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준국어대사전>의 이상한 ‘페미니스트’ 풀이
국립국어원이 <표준국어대사전>의 2015년 2분기 수정내용을 공개했다. 수정한 낱말은 표제어와 관용구를 추가하거나 뜻풀이를 추가 또는 수정한 경우 등 모두 19개다. 그중 몇몇 눈에 띄는 낱말들을 살펴보았다.
‘도긴개긴’도 사전에 올랐다
표제어로 추가된 낱말 중에는 ‘도긴개긴’과 ‘도찐개찐’이 있다. 명사 ‘도긴개긴’에는 “윷놀이에서 도로 남의 말을 잡을 수 있는 거리나 개로 남의 말을 잡을 수 있는 거리는 별반 차이가 없다는 뜻으로, 조금 낫고 못한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본질적으로는 비슷비슷하여 견주어 볼 필요가 없음을 이르는 말.”이라는 풀이가 붙었다.
이번 수정은 ‘도긴개긴’과 ‘도찐개찐’이 국어사전 등재와 무관하게 이미 일상에서 매우 활발하게 쓰이고 있는 현실을 추인한 것이다. ‘도찐개찐’은 ‘도긴개긴’의 비표준어다.
추가된 낱말 가운데 ‘들통나다’도 있다. 들통나다는 “비밀이나 잘못된 일 따위가 드러나다.”는 뜻의 동사다. 그동안엔 속어처럼 쓰이다가 이번에 표제어에 올랐다. 이동하의 소설 <도시의 늪>에 나오는 용례에서 확인하듯 이 말은 문학작품에서도 이미 쓰이고 있는 낱말이었다.
‘너무’, 긍정적 서술에도 쓸 수 있다
뜻풀이 수정의 예로 제시된 낱말 가운데 ‘너무’가 눈길을 끈다. 알다시피 ‘너무’는 ‘넘다[남(濫)]’에서 파생한 부사다. 그래서 기존의 뜻풀이는 ‘일정한 정도나 한계에 지나치게’의 뜻으로 부정적 서술어와 호응하는 형식으로 그 쓰임새가 제한되었다. ‘너무’는 용언을 부정적으로 한정하는 부사로만 쓰였다는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 사람들은 ‘너무’ 뒤에도 아주 다양하게 긍정적 서술어를 붙여서 쓴다. 좋은 일에도 얼마든지 ‘너무’를 붙여서 ‘너무 예쁘다’, ‘너무 좋다’, ‘너무 반갑다’처럼 쓰는 것이다. ‘너무’의 뜻풀이를 ‘일정한 정도나 한계를 훨씬 넘어선 상태로’로 바꾼 것은 규정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해소하고자 한 것이다.
페미니스트, ‘여자에게 친절한 남자’?
수정된 뜻풀이 가운데 ‘페미니즘’과 ‘페미니스트’도 있다. 이는 한국여성단체연합 등 여성계의 개정 의견을 참고한 수정인데도 당사자들은 별로 달라진 게 없다고 비판하고 있는 낱말이다. 국어원의 뜻풀이를 보면 이들의 불만에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이번 수정에서 국어원은 ‘페미니즘’을 “사회·정치·법률 면에서 여성에 대한 권리의 확장을 주장하는 주의”에서 “성별로 인해 발생하는 정치·경제·사회 문화적 차이를 없애야 한다는 견해”로 바꿔 풀이했다. 얼핏 보면 무난해 보이지만 이 풀이는 결정적으로 ‘차이’와 ‘차별’의 의미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차이(差異)’를 “서로 같지 아니하고 다름. 또는 그런 정도나 상태”로 ‘차별(差別)’은 “둘 이상의 대상을 각각 등급이나 수준 따위의 차이를 두어서 구별함.”으로 풀이하고 있는 건 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인데도 말이다.
설사 좁게 해석하더라도 ‘페미니즘(feminism)’은 성별 때문에 일어나는 정치·경제·사회 문화적 ‘차이’가 아닌 ‘차별’ 또는 ‘불평등’ 해소를 주장하는 견해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는 얘기다.
‘페미니스트’도 마찬가지다. 국어원은 이를 “① 여권신장 또는 남녀평등을 주장하는 사람 ② 여성을 숭배하는 사람. 또는 여자에게 친절한 남자”에서 “① 페미니즘을 따르거나 주장하는 사람 ② 여자에게 친절한 남자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고쳤다.
여성연합은 개정 의견을 통해 ‘여자에게 친절한 남자’가 성차별 해소와 성평등 사회 실현을 실천하는 사람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잘못된 뜻풀이임을 거듭 지적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국어원은 “실제 우리 사회에는 ‘페미니스트는 여자에게 친절한 남자’라는 용례가 있”다며 예의 뜻풀이를 고수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저런 의견을 떠나서도 어쩐지 바뀐 뜻풀이는 아쉽고 생뚱맞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페미니즘은 우리 시대의 의제가 된 지 오래다. 그런 낱말의 뜻을 고작 ‘친절’로 얼버무리는 것은 난센스 아닌가. 사전의 뜻풀이를 따르면 “남자만이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겠다”는 누리꾼들의 조롱이 이어지는 이유다.
사전(辭典)은 사전(事典)이 아니므로 무슨 사회과학적 개념이나 정의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래도 최소한, 그 낱말이 지닌 본연의 뜻을 밝혀야 마땅하다. ‘페미니스트’를 고작 ‘친절한 남자’의 비유로 한정하는 것은 억지스럽다 못해 쓴웃음을 자아낸다.
‘이슬람국가’(IS)로 간 소년의 ‘페미니스트’는?
영어권에서 그걸 어떻게 풀이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케임브리지 사전(Cambridge Dictionary)>을 검색해 보았다. 거기에 ‘페미니즘’은 “여성도 남성과 같은 권리, 힘, 기회가 허락되어야 하고 같은 방식으로 대우받아야 한다는 신념 혹은 이러한 상태의 성취를 의도하는 일련의 활동”으로, ‘페미니스트’는 “페미니즘을 믿고 여성이 동등한 기회와 대우를 받는 변화를 성취하도록 노력하는 사람”으로 풀이되어 있다.
문외한의 관점으로 보아도 그 풀이엔 ‘페미니즘’과 ‘페미니스트’의 뜻이 충분하다. ‘페미니즘’에는 “여성이 차별받지 않고 남성과 같은 권리와 힘, 기회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원칙이 분명히 드러나 있다. 또 ‘페미니스트’는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기회와 대우를 받는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엄격하게 규정하고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실린 페미니즘과 페미니스트의 뜻풀이는 지금 우리 사회의 문화적 수준을 반영하는 것일까. ‘페미니스트가 싫다’는 말을 남기고 터키에서 잠적한 뒤 ‘이슬람국가’(IS)에 가담한 것으로 알려진 소년이 알고 있었던 ‘페미니스트’와 사전에 오른 낱말과의 거리를 잠깐 가늠해 본다.
2015. 6. 23. 낮달
* 5년이 지났지만 변한 건 없다. 오늘 각각 <표준국어대사전>과 <다음한국어사전>에서 검색한 ‘페미니스트’다. ‘친절한 남자’는 같고, 하나는 ‘여자’, 하나는 ‘여성’이라 쓴 점이 다를 뿐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는 풀이가 붙어 있으니 그나마 ‘진일보’한 거로 봐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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