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장난? 아니 ‘호작질’
선친께선 목수셨다. 일생을 전업의 목수로 사신 건 아니고, 젊은 시절 한때 나무를 만지셨다. 아버지께선 지금은 없어진 고향 집을 지으셨고 내 어릴 적 우리 집 곳곳에 있던 나무로 만든 가구들도 대부분 당신께서 손수 다듬으셨다.
방앗간과 대문간 그늘에 짜놓은 커다란 평상이나 길쭉한 나무 의자는 물론이거니와 왕겨를 때던 부엌마다 비치된 소쿠리도 아버지께서 만드신 거였다. 왕겨나 재를 담아내던 손잡이 달린 그 소쿠리는 바닥은 함석으로 손잡이는 나무로 만든 거였는데 용도에 따라 크기도 여러 가지였다.
때로 아버지께선 긴히 소용에 닿지 않는 것도 금방 뚝딱 만들어 내시곤 했는데, 그걸 만드실 때 누군가가 무얼 하느냐고 물으면 좀 겸연쩍으신지, “뭐 호작질 삼아서…….”하고 얼버무리시곤 했다. 전문가가 가외의 일을 하고 있다는 게 좀 열없으셨던 게다.
아버지께서 즐겨 쓰신 ‘호작질’은 아들에게로 이어졌다. 어느 땐가부터 나도 긴하지 않은 일을 하고 있을 때 그걸 ‘호작질’이라고 쓰곤 하는 것이다. ‘호작질’은 ≪표준국어대사전≫에 다음과 같이 짤막하게 풀이되어 있다.
호작-질
「명사」
→ 손장난.
≪표준국어대사전≫의 화살표(→)는 ‘표준어 뜻풀이 참고’의 뜻이다. 이 풀이에 따르면 ‘호작질’은 ‘손장난’이라는 표준어에 대응하는 사투리다. 그러나 나는 손장난보다는 ‘호작질’이라는 표현이 훨씬 익숙하고 또 정겹다. ‘호작질’은 ‘호작’에다 접미사 ‘-질’이 붙은 형태인데 ‘호작’의 어원은 정확하지 않다.
일전에 컴퓨터에 연결해 쓰는 소형 선풍기 하나를 샀다.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것에 비기면 훨씬 실한 놈인데, 크기의 한계 때문에 바람의 세기는 그리 믿을 만하지 않다.
나이 들면서 더위에 맥을 못 추게 된 게 여러 해가 지났다. 몸무게가 늘면서 체질적으로 변화가 생긴 건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에어컨을 켜놓은 교실에서도 온도가 조금 오르면 속에 불이 나는 편이어서 나는 쥘부채를 항상 손에서 놓지 않는다.
올해는 좀 낫지만, 교무실의 내 자리가 냉방기와는 멀어서 덜 시원하다고 느낄 때마다 옆에 보조 선풍기라도 하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곤 했다. 고무로 만든 날개가 달린 이 앙증맞은 USB선풍기를 산 것은 순전히 그런 이유에서다. 걸어서 출근하면 맨 먼저 선풍기를 켜고 책상에 앉아 땀을 말리곤 했다.
선풍기를 보는 이마다 신기한 듯 묻는다. 아이들도 예쁘다고 반색을 하면서 신기한 듯 그걸 바라보곤 한다. 그러면 나는 예전에 선친께서 그러하셨듯 열없이 얼버무리는 것이다.
“뭐, 호작질 삼아서 하나 샀어요…….”
저지레
호작질만큼 정겹고 익숙한 낱말로 ‘저지레’가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의 풀이다.
저지레
「명사」
일이나 물건에 문제가 생기게 만들어 그르치는 일.
【<*저즈레←저즐-+-에】
말하자면 ‘저지레’는 일종의 실수다. 그건 큰일일 수도 있고 아주 하찮은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저지레’의 의미는 결정적이거나 치명적인 결과를 불러오는 실수와는 거리가 멀다. 그 실수가 빚어지는 과정에 어떤 악의도 개입되지 않는다.
부모님이 쓰던 물건을 가지고 놀다가 그걸 부러뜨리거나, 실수로 동무 집에 갔다가 무언가를 밟아서 망가뜨리는 일 따위가 ‘저지레’다. 좀 자라서 동무들과 다투어서 상처를 내거나 드잡이질을 하다가 경찰서 신세를 지는 일도 ‘저지레’에 포함된다.
“이 녀석, 또 저지레를 했구나.”
“쉴 새 없이 저지레를 해 쌓아서 큰일이야.”
등으로 말할 때 쓰는 ‘저지레’는 말하자면 일종의 자그마한 ‘성장통’ 같은 것일 수도 있다. 그런 성장의 길목을 지나서 아이들은 자라고 어른이 되어간다. 상황에 따라 이 ‘저지레’는 좀 더 심각한 일이 되기도 한다. 물론 여기에도 부정적인 악의는 없다.
나는 가끔 ‘저지레’를 저지르고 그걸 아내에게 고백한다. 아내의 결재 없이 고가의 물건을 사거나 과도한 술값을 카드로 지르고 난 다음 며칠 뜸을 들인 뒤에다. 그건 여보, 내가 저지레를 하나 했거든……, 하고 시작하는 고백 말이다.
따라서 ‘저지레’는 우리가 일상 속에서 겪고 감내하는 삶의 한 편린(片鱗) 같은 것이다. 우리는 그걸 통해서 우리 갑남을녀들의 유한한 욕망과 어리석음을 확인하고, 실수와 용서로 부대끼는 일상을 나누곤 하는 것이다.
호작질과 저지레.
7월의 첫 주말, 우연히 떠오른 두 낱말의 뜻을 새기며 나는 선친과 유년 시절에 대한 그리움으로 공연히 장난감 같은 선풍기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2009. 7. 11.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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