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간이 ‘ㄹ’로 끝나는 용언의 명사형은 반드시 ‘ㄻ’으로 써야 한다
학교 테니스장 철망에 펼침막 하나가 걸렸다. “베품, 나눔, 보살핌이 있는 아름다운 우리 학교”다. 학교 폭력 예방 관련 펼침막인데, 관제(官製) 물건치고는 쓰인 글귀가 썩 훌륭하다. 그러나 옥에는 늘 티가 있다. 첫 단어는 잘못 쓰였다. ‘베품’이 아니라 ‘베풂’이라야 한다.
우리말에 ‘명사형’이라는 게 있다. 동사나 형용사를 명사처럼 쓰기 위해 어간에다 일정한 어미를 붙인 형태다. 이 명사형은 품사가 바뀌지 않으면서 임시로 명사 노릇을 하는 낱말이다. 이처럼 용언을 명사형으로 바꾸어 주는 어미를 ‘명사형 어미’라고 하는데 이 명사형 어미로 ‘-(으)ᅟᅠᆷ, -기’가 있다. 다음은 명사형 어미가 붙어서 만들어진 명사형의 예다.
⑴ 시민을 뜻을 살피기 바람. (바라+ㅁ)
⑵ 전라도 동복에서 죽음. (죽+음)
⑶ 혼자 있으니 매우 외로움. (외롭+ㅁ)
⑷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 (보+기)
보기에서 밑줄 그은 낱말이 모두 명사형이다. 명사형 어미가 붙었지만, 원래 용언(동사, 형용사)의 성질은 그대로다. ⑴의 기다림, ⑵의 죽음, ⑷ 보기는 각각 동사로서 서술어 역할을 하고 있으며 ⑶의 외로움도 형용사로서 상태를 서술하는 구실을 하는 것이다.
아예 품사를 바꿔주는 ‘명사파생 접미사’도 같은 형태가 있어서 다소 헷갈릴 수는 있다. 다음 보기의 밑줄 친 낱말들은 명사형이 아니라 아예 ‘명사’로 바뀐 낱말이다. 여기 쓰인 ‘-(으)ㅁ, -기’는 접미사가 되는 것이다. 명사로 바뀐 이 낱말들은 체언의 성질을 보여준다. 즉 앞에 나온 관형어(가족의, 그, 진한, 다음)의 꾸밈을 받는 것이다.
⑴ 가족의 바람은 건강뿐이었다. (바라+ㅁ)
⑵ 그 죽음은 널리 알려졌다. (죽+음)
⑶ 그는 진한 외로움을 드러냈다. (외롭+ㅁ)
⑷ 다음 보기에서 골라라. (보+기)
‘명사형 어미’ ‘-기’와는 달리 ‘-(으)ㅁ’은 가끔 잘못 쓰이기도 한다. 주로 어간의 끝소리가 ‘ㄹ’로 끝날 때 이 ‘ㄹ’음을 생략하고 어미를 붙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때는 어간을 살려서 ‘ㄻ’으로 표기해 주어야 한다. 다음은 그 실제 예다.
의식만 하면 틀리지 않는다. 예외가 없기 때문이다. 기본형의 어간(‘-다’를 뺀 나머지)이 ‘ㄹ’로 끝나면 의심할 것 없이 ‘ㄻ’을 붙이면 된다.
나중에 학생부 담당자에게 물었다. 그거 맞춤법이 맞지 않는데요. 아, 도 교육청에서 내려온 문안 그대로 달았는데요? 알았다. 더 볼 것 없다. 저건 우리의 잘난 교육과학기술부의 작품임이 틀림없다.
2009. 3. 26.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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