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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 자기, 오빠…, 그리고 ‘임자’

by 낮달2018 2020. 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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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호칭의 변천

▲ '임자'는 나이가 지긋한 부부 사이에서, 상대편을 서로 이르는 이인칭 대명사다. 연극 <3 월의 눈>의 노부부 .

부부끼리 서로를 부르는 말로 지금까지 가장 많이 쓰인 것은 ‘여보’다. 1960년대 이후 지금까지 ‘여보’는 가장 보편적인 호칭어라는 얘기다. 그다음은 ‘자기’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조차 용례를 설명하고 있지 않은 이 낱말(사전에는 삼인칭 대명사로 올라 있다)은 70년대에 등장한 꽤 ‘닭살 돋는’ 단어였다.

 

70년대에 ‘자기’라는 호칭어가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널리 받아들여진 것은 그 시절이 부부간의 애정표현이 비교적 자유로워지기 시작한 때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2010년 표준화법 실태조사에 따르면 부부간 호칭어는 ‘여보’(38.6%)가 가장 많이 쓰였고, ‘자기’는 24.3%가 사용했다. 지금도 여전히 ‘여보’가 대세이긴 하지만 부부간 호칭어는 바야흐로 ‘자기’에 이어 ‘오빠’로까지 옮아가고 있다…….

 

▲국립국어원의 광복 70년 기념 학술대회 포스터

이상은 국립국어원이 광복 70주년을 기념해 연 ‘우리의 삶, 우리말에 담다’란 주제의 학술대회(8.26.)에서 구현정(상명대) 교수가 발표한 ‘대중매체로 본 우리말의 화법 변화’란 논문의 주 내용이다. 구 교수는 “정보화 시대, 다문화 시대를 맞아 부부간 호칭어 등 우리말 변화가 더 가속화될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부부간 호칭은 세대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여보’가 제일 보편적으로 쓰이는 호칭인 것은 분명한데 나이나 세대에 따라 그 호칭의 변화를 특정하기는 좀 어렵지 않을까 싶다. 노부부들은 흔히 ‘영감(할멈)’을 쓴다고 여기지만, 일상에서 그런 호칭을 쓰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을 터이다.

 

‘여보, 당신’이 부부간 호칭으로 가장 무난한 말이지만, 젊은이들에게는 고리타분한 말이다. 주변에만 해도 혼인한 지 20년이 훌쩍 넘었는데도 여전히 ‘○○씨’로 상대를 부르는 이들도 드물지 않다. 그러니 ‘자기’나, ‘오빠’를 쓴다고 해서 ‘닭살’이라고 흉을 볼 수 없는 것이다.

 

‘여보’에서 ‘자기’를 거쳐 ‘오빠’까지

 

남편을 ‘오빠’라고 부를 수 있는 전제는 남편이 아내보다 연장일 경우겠는데, 요즘 늘어난다는 연상 아내는 연하 남편을 어떻게 부르는지 궁금하다. 그냥 동생 부르듯 이름을 부를까. 아니면 남편이라고 대접해서 ‘○○씨’라고 불러줄까.

우리 내외는 일찌감치 ‘여보, 당신’에 입문했다. 신혼 초 부모님 슬하에 살 때, 우연히 아내에게 ‘너’라고 했다가 아버지의 호된 꾸중을 듣고 난 뒤에 이내 말을 바꾸었다. ‘여보, 당신’을 처음 쓰는 게 어색해서 연극하듯 여보, 당신을 쓰다가 곧 익숙해진 것이다.

 

살아계실 때의 부모님을 떠올려보면 당신들이 쓰던 말 가운데 유난히 기억에 많이 남는 말이 ‘임자’다. ‘임자’는 우리 어릴 적에 ‘주인’이라는 말 대신에 쓴 말로 ‘밭 임자’, ‘임자에게 이른다.’ 따위로 썼다. 막연히 한자어라고 생각했는데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보니 고유어다.

 

‘물건을 소유한 사람’, ‘물건이나 동물 따위를 잘 다루거나 통제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 ‘부부가 되는 짝’ 따위의 뜻이 있는데, 부모님이 쓰신 임자는 물론 동음이의어다. 이때의 ‘임자’는 ‘나이가 지긋한 부부 사이에서, 상대편을 서로 이르는 이인칭 대명사’다.

 

‘임자’, 나이 지긋한 부부 사이의 이인칭 대명사

▲ '임자'는 제3공화국을 다룬 드라마 따위에서 박정희가 아랫사람들을 부를 때, 흔히 쓰던 말이다.

‘상대편을 서로 이르는’ 말이라고 하지만, 어머니께서도 그 말을 썼는지는 기억에 없다. 내 기억에 ‘임자’는 주로 아버지께서 사용한 낱말이다. 밥상머리에 앉아 어머니가 집안일을 시시콜콜 의논하면, ‘임자가 알아서 하구려’ 정도로 받으신 것이다.

 

이 ‘임자’는 “나이가 비슷하면서 잘 모르는 사람이나, 알고는 있지만 ‘자네’라고 부르기가 거북한 사람, 또는 아랫사람을 높여 이르는 이인칭 대명사”로 쓰인다. 제3공화국을 다룬 드라마 따위에서 박정희가 아랫사람들을 부를 때, 흔히 쓰던 말이 아닌가 말이다.

 

하여간 언제부턴가 나는 이 ‘임자’라는 부름말이 정겹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우리 내외가 ‘나이가 지긋한 부부’인지는 모르되, 어쩐지 부부의 위계나 권력 관계쯤은 거세해 버린 듯한 낱말의 함의가 좀 뻐근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아내와 남편을 지칭하는 말은 그 밖에도 많다. ‘마누라’와 ‘우리 아줌마’ 같은 말은 편하고 정겹게 아내를 이르는 말이고, ‘○○엄마’는 아이를 중심에 두고, ‘내자(內子)’는 남 앞에서 아내를 이르는 말이다. 요즘은 ‘옆을 지키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접미사 ‘지기’를 붙여 ‘옆지기’라 쓰는 이들도 있다. ‘옆지기’는 남편을 이르는 말로도 쓰인다.

 

내가 사는 경상도 지방에서는 아내를 가리켜 흔히 ‘집사람’이라 이를 때가 많다. ‘아내’나 ‘처(妻)’를 쓰는 게 어색할 때 주로 쓰는데 여성의 활동 범위를 가정으로 한정하는, 성차별적인 요소가 있다고 해도 ‘남에 대하여 자기 아내를 겸손하게 이르는 말’로는 손색이 없는 말이다.

 

‘마누라’와 ‘와이프’

 

요즘은 젊은이들뿐 아니라 중년들도 아내를 ‘와이프’라고 이르는 이들이 적지 않은데 듣기가 거북할 때가 더러 있다. 친구들끼리 허물없이 쓰는 거야 나무랄 수 없지만, 공식적인 자리나 어른 앞에서 ‘와이프’를 예사로 입에 올리는 것은 천박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게 외국어여서가 아니라 거기엔 상대방에 대한 예의를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부모님을 이를 때 ‘파더’나 ‘마더’라고 하지 않는 것과 같다. 예의를 갖추어야 하는 자리에서 아내를 ‘마누라’라고 편하게 말하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남편이 배우자를 가리키는 말이 ‘아내’이듯 아내가 배우자를 지칭하는 말은 ‘남편’이다. 방송에 나와서 ‘와이프, 마누라’나 ‘아빠(오빠), 우리 아저씨’라고 배우자를 이르는 이들이 쳐다보이는 이유다. 우리말 예절의 기본은 자신과 자신에게 포함된 모든 것을 ‘낮추는’ 것이라는 걸 우린 흔히 잊고 살고 있는지 모른다.

 

남의 남편이나 아내를 이르는 말이 ‘부군(夫君)’이고 ‘부인(夫人)’이다. 모두 높이는 말이니 자기 아내나 남편을 이르는 말로 써서는 안 된다. 그런데 가끔 텔레비전에서 인터뷰하면서 자기 아내를 ‘부인’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드물지 않다. ‘부인(婦人)’은 결혼한 여자를 가리키는 말이니 어떤 경우에도 자기 아내를 부인이라 쓸 수 없다.

 

요즘 아내는 나를 가리켜 ‘영감’이라고 말할 때가 더러 있다. 내가 아내에게 가끔 ‘할멈’이라고 부르는 데 대한 복수(!)다. 그것은 우리가 함께 나눈 세월이 준 선물일까. 일상의 어느 순간인가, 우리가 함께해 온 세월이 마치 신기루처럼 느껴지는 때가 있다. 그럴 때, 나는 아버지께서 그랬던 것처럼 아내에게 ‘임자’라고 불러보는 것이다.

 

 

2015. 8. 29.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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