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어지지 않고 죽 잇따라 있다”
지난해 11월 29일 <제이티비시(JTBC)> 뉴스룸을 시청하다가 나는 화면 아래쪽의 자막을 읽느라 미간을 찌푸렸다. 그날 국회운영위원회 관련 뉴스였는데, 민주당 박경미 의원이 자유한국당 나경원 의원의 ‘발언’을 환기하며 안보실장에게 질의하고 있었다. ‘발언’이란 그 무렵 나 의원이 미국 인사들에게 ‘총선 전에 북미 정상회담을 자제해달라고 요청했다’는 말이다.
[박경미/더불어민주당 의원 : 총풍의 DNA가 한나라당, 새누리당, 자유한국당으로 면면이 이어지고 있다고 보는데 안보실장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잠깐이었지만, 나는 ‘면면이’를 보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처음엔 그걸 ‘연면히’를 잘못 쓴 것으로 여겼다. 무심히 쓰지만, ‘연면히’는 한자어 ‘연면(連綿)’에서 파생한 부사다. 잇닿을 연(連) 자와 이어질 면(綿) 자로 구성되어 “혈통, 역사, 산맥 따위가 끊어지지 않고 계속 잇닿아 있음”을 뜻하는 이 명사는 형용사 ‘연면하다’와 부사 ‘연면히’로 가지를 쳤다.
다음은 <표준국어대사전>의 ‘연면히’의 풀이다.
연면-히(連綿히)
「부사」
혈통, 역사, 산맥 따위가 끊어지지 않고 계속 잇닿아 있게.
· 이제는 그 풍속이 사라진 오늘날에까지도, 습관은 연면히 내려와 체화되었을 것인데.≪최명희, 혼불≫
바로 국어사전을 찾아서 확인해 보았는데, 뜻밖에 ‘면면’도 있다. ‘연면’에서 쓰인 ‘이어질 면(綿)’ 자가 겹쳐 쓰인 낱말이다. 그러나 자막에 쓰인 ‘면면이’가 아니라 ‘면면히’로 써야 옳다. 그러고 보니 ‘연면히’보다는 ‘면면히’가 훨씬 부드럽고 발언하기도 좋다.
면면2(綿綿)
‘면면하다’의 어근.
면면-하다(綿綿하다)
「형용사」
끊어지지 않고 죽 잇따라 있다.
· 면면하게 이어져 내려온 역사와 전통.
· 우리 민족은 면면한 민족사의 흐름 속에서 세계에 자랑할 만한 문화를 가꾸어 왔다.
· 면면한 그들 계보 속에는 왕족의 피가 흐르고 있었으며….≪박경리, 토지≫
이 정도면 30년 국어 교사 경력도 아무 쓸모가 없다. 그래서 찾아보았더니 <다음 한국어 사전>에서는 ‘면면하다’의 유의어를 ‘연면하다’, ‘면원(綿遠)하다’, ‘끊임없다’, ‘간단(間斷)없다’ 등 네 개나 제시하고 있다. ‘끊임없다’ 외엔 모두 한자어다.
면원하다 [綿遠--]
형용사
[(명)이] (역사나 전통, 세대 따위가) 대대로 죽 이어져 내려온 시간이 오래다.
· 우리 민족의 역사는 면원하여 세계에 자랑할 만하다.
끊임없다
형용사
[(명)이] (사물이나 일 따위가) 늘 잇대어 없어지지 않는 상태에 있다.
· 조문 행렬은 어디가 끝인지 한눈에 보기 어려울 만큼 끊임없었다.
· 삶이란 끊임없는 선택의 연속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간단없다 [間斷--]
형용사
((주로 ‘간단없는’의 꼴로 쓰여)) (무엇이) 잇달아 계속되어 끊이지 않다.
· 우리는 간단없는 노력으로 맡겨진 사명을 다해야 한다.
<다음 한국어 사전>
국어사전에는 실제 쓰이지도 않는 한자어가 넘친다는 게 정설이지만, 여기 제시된 한자어들은 그만그만한 상황에서 요긴하게 쓰이는 말이다. 한자어 아닌 고유어라면 더 좋았을 테지만, 흔히 고유어라고 생각해 왔는데 그게 한자어에서 온 말이 좀 많은가 말이다.
부사 중에서 대관절, 도대체, 무려, 별안간, 심지어, 어차피, 지금 같은 말도 한자어다. 이는 한자어가 우리말에 한자어는 의식하지 못할 만큼 깊숙이 들어와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비록 한자어라도 우리말의 깊이와 쓰임새의 폭을 넓히는 구실을 하는 한자어를 굳이 배척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관련 글 : ‘눈록빛’을 아십니까, 우리말 같은 한자어들]
우리 어머니는 살아생전에 슬기롭고 손끝 야문 부녀자를 가리켜 칭송하는 말로 ‘엽렵하다’를 즐겨 쓰셨다. 학교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한 어머니가 그게 한자어인 걸 알아서 쓰셨겠는가. 세상을 뜨기 전에 지병으로 고생을 많이 했다는 이야길 하면서 ‘신고가 많았다’고 썼던 동네 어른들도 마찬가지다.
엽렵하다 [獵獵--]
형용사
(1) [(명)이] (사람이나 그 행동 따위가) 매우 슬기롭고 날렵하다.
· 형제끼리 할 이야기가 있어 머뭇거리고 있었더니 엽렵하고 눈치 빠른 형수가 얼른 자리를 피해 주었다.
(2) (기본의미) [(명)이] (바람이) 가볍고 부드럽다.
(3) [(명)이] (사람이나 그 언행이) 분별 있고 의젓하다.
신고하다2 [辛苦--]
자동사
[(명)이] (사람이) 곤란한 일을 겪어 몹시 애를 쓰다.
· 우리 아버지께서는 몇 년간 지병으로 신고하시다가 작년에 돌아가셨다.
2020. 1. 30.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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