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가겨 찻집

‘자기소개’의 두 가지 방식, 혹은 태도

by 낮달2018 2019. 10. 20.
728x90

자기를 소개하는 방식 두 가지와 태도

▲ 연설하고 있는 미국 하원의 엘리자베스 워런 의원. 미국의 국회의원들은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소개할까.

# 1. 가끔 듣는 지역 기독교 방송(CBS)에서는 지역 유명 인사들이 실명으로 의견을 제시하는 형식의 프로그램이 있다. 이들은 서두에 자신을 소개한 다음 의견을 밝히는데, 그 자기소개의 방식이 다소 부담스럽다.

“○○대학교 ○○○ 총장입니다.”

# 2. 몇 해 전, 한국방송(KBS)의 ‘○○○ PD의 소비자 고발’이라는 프로그램에서 본 장면이다. 이 프로그램의 간판 진행자는 한동안은 ‘○○○ PD’로 자신을 소개하더니 어느 날부터는 ‘피디 ○○○’으로 바꾸어 말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 바르다는 시청자의 지적에 따랐다면서.

 

보통 우리는 직위를 먼저 대고 이름을 말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그런데 앞의 예에서는 이름 뒤에 자신의 직위를 붙였다. 단지 이름의 앞뒤 가운데 어디에 직위를 붙이는가가 다르지만, 이 차이는 매우 크다. 앞에 지위를 붙이는 방식은 자신을 낮추는 방식이다.

 

‘교사’와 ‘교수’의 차이?

 

이는 군대에서 병사들이 상관 앞에서 관등성명을 댈 때 따르는 방식이다. 사병들에겐 엄청 높은 사람이 대대장이지만, 그도 별을 단 장군 앞에서는 ‘대대장 중령 아무개’라고 큰소리로 복창하는 것이다. 교사들이 누구에겐가 전화를 걸어 자기를 소개할 때도 이런 방식을 따른다.

 

“○○학교 교사 ○○○입니다.”

 

만약 이와 달리 ‘교사’를 이름 뒤에 붙인다고 가정해 보자. 한 발 더 나가 ‘교사’ 대신 높임말로 쓰는 ‘선생’을 붙인다면 어떨까.

 

“○○학교 ○○○ 교사입니다.”
“○○학교 ○○○ 선생입니다.”

 

앞엣것은 어색하고 뒤엣것은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 있다. 이름 뒤에 직위를 붙이는 이러한 형식의 말투에선 지위나 직위를 과시하는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지위를 앞에 대고 이름을 뒤에 붙이는 방식은 지위보다는 맨 이름을 드러내기 때문에 겸손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방식도 예의 지위가 사회적으로 공인받는 엘리트일 때는 변칙이 허용되는 것 같다. 이를테면 대학교수들이나 국회의원들의 경우가 그렇다. 이들의 자기소개는 지위를 이름 뒤에 붙이는 것이 암묵적으로 허용되는 느낌이 있다.

 

“○○대학교 교수 ○○○입니다.”
“○○대학교 ○○○ 교수입니다.”

“○○당 의원 ○○○입니다.”
“○○당 ○○○ 의원입니다.”

글쎄, 교수든, 국회의원이든 앞엣것처럼 말하는 이는 많지 않은 듯하다. 하긴 국회의원은 개개 의원이 ‘헌법기관’이다. 그들은 의원의 자격으로 발언할 때 반드시 ‘본 의원’이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국민의 위임을 받은 선량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권위’와 ‘지위’ 사이

 

그게 본인의 권위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헌법기관으로서의 권위를 드러내는 표현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걸 듣고 있는 기분은 좀 묘하다. 80년대 5공 청문회 때 스타로 떠올랐던 당시 노무현 의원이 ‘본 의원은’이라는 표현을 아주 강단 있게 사용하는 걸 들었던 기억이 새롭다. 독재에 대한 공적 분노를 억누르며 펼치는 그의 정연한 논리와 그 ‘본 의원’이라는 표현의 조합이 영 거북했던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대학교수들이 뒤엣것을 선호하는 것도 은연중 자신들의 권위를 의식한 까닭이 아닐까 싶다. ‘선생’보다는 ‘교수’로 불리기를 선호하는 것도 ‘초중등 교사’들과 구분되고 싶은 잠재의식 탓일 수도 있으리라. 어쨌든 그들의 그런 말투를 받아들이는 대중의 정서도 그들의 ‘지도적 위치’를 인정해 주기 때문일 것이다.

 

지위를 이름 뒤에 붙이는 게 기본인 것처럼 여겨지는 데가 종교계다. 글쎄, 그런 원칙이 있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내 경험에 따르면 그렇다. 신부나 목사들은 자기를 소개할 때, 어떤 경우에도 ‘목사 ○○○’, ‘신부 ○○○’라고 하지 않는다. 이들은 철저하게 이름을 먼저 이르고 뒤에다 자신의 지위를 붙이는 것이다.

 

▲ 고 김남주 시인(1946∼1994)

그러나 어떠한 때에도 자신을 낮추는 우리말 높임법의 기본원칙은 정당하다. 우리말에서는 자신을 낮추면서 자신이 소속된 집단도 그 낮춤의 범주에 포함한다. 요즘이야 다르지만, 자신을 낮추면서 자신의 부모까지 낮추는 것은 ‘기본’이었다.

 

지위 뒤에다 자신의 이름자를 말하는 방식은 비록 편의상 지위를 밝히긴 했지만, 자연인으로서 자신을 대중 앞에서 낮추는 것이므로 우리말 어법에 걸맞다. 한때 독재자들은 자신을 지칭하면서 ‘본인’이니 ‘이 사람’이니 하는 애매한 대명사를 쓰며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기도 했지만, 지금도 아무도 그런 해괴한 대명사를 쓰지는 않는다.

 

대통령도 ‘저’가 입에 붙었고, 국회의원, 지방자치단체장 할 것 없이 자신을 낮추는 것을 기본으로 여기는 게 요즘 세상이다. 학교에도 변화는 있다. 예전 같으면 교장이 교사에게 전화를 걸 땐 ‘교장’이라고 지위를 내세웠지만, 오늘날 그런 ‘무식한’ 교장은 없다. 상대가 누구건 간에 ‘아무개’라고 이름을 깎듯이 밝히는 게 기본이 된 것이다.

 

시인은 어떨까. 자신이 ‘시인’이라고 밝혀야 하는 자리가 그리 많지는 않으리라. 나는 고 김남주 시인이 어떤 집회에서 자기를 소개하던 말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90년대 초반 대구의 한 대학 대강당에서 이루어진 ‘시와 노래의 밤’이라는 집회에서였다. 그는 객석을 가득 채운 대중들 앞에 꽤 높은 톤과 무척 겸허한 태도로 자신을 드러냈다.

 

“늘 여러분과 함께 투쟁하고 싶은 시인 김남줍니다.”

 

2012. 8. 2. 낮달

 

맨 앞에 소개한 대학 총장은 얼마 지나지 않아 ‘총장 아무개’의 방식으로 바꿔서 말하기 시작했고, 지금은 출연자 대부분이 같은 방식으로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아마, 주변에서 그런 방식에 대한 평가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7년이 지난 지금은 어떨까. ‘의원 아무개’의 방식으로 말하는 국회의원도 늘긴 했지만, 여전히 ‘아무개 의원’이라고 쓰는 사람도 적지 않다. 글쎄, 이를 단순히 ‘잘못’이라고 지적하기 어려울 수도 있긴 하다. 그러나 그걸 받아들이는 처지에서 보면 그건 그리 민주적이거나 겸손할 방식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2019. 10. 20.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