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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도(襟度), 넘어서는 안 되는 선?

by 낮달2018 2019. 10.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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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도(襟度)’는 “다른 사람을 포용할 만한 도량”의 뜻

▲ <한겨레> 사설(2019.10.29.) 여전히 '금도'는 본뜻과 다르게 쓰이고 있다.

“선을 넘었다”고 하든지 ‘금도(禁度)’라는 새말을 만들어 쓰자

 

이 글은 2014년 9월, 박근혜 대통령이 국무회의를 통해 국회의원의 세비 반납 등 국회를 작심 비판한 것에 대해 “금도를 넘었다”고 규정하고 강력히 반발하고 나섰을 때 썼다. ‘금도(襟度)’는 ‘행동의 경계’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포용할 만한 도량’이라는 의미다.

 

그래서 이 ‘금도’란 낱말이 ‘행동의 경계’ 내지는 ‘넘어서는 안 되는 선’ 따위의 뜻으로 잘못 쓰이고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곁들여 비슷한 사례라고 할 수 있는 ‘옥석구분(玉石俱焚)’이나 ‘면장(面墻)’의 본 의미도 환기하였다.

 

그리고 5년. 그러나 상황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최근 자유한국당은 “벌거벗은 임금님”이라는 홍보 애니메이션으로 문재인 대통령을 희화화하고 원색적 비난을 퍼부었는데 이에 대한 여야와 여론의 반응은 ‘선을 넘었다’는 반응 일색이다.

 

여기 쓰인 ‘금도’는 예전의 그 금도(襟度)다. ‘‘다른 사람을 포용할 만한 도량’이라는 본뜻은 변하지 않았는데도 ‘넘어서는 안 되는 선’ 정도의 뜻으로 계속 쓰이고 있는 것이다. ‘한글20108’ ‘맞춤법’은 ‘금도’가 아니라 “‘선’을 넘었다”로 쓰라고 안내한다.

 

이쯤 되면 따로 ‘금할 금(禁)’에다 ‘법도 도(度)’를 쓴 ‘금도(禁度)’라는 새말을 공인해 쓰든지, 아니면 ‘선을 넘었다’고 써야 할 듯하다. 사전에도 없는 말이 계속해서 쓰이는 상황이라면 이런 현실을 언어 규범에 반영하는 게 마땅하지 않겠는가.

 

2019. 10. 30.


▲ 현실에선 '금도'가 '넘어서는 안 되는 선'  정도의 뜻으로 쓰이고 있다. <JTBC> 뉴스 9(위 : 2014.9.16.) <MBC>(아래 : 2019.10.29.)

한자(한문)의 지위가 예전 같지 않은 지 꽤 오래되었다. 한때는 국자 대신 쓰이던 이 문자는 한글전용 시대를 맞으면서 한글을 보조하는 구실에서마저 놓여났다. “아아 新天地(신천지)가 眼前(안전)에 展開(전개)되도다. 위력(威力)의 시대(時代)가 거(去)하고 道義(도의)의 時代(시대)가 來(내)도다.”(기미독립선언서)와 같은 문장을 끝으로 한문은 주류문자에서 퇴출당했다고 할 수 있다.

 

한자의 퇴조가 남긴 것

 

그러나 한자를 나란히 쓰지 않을 뿐, 우리말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건 한자어 어휘다. 또 관용적으로 쓰이는 성어(成語)들도 적지 않다. 굳이 한자 새김[훈(訓)]을 알지 않아도 한자어를 쓰는 데 전혀 문제가 없다. 마치 어원을 모르더라도 영어를 이해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더러 특정한 낱말을 그릇되게 사용하게 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일지도 모른다. ‘옥석구분(玉石俱焚)’ 같은 말은 오래된 사례 가운데 하나다. 이 말의 출전은 <서경(書經)>의 ‘火炎崑岡(화염곤강), 玉石俱焚(옥석구분)이다.

 

‘화염’은 말 그대로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것이고, ‘곤강’은 옥(玉)의 생산지인 중국의 ‘곤륜산’이다. ‘옥석(玉石)’은 옥과 돌, ‘구분(俱焚)’은 ‘함께 타버린다’라는 뜻이다. 결국, 이 구절은 ‘곤륜산의 큰불로 옥과 돌이 함께 타버린다’는 의미다.

 

‘금도’는 ‘행동의 경계’가 아니다

 

그런데 ‘구분’에는 ‘일정한 기준에 따라 갈라 나눈다’는 뜻인 ‘구분(區分)’도 있다. 그래서 한자를 같이 쓰지 않고 ‘옥석구분’을 쓰면 ‘옥석을 함께 태운다’는 뜻으로 잘못 해석될 수 있었다. 결국, 이 문제는 뒤의 ‘구분(區分)’을 우리말 동사인 ‘가리다’로 대체하면서 해결되었다. 뜻글자인 한자의 문제를 소리글자인 한글로 기운[보(補)] 것이다.

 

정치권 등에서 ‘금도(襟度)’라는 낱말이 본뜻과 무관한 다른 뜻으로 쓰인 지 꽤 된 듯하다. 원래 ‘금도’는 ‘옷깃 금’에 ‘법도 도’자를 써서 ‘다른 사람을 포용할 만한 도량’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실제로 이 말은 ‘행동의 경계’ 내지는 ‘넘어서는 안 되는 선’ 따위의 뜻으로 잘못 쓰이고 있다.

 

“(……) 야당이 금도를 지켜주기 바란다.”
“학생으로서 지켜야 할 금도가 있는 법이다. 너희가 자중해야 하는 이유다."

 

위의 문장은 신문기사에서 오린 것이고 아래 문장은 한때 내가 즐겨 썼던 말이다. 낱말을 잘못 쓰면서도 그것을 의식하지 못한 것은 아무도 그걸 지적해 주는 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쓰면서도 이게 제대로 된 말인가 싶은 의아심은 없지 않아 있었다.

 

<미디어오늘>에 연재하는 강상헌의 ‘바른말 옳은 글’[☞ 바로 가기]을 읽고서 나는 오래 써 왔던 이 낱말을 버렸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면 여러 매체에서 ‘금도’의 쓰임새가 잘못이라는 걸 지적하고 있다. 오랜 관행 때문일까. 그러나 여전히 정치권에선 여전히 이 낱말이 쓰이고 있다.[<JTBC> 방송화면 참조]

 

‘알아야 면장’의 면장은 ‘면장님’이 아니다

 

<표준국어대사전>를 검색해 보면 표제어 ‘금도’는 모두 다섯 개가 올라 있다. 첫째는 복숭아의 한 종류인 ‘금도(金挑)’이고, 둘째는 ‘돈줄’이라는 뜻의 ‘금도(金途)’, 셋째는 ‘거문고에 대한 이론과 연주법을 통틀어 이르는 말’인 ‘금도(琴道)’, 넷째는 ‘도둑질함을 금함’의 ‘금도(禁盜)’, 마지막이 ‘다른 사람을 포용할 만한 도량’을 뜻하는 ‘금도(襟度)’이다. 역시 ‘넘어서는 안 되는 선’쯤으로 해석할 수 있는 ‘금도(禁度)’라는 낱말은 사전에 없는 것이다.

 

최근 새롭게 알게 된 낱말로 ‘알아야 면장이라도 한다’의 ‘면장(面牆/面墻)’이 있다. <경향신문>에 연재되는 ‘알고 쓰는 말글’ 꼭지(김선경 기자)[바로 가기 ☞]에서 확인한 뜻이다. ‘면장’이라면 대개 시군구의 하부 행정구역인 면의 책임자를 떠올리지만, 사실 이 말의 뜻은 전혀 다른 것이다.

 

‘면장’은 <논어(論語)> 제17편 ‘양화(陽貨)’ 편에 있는 말로, 공자가 아들 리(鯉)가 공부를 너무 소홀히 하니까 “알아야 면면장(免面牆) 하지.”라고 말한 데서 유래되었다. 여기서 ‘장(牆/墻)’은 담벼락이니 ‘면면장’은 ‘담벼락을 마주하고 있는 것같이 앞이 내다보이지 않는 상황을 면(免)한다’는 뜻이 된다. 이 말은 곧 ‘견문이 좁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인 것이다.

 

그런데 맨 앞의 ‘면(免)’ 자를 떼어버리고 ‘면장’으로 쓰게 되면서 발음이 우리에게 익숙한 ‘면장(面長)’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생긴 것이다. 이 말의 출전을 모르는 이들이 그걸 엉뚱한 의미로 새겨 온 게 이상할 게 하나도 없다. 뜻글자를 소리글자의 형식으로 이해하면서 생기는 일종의 지체고 부조화다.

 

사실 우리는 일상에서 숱한 한자어를 쓰면서도 그게 어떤 글자로 조합된 단어인지를 잘 모르는 경우가 적지 않다. 뒤늦게 사전 등을 찾아 그 뜻을 확인한 단어들이 적지 않다. ‘매우 흔함’을 뜻하는 ‘지천’이 그렇고 ‘가장 높은 위’라는 뜻의 ‘지상’이 그렇다.

 

뜻글자와 소리글자 사이의 ‘부조화’

 

한글로 쓰면서도 ‘지천(至賤)’이 ‘지극히 천하다’는 낱말이라는 걸 의식하는 건 쉽지 않다. 마찬가지로 ‘예술지상주의’라고 할 때의 ‘지상(至上)’이 ‘지극한 위’라는 낱말의 조합이라는 걸 아는 이도 많지 않다. 빛깔을 가리키는 단어들 가운데 ‘연두(軟豆)’와 ‘고동(古銅)’이 각각 ‘연한 콩’과 ‘오래된 구리’를 가리키는 말이란 걸 염두에 두는 이는 잘 없는 것이다.

 

요즘 아이들은 한자를 거의 모른다. 아주 단순한 글자 앞에서조차 머리를 흔든다. 우리 세대만 해도 한문을 따로 배우지 않아도 한자를 일상적으로 접해 왔기 때문에 그 뜻과 음을 새기는 게 낯설지 않았다. 우리가 한자를 새김과 함께 이해하는 것은 그런 연유에서다.

 

그러나 요즘 아이들은 새김과 음을 굳이 맞추어 기억하지 않는다. 앞서 지적했듯 영어 단어를 굳이 어원과 연결하여 기억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자(한문)이 우리 언어생활의 일부를 담당했던 보조 문자가 아니라 낯설고 생경한 외국어가 되어가는 것이다.

 

법률에 ‘한자’를 주요 표기 수단으로 규정하고 싶어 하는 일부 한문 중독자들에겐 피하고 싶은 현상이겠지만 그게 우리의 언어 현실인 것이다. 아마 이는 본격적인 ‘한글전용 시대’가 열리고 있다는 조짐으로 이해하여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말이란 살아 있는 생물이어서 사람들의 뜻만으로 제어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거듭 확인하게 된다.

 

 

2014. 9. 24.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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