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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가겨 찻집

‘베품’이 아니라 ‘베풂’이다

by 낮달2018 2019. 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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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간이 ‘ㄹ’로 끝나는 용언의 명사형은 반드시 ‘ㄻ’으로 써야 한다

▲ 전국적으로 모든 학교에 같은 내용의 펼침막이 걸렸다.

학교 테니스장 철망에 펼침막 하나가 걸렸다. “베품, 나눔, 보살핌이 있는 아름다운 우리 학교”다. 학교 폭력 예방 관련 펼침막인데, 관제(官製) 물건치고는 쓰인 글귀가 썩 훌륭하다. 그러나 옥에는 늘 티가 있다. 첫 단어는 잘못 쓰였다. ‘베품’이 아니라 ‘베풂’이라야 한다.

 

우리말에 ‘명사형’이라는 게 있다. 동사나 형용사를 명사처럼 쓰기 위해 어간에다 일정한 어미를 붙인 형태다. 이 명사형은 품사가 바뀌지 않으면서 임시로 명사 노릇을 하는 낱말이다. 이처럼 용언을 명사형으로 바꾸어 주는 어미를 ‘명사형 어미’라고 하는데 이 명사형 어미로 ‘-(으)ᅟᅠᆷ, -기’가 있다. 다음은 명사형 어미가 붙어서 만들어진 명사형의 예다.

 

⑴ 시민을 뜻을 살피기 바람. (바라+ㅁ)
⑵ 전라도 동복에서 죽음. (죽+음)
⑶ 혼자 있으니 매우 외로움. (외롭+ㅁ)
⑷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 (보+기)

 

보기에서 밑줄 그은 낱말이 모두 명사형이다. 명사형 어미가 붙었지만, 원래 용언(동사, 형용사)의 성질은 그대로다. ⑴의 기다림, ⑵의 죽음, ⑷ 보기는 각각 동사로서 서술어 역할을 하고 있으며 ⑶의 외로움도 형용사로서 상태를 서술하는 구실을 하는 것이다.

 

아예 품사를 바꿔주는 ‘명사파생 접미사’도 같은 형태가 있어서 다소 헷갈릴 수는 있다. 다음 보기의 밑줄 친 낱말들은 명사형이 아니라 아예 ‘명사’로 바뀐 낱말이다. 여기 쓰인 ‘-(으)ㅁ, -기’는 접미사가 되는 것이다. 명사로 바뀐 이 낱말들은 체언의 성질을 보여준다. 즉 앞에 나온 관형어(가족의, 그, 진한, 다음)의 꾸밈을 받는 것이다.

 

⑴ 가족의 바람은 건강뿐이었다. (바라+ㅁ)
⑵ 그 죽음은 널리 알려졌다. (죽+음)
⑶ 그는 진한 외로움을 드러냈다. (외롭+ㅁ)
⑷ 다음 보기에서 골라라. (보+기)

 

‘명사형 어미’ ‘-기’와는 달리 ‘-(으)ㅁ’은 가끔 잘못 쓰이기도 한다. 주로 어간의 끝소리가 ‘ㄹ’로 끝날 때 이 ‘ㄹ’음을 생략하고 어미를 붙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때는 어간을 살려서 ‘ㄻ’으로 표기해 주어야 한다. 다음은 그 실제 예다.

 

의식만 하면 틀리지 않는다. 예외가 없기 때문이다. 기본형의 어간(‘-다’를 뺀 나머지)이 ‘ㄹ’로 끝나면 의심할 것 없이 ‘ㄻ’을 붙이면 된다.

나중에 학생부 담당자에게 물었다. 그거 맞춤법이 맞지 않는데요. 아, 도 교육청에서 내려온 문안 그대로 달았는데요? 알았다. 더 볼 것 없다. 저건 우리의 잘난 교육과학기술부의 작품임이 틀림없다.

 

 

2009. 3. 26.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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