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계절’은 가수 이용의 히트곡이다. 1984년께 내 초임 시절에 대단한 인기를 끌었던 노래였다. ‘시월의 마지막 밤’과 그 이별을 노래한 노랫말은 다분히 신파조였다. 그러나 전체 분위기에 힘입어 이 노래는 제법 쓸쓸한 정서를 자아내면서 팬들의 사랑을 받았던 것 같다.
노래야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지만, 사실 제목에서 ‘잊혀진’은 어법에 어긋난다. ‘잊힌’이라 써야 할 데에 ‘잊혀진’이라 쓰는 경향은 문학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프랑스 여류화가였던 마리 로랑생의 시 ‘갑갑한 여자보다……’의 번역에도 “죽은 여자보다도 / 한층 더 가엾은 것은 / 잊혀진 여자이어요.”라며 같은 표현이 쓰였으니 말이다.
‘잊혀진’이 어법에 어긋나는 까닭은 그게 이중의 ‘피동 표현’이기 때문이다. ‘피동’이란 주어가 다른 주체에 의해서 어떤 행위나 동작을 당하게 됨을 뜻한다. 우리말의 피동문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하나는 피동 접미사(-이, -히, -리, -기)를 쓰는 ‘짧은 피동문’과 어간에 ‘-게 되다’나 ‘-아(어)지다’를 붙이는 ‘긴 피동문’이 그것이다.
피동 접미사가 붙은 피동사가 있으면 짧은 피동문으로, 그게 안 되면 긴 피동문을 쓰면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 두 가지를 한꺼번에 쓰면서 불거진다. ‘보다’의 피동사는 당연히 ‘보이다’다. 그런데 ‘보이-’에다가 다시 ‘-어지다’를 붙여서 ‘보여지다’를 쓰는 게 그것이다. 스포츠 중계에서 해설자들이 객관적인 해설을 한답시고 남발하는 말인데, 요즘은 주변에서도 이런 말을 쓰는 이들이 훨씬 많아진 듯하다.
어법에 어긋난다는 걸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쓰는 말로는 ‘씌어지다’와 ‘잊혀지다’가 있다. ‘씌어지다’의 경우는 예전엔 교과서에도 그대로 쓰였던 듯하다. 무심코 쓰다가 ‘아래 아 한글’에서 밑에 붉은 줄이 쳐지는 것을 보고서야 나도 이 말을 잘못 쓰고 있다는 걸 알아챌 정도였으니.
‘쓰다’의 피동문은 ‘쓰이다’로 쓰면 간단한데, 이를 다시 ‘씌(쓰이)- + -어지다’의 형식으로 덧댄 것이다. ‘쓰여지다’도 마찬가지다. 이는 ‘쓰이- + -어지다’가 붙은 것이다.
‘잊혀지다’는 아예 관용적으로 쓰는 말로 자리 잡은 느낌마저 있다. 이제 ‘잊힌’으로 쓰는 게 오히려 어색해진 것이다. 그러나 이가림 시인은 ‘잊힌’을 정확히 쓰고 있다.
그 드뷔시 찻집 유리 속의 금발이 출렁이는 인형은
젖은 눈이 성에 낀 창밖을 보고
수런대는 목소리들 잔 둘레로 넘쳐나
비듬처럼 쌓여 가는데
잊히인 의자 아래 이랑져 오는 음악의 꽃빛 눈부시는
바람결 소리여,
이 침전하는 장송의 파도 가에 앉아서 단 한 번
고운 색깔이 아롱진 어안의 나는
뜨거운 두 손으로 피곤한 이마를 묻어 보네.
- 이수익, 「빙하기 -쟝 바티스트 클라망스에게」 중에서
피동 접미사를 붙일 수 있는 피동사면 짧은 피동문으로 쓰는 게 옳다. 짧은 피동문으로 쓸 수 있는 말에 공연히 ‘-아(어)지다’를 붙이면 어색할뿐더러 뜻도 금방 짚이지 않는다. ‘보아지다’, ‘모아지다’가 그런 예다.
‘느끼다, 닮다, 돕다, 만나다, 바라다, 받다, 배우다, 알다, 얻다, 잃다, 주다, 참다, …….’ 등의 피동사가 없는 말은 부득이 긴 피동문을 쓸 수밖에 없다. 이들은 각각 ‘느껴지다, 돕게 되다, 알아지다, 얻어지다, …….’ 등으로 쓸 수 있다.
말글살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언어 경제의 원칙’이다. 사람들은 말하기에서 거기 들이는 노력을 되도록 줄이려 하는 게 자연스럽다. 그러나 위에 든 보기는 그런 원칙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들이다. 어법에 맞게 말글을 쓰는 일은 까다로워 보이지만 기실은 쉽고 편하게 말글 생활을 하는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누구나 조금만 의식하면 좀 더 바르고 곱게 쓸 수 있다. 바른 말글 생활의 원칙은 생활 속에서 녹여서 쓰다 보면 저절로 굳어지게 마련이다. 당연히 그것은 쉽게 ‘잊히지’도 않을 터이다.
2008. 10. 17.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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