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찐개찐’ vs ‘오십보백보’
어저께 인터넷 매체 <프레시안>에 오른 표제어 가운데서 ‘도찐개찐’이라는 낱말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거기가 거기다’, ‘오십보백보’라는 뜻으로 쓰는 말이긴 하지만 그게 공식 문서에 쓰인 걸 본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도찐개찐’을 찾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그건 표제어에 오르지 않은 낱말이다. <우리말 배움터>의 ‘한글맞춤법 검사기’에 넣으니 대치어로 ‘오십보백보’를 들며 아래 도움말을 붙이고 있다.
“여기서 쓴 ‘긴’은 ‘윷놀이에서, 자기 말로 남의 말을 쫓아 잡을 수 있는 거리’를 뜻합니다. ‘진’과 ‘찐’은 사투리입니다. 결국 ‘도’나 ‘개’가 그게 그거라는 뜻으로 현재 주로 ‘오십보백보’를 씁니다. 맹자가 한 ‘오십보백보’보다는 순우리말이어서 좋긴 하지만, 아직 널리 쓰지 않는 만큼 고쳐 쓰게 했습니다. 좀 더 널리 알려지면 허용하도록 하겠습니다.”
‘도’와 ‘개’가 윷놀이의 패였구나, 나는 머리를 주억거렸다. 원말은 ‘도긴개긴’(물론 사전에는 오르지 않았다.)이지만 ‘긴’ 대신 사투리 ‘찐’으로 쓰이다 보니 아직은 표준말이 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한자어인 ‘오십보백보’를 대체할 수 있는 순우리말이라는 점은 ‘도찐개찐’의 강점이다. 이 낱말이 표준어로 편입되는 것은 언제쯤일까.
‘도나캐나’와 ‘개나 소나’
윷놀이의 패를 응용한 관용어에는 ‘도나캐나’도 있다. ‘아무렇게나 마구’의 뜻으로 쓰이는 말인데 아래 <표>에서 보듯 실제로는 지방마다 조금씩 다른 고장 말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지나 개나’를 썼다. 여기서 ‘지’는 ‘쥐’를 경상도 특유의 단모음으로 발음한 것이다.
김봉국 교수(부산교대)의 분류대로 이는 윷놀이 패인 ‘도나 개나’ 계열과 가축 이름을 가리키는 ‘개나 소나’ 계열로 나눌 수 있다. 어차피 ‘아무렇게나 마구’의 뜻이라면 ‘도나 개나’든, ‘걸이나 개나’든 구별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개나 소나’든, ‘쥐나 개나’ 든, ‘기(게)나 고동이나’든 마찬가지다. 굳이 표준어로 ‘도나캐나’만을 고집하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다.
‘애달캐달’, 안달복달?
사전에 나오지 않는데도 꽤 쓰이는 관용어로 ‘애달캐달’이 있다. 작가 황석영과 김소진의 소설에 쓰였고 신문 기사에도 흔히 나오는 단어다. 그런데 이 낱말은 사전은커녕 <우리말 배움터>에서도 ‘대치어 없음’으로 나오는 말이다. 인터넷에서도 이 말뜻을 찾을 수 없다. 그러니 문맥 속에서 뜻을 파악할 수밖에.
“그렇게 애달캐달 입시 공부에 매달리며 고생을 했는지……”(황석영)
“누이가 시집을 못 가자 어머니 애달캐달 직성을 못 풀어……”(김소진)
쓰임으로 미루어 보면 애달캐달은 “몹시 애를 쓰다, 신경을 쓰다, 신경을 끓이다.” 등의 뜻으로 새길 수 있을 듯하다. 이 낱말은 ‘안달복달’ 같은 부사와 뜻이 얼마간 겹치는 것 같다. ‘안달복달’은 ‘몹시 속을 태우며 조급하게 볶아치는 모양’이라는 뜻이니 말이다.
이 ‘애달캐달’이 어디서 비롯한 말인지는 알 수 없다. 그래도 이 말은 꽤 자연스럽게 쓰이고 있는 듯하다. 이 점에서 ‘주야장천(晝夜長川)’이 와전되어 쓰이는 ‘주야장창’, 또는 ‘주구장창’과는 다소 성격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관련 글 : ‘주야장천’에서 ‘주구장창’까지]
와전이라 해도 원말인 ‘주야장천’에서 너무 나가버린 ‘주구장창’을 사전에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을 터이다. 그러나 원말의 사투리인 ‘도찐개찐’이나 어원을 알 수 없는 ‘애달캐달’을 표준어로 편입시키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한 사회에서 통용되는 공식 언어의 지위를 얻기 위해서 다수 언중의 동의가 있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그리고 그 동의를 바탕으로 규범 바깥에 있는 낱말을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언어의 외연 확장과 함께 표현 영역을 풍부하게 하는 일이다.
사전에 오르지 않았지만, 실제 언어생활에서 의미 있게 쓰이고 있는 이들 낱말을 규범 안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를 희망하는 것은 다만 그런 이유에서다.
2015. 1. 2. 낮달
2015년 7월, 국립국어원은 2015년 2분기 수정 내용’을 발표하며 ‘도긴개긴’을 표제어로 추가하고 표준어로 인정했다. 그러나 사실상 언중들이 즐겨 쓰는 말은 ‘도찐개찐’이다. 도찐개찐은 표준어는 되지 못했지만, 비표준어로 표제어가 되었다. [관련 글 : ‘여자에게 친절한 남자’가 ‘페미니스트’?]
202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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