼’은 형용사 ‘튼튼하다’의 어근 ‘튼튼’ 앞에 ‘같지 않다’는 뜻의 ‘불여(不如)’를 붙여서 ‘튼튼히 하는 것보다 더 나을 것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만들었다. 이는 동종교배만이 아니라 이종교배의 방식으로도 새말이 만들어질 수 있음을 증명한 사례다. [관련 글 : ‘심심파적’과 ‘불여튼튼’]

 

한자어의 자리를 슬슬 영자가 대체하는 시대니 한글에 영자를 붙여서 새로운 낱말을 만드는 것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영어 낱말에 우리말 접사 가운데 가장 생산성이 높은 접미사 ‘-하다’가 붙은 파생어는 이미 나날이 그 목록을 더하는 상황이다.

이미 <표준국어대사전>에 오른 ‘드라이(dry)하다’, ‘패스(pass)하다’, ‘데이트(date)하다’ 말고도 <다음한국어사전>에는 훨씬 많은 낱말이 실려 있다. ‘슬림(slim)하다’, ‘터프(tough)하다’, ‘캐주얼(casual)하다’까지 표제어가 되었으니 요즘 <한겨레> 기사에도 더러 쓰이는 ‘핫(hot)하다’를 거기서 볼 날도 멀지 않았다. [관련 글 : ‘슬림(slim)하고 샴푸(shampoo)하다’?]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이 즐겨 쓰는 새말 가운데에는 한글과 영자가 섞인 합성어도 적지 않다. 앞에 든, 영어 낱말에 우리말 접미사 ‘하다’가 붙어 있는 단순한 형태인 파생어들과 달리 이 합성어들은 꽤 복잡한 형태도 있다.

 

빼도 박도 못 하다, ‘빼박캔트’, 혹은 좌절의 언어들

얼마 전 어떤 인터넷 매체의 기사에서 ‘빼박캔트’라는 낱말을 보았다. 처음 보는 낱말이었지만 나는 단박에 그게 ‘빼도 박도 못 하다’라는 뜻이라는 걸 눈치챘다. 이 합성은 우리말 동사 ‘빼다’와 ‘박다’의 어근을 비통사적으로 합성한 다음, 여기에 영어 조동사인 ‘캔트(can’t)’를 다시 합성한 것이다.

 

한글과 영어가 명사끼리 결합한 말로 ‘열정페이(pay)’, ‘팩트(fact)폭행’, ‘헬(hell)조선’ 따위가 있다. 이는 한글의 위치가 앞인지 뒤인지가 다를 뿐 가장 단순한 형식의 합성이다. ‘댓글’과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이 결합한 ‘댓글리케이션’(댓글로 소통한다는 뜻)은 발음을 쉽게 하려고 ‘댓글니케이션’을 ‘댓글리케이션’으로 바꾸었다.

 

‘빼박캔트’와 같이 국어와 영어 낱말 3개가 합성된 예로 ‘핵노잼’, ‘엔포세대’ 등이 있다. ‘핵폭탄급으로 재미없다’는 뜻의 ‘핵노잼’은 ‘핵(核)+노(no)+잼(재미)’로 이루어졌다. ‘엔포세대’는 ‘엔(n)+포(포기)+세대’로 합성되었는데 여기서 ‘엔(n)’은 수학에서 쓰는 미지수 ‘n’이다. 처지에 따라 포기해야 할 것들이 3, 5로 늘어나는 청년세대의 분노와 슬픔이 서린 낱말이다.

 

영자가 섞인 이 합성어들은 영어 단어의 사전적 의미를 그대로 가져온 앞의 파생어들과는 성격이 좀 다르다. 이들은 보편적 의미를 담은 낱말이 아니라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는 은유와 풍자의 의미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 낱말은 앞의 파생어들처럼 사전에 표제어로 오르기는 쉽지 않을 듯하다. 새말로 등록된다고 해서 모든 새말이 사전에 오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 이 말들은 한 시대의 특징을 드러내는 유행어로 그쳐야지, 그것이 보편적 어휘로 쓰이는 상황이 계속되어서는 곤란하니까 말이다.

▲ '청년실업 시대' 신조어에는 좌절하는 청년세대의 분노와 슬픔이 묻어난다. ⓒ 컬리지인사이드

청년실업 시대를 풍자하는 한영 혼합의 새말로 ‘서류가즘(서류 + 오르가즘orgazm)’, ‘자소서포비아(자기소개서 + 포비아phobia)’이 있다. 서류전형 탈락이 반복되다 보니 서류 통과만으로 엄청난 기쁨을 느낀다는 ‘서류가즘’이나 ‘자기소개서 공포증’을 의미하는 ‘자소서포비아’ 같은 합성어가 쓰이는 시대는 하루바삐 끝나야 하지 않겠는가.

 

한글에다 영자를 섞어서 파생과 합성어가 만들어지는 상황이 바람직하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이른바 지구촌 시대라는데 ‘한글만’을 고집할 수만도 없다. 언어의 이종교배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은 아프지만 객관적 현실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2017. 2. 9.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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