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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여행, 그 떠남과 이름의 기록

케이블카와 권금성, 다시 만난 설악

by 낮달2018 2019. 1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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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박 3일 강원도 회갑여행] ④ 설악산 권금성과 영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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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악산은 남한에선 한라산과 지리산 다음으로 높은 산 (1,708m) 으로 한때 주요 수학여행지였다 .

주문진에서 점심을 먹고 설악동 어귀에 닿은 것은 오후 두 시께였다. ‘국립공원 설악산’으로 들어서면서 우리는 잠깐 어리둥절했다. 아마 주변이 오래된 기억과 달리 연간 수백만 명이 찾는 관광지답게 너무 잘 정비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수학여행, ‘일탈과 통과제의의 시간’

 

1997년에 시골 고등학교 아이들의 수학여행을 인솔하고 온 이래 20여 년 만에 찾은 설악이었다. 그때 고교 수학여행은 설악산 일색이었지만 지금은 제주도뿐 아니라 나라 밖으로 나가는 학교도 드물지 않아졌다. 어쨌든 예전과는 견줄 수 없을 만큼 살림살이가 나아진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 시절에 설악산은 고교생들의 로망이었다. 수학여행의 형식을 빌려 이루어지는 이 장거리 여행은 때로 아슬아슬한 일탈의 기회였다. 몰래 술과 담배를 챙겨가서 그걸 느긋하게 즐기거나 여학생을 꾀는 일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아이들도 적지 않았으니 그것은 10대가 거쳐야 할 통과제의의 시간이기도 했다.

 

설악산은 남한에선 한라산과 지리산 다음으로 높은 산(1,708m)이다. 산 이름이 ‘설악(雪嶽)’이 된 것은 추석 무렵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하며 여름이 되어야 녹기 때문이다. 설악의 ‘악(嶽)’은 ‘큰 산’의 뜻으로 ‘악(岳)’과 같은 글자지만 설악은 언제나 ‘雪嶽’으로만 쓴다.

▲ 조계종 제 3 교구 본사 신흥사가 세운 장대한 규모의 산문 . '조계선풍 시원도량 설악산문' 이라고 적혀 있다 .
▲ 설악산은 바위산이다 . 추석 무렵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하며 여름이 되어야 녹으므로 설악이 되었다 .
▲ 권금성 아래의 단풍 . 아직 때가 일렀는지 단풍은 아직 본색을 보여주지 않고 있었다 .
▲ 케이블카에서 바라본 권금성 주변의 산봉우리 . 기암괴석이 수려하다.

당일, 그것도 반나절만으로 설악을 들여다보는 건 애당초 무리다. 나는 두어 해 전에 설악을 다녀온 벗의 충고대로 케이블카로 권금성에 오르는 걸로 설악산과의 재회를 뭉뚱그릴 생각이었다. 표를 사는 데만 두 시간이나 기다려야 해서 벗이 포기했던 케이블카에 우리는 삼십 분 만에 오를 수 있었다.

 

케이블카로 오른 권금성 봉화대

 

설악동 소공원 안의 깎아지른 듯한 돌산 800m 위 80칸의 넓은 돌바닥 둘레에 쌓은 주위 337m의 석축산성이 권금성이다. 산성을 만든 때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몽골의 침입이 있었던 고려 고종 40년(1253)으로 추정한다.

 

당시 전주, 충주, 춘천 등이 공략당하자 나라에서는 여러 도에 사신을 보내 산성으로 백성을 피난케 하라 하여 급히 성을 쌓았다. 처음에는 설악산성이라 불렀으나 전설에서는 이때 권과 김 씨 성의 두 장수가 하룻밤에 성을 쌓았다고 하여 권금성(權金城)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케이블카는 50명의 승객을 5분 만에 권금성 봉화대 아래까지 데려다주었다. 가파른 산길을 10여 분 오르자 80칸의 넓은 돌바닥이 나타났다. 한때 높이가 4척이었다는 성벽은 허물어지고 터만 남은 권금성이었다. 저 끝에 거대한 자연 성곽처럼 솟아오른 봉우리가 봉화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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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케이블카로 권금성에 오른 사람들의 발길로 말미암아 권금성 주변은 나무가 없는 민둥산이 되었다.
▲ 옛 산성의 흔적인가 . 권금성 주변에 남아 있는 돌담들 . ⓒ 설악케이블카 누리집
▲ 에델바이스로 더 잘 알려진 설악산의 꽃 솜다리 . 5 월에 꽃이 핀다 . ⓒ 설악케이블카 누리집

해발 770m의 산봉우리에 이처럼 거대한 암반이 있다는 게 쉽게 믿어지지 않았다. 원색의 등산복을 입은 등산객들이 사진을 찍느라 소란스러웠다. 여기저기서 중국어가 들려왔는데 어디서나 중국인 관광객을 만날 수 있게 된 것도 우리 시대의 변화다.

 

“아이고, 케이블카가 아니었으면 이런 구경을 어떻게 해?”
“그렇긴 하네. 대신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잃은 게 적지 않을걸.”

 

아내의 말에 맞장구를 치면서도 내 뒷말엔 별로 힘이 실리지 않았다. 케이블카 같은 인공시설물이 산림을 훼손한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 유용성을 반박할 만큼의 이해가 부족한 탓이다. 멸종위기 종 서식지를 포함한 환경 훼손으로 논란을 빚어온 또 다른 설악산 케이블카 사업이 논란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걸 꺼내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였다.

 

‘민둥산’ 권금성은 ‘케이블카의 유산’

 

집에 돌아와 여행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야 나는 비로소 권금성 케이블카의 진실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불과 5분 만에 봉우리에 오를 수 있게 해 주는 케이블카가 운행된 20여 년 만에 권금성 주변에 치명적인 변화를 가져오고 만 것이다.[관련 기사 : 이 지경 된 설악산, 사람이 무섭습니다]

 

설악산은 바위산이지만 ‘오랜 시간이 흐르며 바위 위에 얇은 표토(表土)가 쌓이고 그 위에 풀과 나무가 자라는 신비로운 산’(위 기사)이다. 그런데 케이블카로 권금성에 오른 사람들의 발길로 말미암아 ‘풀이 죽고, 풀이 죽으니 표토가 유실’되고 ‘표토가 유실되니 바위 위에 힘겹게 살아가던 나무들도 죽’어 버렸다.

▲ 권금성 주변의 산봉우리들 . 우리는 흔히 산을 찾지만, 그것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

권금성이 나무 한 그루 없는 민둥산이 된 까닭이 거기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민둥산 권금성이 원래의 모습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상황은 설악 대청봉도 마찬가지라 했다. 권금성을 다녀간 사람 가운데 인간의 잦은 발길이 설악을 황폐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얼마나 될까.

 

설악을 다녀온 후, 최순실-박근혜 게이트가 터졌다. 그리고 지난 연말, 문화재위원회가 설악산 케이블카 사업에 대한 문화재 현상 변경 심의를 만장일치로 부결 처리했다. 박근혜의 ‘적극 추진’ 지시로 일사천리로 진행되던 이 사업이 무산된 것은 ‘박근혜 정책의 탄핵’이기도 했다.

▲ 권금성의 케이블카. 단 5분 만에 사람들을 산 위로 옮겨주지만, 사람들은 정작 잃은 게 더 많을지 모른다 .
▲ 케이블카에서 찍은 신흥사 전경 . 까마득한 기억 속의 절집보다 신흥사는 훨씬 더 큰 도량인 듯했다.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오는 길에는 잠시지만 설악을 조감할 수 있었다. 산과 골도 깊었고 신흥사를 내려다보면서 저 절집이 저렇게 컸던가 하고 나는 머리를 갸웃하기도 했다. 비록 짧은 시간에, 단지 봉우리 하나에 오른 데 불과하지만 나는 처음으로 설악을 만났다는 생각을 했다.

 

수학여행을 왔던 고교 시절은 어려서라고 하지만, 아이들을 인솔하여 여러 번 설악산을 다녀갔건만 내게 설악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다. 비선대와 와선대를, 울산바위와 신흥사를 돌아보았지만, 그에 대한 인상도 거짓말처럼 비어 있는 것이다. 어려서거나 젊어서였다는 것 외에 무엇이 우리를 무심하게 만든 것일까.

 

영랑호를 거쳐 관광 수산시장까지

 

그날 밤 우리는 속초해수욕장 인근의 모텔에서 잤다. 이튿날은 특별히 바쁠 일이 없는데도 돌아가는 날이라는 생각 때문에 우리는 좀 바빠졌다. 우리는 신라 화랑들이 수련했다는 동해안 대표적인 석호(潟湖) 영랑호(永郞湖)를 돌아 속초 관광시장을 둘러보기로 했다.

 

영랑호는 바다가 가로막혀 생긴 호수로 수로를 통해 동해와 이어진다. 신라의 화랑 영랑이 이곳을 발견하고 수련했다는 옛 기록이 있어 ‘영랑호’가 되었다. 일찍이 송강 정철이 기행 가사 <관동별곡(關東別曲)>에서 노래한 그 호수다.

▲ 신라의 화랑 영랑이 이곳을 발견하고 수련했다는 옛 기록 때문에 영랑호로 불리는 호수 주변의 기암괴석들 .
▲ 동해안의 대표적인 석호인 영랑호를 내려다보고 있는 정자, 영랑정 .

고성(高城)은 저만큼 두고 삼일포(三日浦)를 찾아가니, 

(그 남쪽 봉우리 벼랑에 ‘영랑도(永郞徒) 남석행(南石行)’이라고 쓴) 붉은 글씨가 뚜렷이 남아 있으나, (이 글을 쓴) 사선(四仙)은 어디 갔는가? /

여기서 사흘 동안 머무른 뒤에 어디 가서 또 머물렀던고? 

선유담(仙遊潭), 영랑호(永郞湖) 거기나 가 있는가? 

청간정(淸澗亭), 만경대(萬景臺)를 비롯하여 몇 군데서 앉아 놀았던가?
     - 정철, <관동별곡> 중에서

 

날씨는 흐렸고 간간이 실비가 뿌렸다. 날씨 탓이었을까. 우리는 영랑호의 우중충한 수면과 주변의 풍경을 무심하게 둘러보았다. 영랑정이 있는 야트막한 산에 오르니 기암괴석이 놀라웠다. 호수 주변의 숲은 어느 대기업의 리조트와 골프장이 차지하고 있었다. 어디서나 관광지엔 자본이 꾀는 법이었다.

▲ 속초에서의 마지막 여정인 관광 수산시장에서 우리는 건어물을 사고 순대국밥으로 늦은 아침을 들었다 .

속초에서의 마지막 여정은 속초관광수산시장이었다. 우리는 건어물을 조금 샀고, 시장 어귀의 식당에서 순대국밥으로 늦은 아침을 들었다. 집 떠난 지 불과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벌써 여러 날을 지낸 듯한 느낌은 아내나 나나 다르지 않았다.

 

“일단 속초를 떠나는 거야. 언제 설악은 제대로 다시 찾기로 하고…….”
“곧장 집으로 가우? 아니면 더 들를 데가 있우?”
“글쎄, 대관령 양떼목장에 들를까 싶네. 어차피 가는 길이니까.”

 

2017. 1. 11. 낮달

 

[2박3일 강원도 여행]

① 강릉의 솔향, 선교장과 경포대

② 허난설헌 생가 터와 교산 시비를 찾아서

③ 정동진(正東津)과 강릉항 커피거리

대관령 양떼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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