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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여행, 그 떠남과 이름의 기록

문화재등록 거부한 ‘겁 없는’ 촌부들, 누구야?

by 낮달2018 2019. 1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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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군위 한밤마을 주민들의 돌담길 보전하는 방법

▲  한밤마을 들머리에 있는 성안 숲엔 임란 때의 의병장 추모비와  ‘ 진동단 ’ 이라는 마을 솟대가 서 있다 .

지방자치가 자릴 잡으면서 지자체들의 관광자원 개발은 바야흐로 백화제방 시대를 맞은 감이 있다. 지자체들은 빤한 재정을 도울 ‘백기사’로 관광 수입을 겨냥한다. 도시와 농촌을 가리지 않고 비슷한 포맷의 축제가 겹치는 것이나, 관광객을 끌 만한 ‘거리’만 있으면 기를 쓰고 관련 스토리텔링에 골몰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문화재등록’을 거부한 한밤마을 사람들

 

그런 상황에서 집집이 오래된 돌담으로 둘러싸인 유서 깊은 마을이 문화재 등록을 거부했다면 뉴스가 될 만하지 않은가. 그것도 마을 주민들이 투표로 부결시킨 것이라면 이들의 뜻과 의지는 높이 사지 않을 수 없다. ‘관’이 권하는 일을 깨끗이 물리친 이 ‘민’이 경상북도 군위군 부계면 대율리, 한밤마을 사람들이다.

 

한밤마을의 돌담길을 눈여겨본 문화재청이 이 마을을 문화재로 등록하겠다고 나선 것은 지난 2006년이다. 이 마을과 더불어 문화재등록의 대상으로 선정된 곳은 경남 고성의 학동마을을 비롯, 거창 황산마을, 산청 단계마을, 경북 성주 한개마을, 전북 무주 지전마을, 익산 함라마을, 전남 강진 병영마을, 담양 창평 삼지천마을, 대구 옻골마을 등이었다.

 

문화재청이 문화재 등록을 추진한 것은 한밤마을의 돌담길을 만만치 않은 문화유산으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문화재청은 이 마을의 돌담이 ‘전문 장인이 아니라 마을 주민들 스스로가 세대를 이어가며 만든 것으로, 우리 민족의 미적 감각과 향토적 서정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본 것이다.

 

일개 마을이 문화재로 등록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도 오래된 고가나 유적 등이 있어서가 아니라 집과 집, 집과 골목의 경계로 삼아온 평범한 돌담길에 힘입어 국가 지정 문화재가 된다는 것은 더더욱 그렇다. 그런데도 한밤마을 사람들은 ‘무엄하게도’ 이 ‘국가적 요구’를 ‘거부’했다.

 

마을사람들이 나라의 제안을 물리친 것은 ‘주민 생활과 지역 개발에 불편이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 때문이다. 주민들은 ‘문화재로 등록되지 않더라도 주민들은 돌담길을 잘 보존할 것’이라며 주민투표로 문화재등록 안을 간단히 부결시켜 버렸다. 나라의 제안보다 자신들의 삶이 져야 할 불편이 컸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이들 ‘민’이 ‘관’이 추진하는 일을 거부한 것은 어쨌든 통쾌한 일이 아닌가.

 

어디 없이 문화재로 지정된 마을은 남모르게 여러 가지 불편을 겪을 수밖에 없다. 한갓진 관광객들이야 탄성을 지르며 기념사진을 찍고, 그것을 통해 한때를 추억하고 말면 그뿐이다. 그러나 그 터전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삶을 옥죄는 질곡일 수도 있다. 이 마을 사람들은 일찌감치 그것을 내다보았던가. 이들은 90년대에도 ‘전통마을’ 지정을 반대한 전력이 있다고 한다.

▲  한밤마을의 상징조형물 성안 문 .  팔공산의 ‘팔(八)’ 자를 본떠 만들었는데 꼭대기에 기러기 세마리를 앉혔다 .

한밤마을은 신라의 중악(中岳)이었던 팔공산의 북사면에 자리한 천수백 년의 역사를 지닌 유서 깊은 동네다. 돌담길은 팔공산이 주변의 바위와 돌들이 만들어내는 이 마을의 진풍경의 일부다. 이 땅의 어디인들 돌이 없을까마는 한밤마을의 담장을 쌓은 돌은 이 고장의 진산 팔공산 자락 계곡에서 흘러 내려와 쌓인 것이니 ‘팔공산의 선물’이라 해도 무방하겠다.

 

한밤마을, 난리도 피해간 골짝

 

▲ 마을지 <천년 마을, 군위 한밤마을> 창간호

이 마을의 역사는 인근 군위삼존석굴의 조성연대로 비추어 보면 7세기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기록이 없어 그 실상을 알 수 없다. 기록에 전하는 한밤마을의 입향조는 남양 홍씨에서 갈라져 나온 홍란(洪鸞)이라는 이다. 그가 여기 들어와 부림 홍씨의 시조가 된 이래 마을은 그의 후예들이 지켜왔다.

 

한밤은 군위에서도 한참 ‘골짝’이다. 팔공산 북쪽 기슭에 자리한 이 마을은 산 속에 파묻힌 형국이어서 여러 난리가 비켜간 동네다. 임란은 물론이거니와 병자호란, 동학란도 피해 갔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마을의 동·서·북 세 방향의 산들이 인민군에게 점령당했다. 그러나 남쪽 팔공산 주변을 지킨 국군과 미군이 몇 주를 버텨내 점령을 면할 수 있었다 한다.

 

한밤보다 훨씬 남쪽인 칠곡군 석적읍에 살던 우리 집안은 인민군의 남하를 거슬러 이 동네로 피난을 왔다 한다. 물론 나는 태어나기도 전이었다. 소를 몰고, 밥솥을 지고 나선 그 피난길에 여섯 살, 아홉 살이던 두 누님은 지친 다리를 쉬기 위해 때론 기어가기도 했다고 살아생전에 어머니는 늘 떠올리곤 했다.

 

효령을 거쳐 영천 방면으로 가다가 제2석굴암 쪽으로 꺾어 10여 분 달리면 한밤마을에 닿는다. 마을 어귀에 역시 관광객을 노리고 한 공사임이 분명한 묘한 모양의 홍예문이 서 있다. 마을 상징조형물로 세운 문인데 마을 사람들은 이를 ‘성안 문’이라 부른다. 공산의 ‘팔(八)’자를 본뜬 이 문의 꼭대기에는 기러기 세 마리가 앉았다. 말하자면 이 문은 일종의 솟대 노릇을 하는 셈이다.

▲ 성안 숲의 마을 솟대 진동단. 여기서 동제를 올린다 .

성안 문을 지나면 오른편으로 펼쳐지는 솔숲이 ‘성안 숲’이다. 성이 있었던 흔적은 없는데 성안 숲이라 부르는 것은 동·서·남 방향이 팔공산 줄기로 성처럼 둘러싸인 길고 우묵한 골짜기 안이라서다. 솔숲에는 임진왜란 때 신녕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홍천뢰 장군 추모비가 서 있다.

 

2006년 문화체육관광부가 ‘전국 10대 마을 숲’ 중 하나로 지정한 이 솔숲은 매우 정갈하게 정돈되어 있다. 너무 잘 가꾸어져 그 연륜을 쉬 가늠할 수 없는 해묵은 소나무들이 허리춤에 병충해 방제를 위한 마대를 동여매고 일정한 간격으로 서 있다.

 

솔숲 안에 그중 눈길을 끄는 것이 돌 솟대 ‘진동단(鎭洞壇)’이다.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사각 돌기둥 끝에 좀 생뚱맞은 모양의 새 한 마리가 올라앉아 있다. 원래 있던 오리는 잃어버리고 대신 얹은 새다. 진동단에서는 해마다 마을의 동제가 베풀어지고 있다고 한다.

 

숲을 지나면 총 길이 4㎞가 넘는다는 돌담길로 접어든다. 비록 인공으로 쌓은 돌담이지만, 오랜 세월의 힘은 그것을 마을과 자연의 일부로 바꾸어 놓았다. 끊어질 듯 이어지고, 높았다가 낮아지곤 하는 돌담길의 행렬은 그것만으로 나그네의 마음을 잔뜩 흩트려 놓는다.

 

돌담길에 쌓인 돌의 빛깔과 무게는 만만찮다. 고작 수십 년의 세월로는 결코 드러나지 않을 빛깔과 무게감이다. 돌들은 이 오래된 마을을 살다간 무지렁이 백성들의 애환을 침묵으로 증언하는 이 마을의 산 역사일 터이다.

 

돌담길과 핏빛 산수유 열매의 행렬

 

이어지는 것은 돌담만이 아니다. 돌담길 양옆으로 빨간 열매를 빽빽하게 매단 건 산수유다. 세 해 전 마을을 찾았을 땐 여름이었다. 그때 나는 무심코 산수유를 스쳐 지나갔던 모양이다.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산수유 붉은 열매들의 행렬은 마치 이 오래된 마을에 당도한 풍성한 가을의 축복 같았다.

▲  돌담길마다 핏빛 산수유 열매가 지천이다 .  주민들은 이 열매를 잘 거두려 하지 않는다고 한다 .
▲  한밤마을의  4km 에 이르는 돌담길은 마을 주민들 스스로가 세대를 이어가며 만든 것이다 .

군데군데 뻗어 있는 ‘고샅길’로 부를 만한 좁다란 골목으로 부드럽게 휘돌아간 돌담의 모양도 갖가지다. 검고 칙칙한 빛깔의, 돌이끼가 잔뜩 낀 담이 있는가 하면 밝은 회백색의 나지막한 담, 굵직굵직한 큰 돌로 쌓은 담과 몇 낱의 큰 돌 사이에다 조무래기 잡석을 채워 넣은 담이 번갈아 이어진다.

 

마을 한가운데에 대율리 대청(大廳, 경북 유형문화재 제262호)이 있다. 조선 전기에 건립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인조 10년(1632)에 중창된 학사(學舍)다. 일설에 따르면 이 마을 전체가 절터였는데 대청은 대종각(大鐘閣) 자리였다고 한다.

 

이 건물의 첫인상은 ‘검박(儉朴)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순전히 단청 없이 드러난 나무의 맨살과 사방이 트인 개방구조 덕분이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꽤 큰 건물인데도 주변을 위압하지 않는 것은 이 맞배지붕 다락집이 은연중에 뿜어내는 검소하고 소박한 기풍 때문으로 보인다.

 

대청은 사면이 개방되어 있지만, 중창 당시에는 가운데 마루 양옆에 방을 둔 형태로 건축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지금은 마을 촌로들의 경로당 구실을 하고 있는데, 우물마루에 펴 놓은 포대 위에는 무말랭이가 말라가고 있었다.

▲ 절의 종각이 있었던 자리에 건립한 학사(學舍)였던 대청. 지금은 촌로들의 경로당 구실을 하고 있다.
▲ 쌍백당. 한밤마을에서 가장 큰 집인 남천고택의 사랑채.  남천고택은 ‘상매댁’이라고도 불린다.
▲ 상매댁 안채. 250년 전 부림 홍씨 우태의 살림집으로 지은 ‘ㄷ’ 자형 집이다.

대청 옆에 있는 고택이 남천고택, 상매댁(上梅宅)이라고도 불린다. ‘상매댁’은 귀에 익은 이름이다. 내 고향의 먼 친척 할머니의 택호가 ‘상매댁’이었다. 짐작이 맞았다. ‘상매’는 열네 살 때 이 댁에 시집온 할머니의 친정인 칠곡군 왜관읍 매원리의 마을 이름이다. ‘남천고택’이란 무거운 이름보단 5년 전 아흔넷에 세상을 떠났다는 종부의 택호를 딴 ‘상매댁’이 훨씬 정겹다.

 

상매댁은 1836년 부림 홍씨 우태(禹泰)가 지은 살림집으로 한밤마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집이다. 대문을 들어서면 만나는 사랑채에는 ‘쌍백당(雙栢堂)’이란 현판이 걸렸다. 사랑채 오른쪽의 사당 앞에 있는 잣나무 두 그루를 가리키는 이름인 듯하다.

▲  산수유와 어우러진 돌담길은 봄이면 또 다른 풍경을 연출할 듯하다 .

할머니의 막내아들 부부가 이 고택을 지키고 있다는데 우리가 들렀을 때는 집은 비어 있었다. 고택을 보전하는 데는 사람이 사는 게 으뜸이다. 사람의 자취와 훈기가 집의 수명을 늘리고 퇴락을 막는 것이다. 부지런한 주인은 마당에 잔디를 깔았고, 사당 앞과 안채 옆에 원두막 형식의 쉼터를 꾸며 놓았는데 그게 어쩐지 생뚱맞게 눈에 거슬린다.

 

‘고색창연’보다 ‘삶’이 더 중하다

 

그걸 그렇게 느낀 이도 수월찮은 모양이다. “오는 사람마다 거기다 입을 대는데, 거기 살고 있는 주인의 선택인데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냐”고, ‘행복 한밤마을 운영위원회’의 정기욱 사무장은 말했다. 맞다. 관광객이야 구경이나 하고 떠나 버리면 그뿐이지만 거기 사는 사람에게 그것은 화석화된 유적이 아니라 삶의 공간인 것이다.

 

관광이나 답사를 온 ‘난데 사람’들이 원하는 ‘고색창연’을 위하여 거기 사는 사람들에게 생활의 불편을 감수하라고 요구할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을 터이다. 정작 관광지 꼴불견의 원죄는 막 개발로 그 풍광의 가치를 잠식해 버리는 ‘업자’들에게 있으니까 말이다.

 

골목을 빠져나오는데 아직 정비하지 못한 고택이 여럿 있다. 정부의 문화재등록을 거부한 대신 마을 사람들은 제대로 마을을 운영하기로 하였다. 행복 한밤마을 운영위원회(위원장 홍대일)가 그것이다. 운영위원회는 정부 보조사업을 신청 유치하여 지난 3년 동안 정부 지원을 받아 ‘살기 좋은 지역 만들기’ 사업에 주체적으로 참여했고 지금도 농수산식품부의 ‘농촌 마을 종합개발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또 이 마을 출신의 홍원식 교수(계명대)는 ‘군위 한밤마을 연구소’를 설립하여 한밤마을을 비롯, 팔공산과 낙동강 지류인 위천 일대의 역사·문화에 대한 조사와 연구 활동을 활발하게 벌이고 있다. 연구소와 마을 운영위원회가 지난 3월에 펴낸 책자, ‘천년 마을, 군위 한밤마을’은 그 구체적 노력의 일부인 셈이다.

▲  한밤마을의 가을도 파장이다 .  골목길에 낙엽이 스산하다 .
▲ 한밤마을의 돌담은 팔공산의 계곡이 내려준 선물이다. 담 주변의 붉은 빛은 모두 산수유 열매다.

주도로로 나서자 마을의 낮은 지붕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고택의 지붕은 그리 눈에 띄지 않지만, 뜻밖에 슬레이트 지붕이 꽤 많다. 모르긴 몰라도 저건 70년대 새마을운동의 유산일 것이다.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 길도 넓히고’(새마을 노래)의 결과다. 개발로 대표되는 성급한 근대화의 표상인데 그 자취는 좀 쓸쓸하고 처량해 보인다.

 

성안 숲 쪽으로 돌아와 대율초등학교 앞의 순대국밥 집에서 늦은 점심을 들었다. 3년 전 처음으로 한밤에 들렀을 때도 식사를 한 곳이다. 돼지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 맑고 담백한 맛은 여전했다. 음식점 벽에 코미디언 송해가 이 집을 방문한 사진이 걸려 있었다. 마을을 한 바퀴 돌고 나서 담백한 국밥 한 그릇으로 한밤마을 답사를 마무리하는 것도 괜찮은 선택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한밤마을에서 팔공산 한티재에 이르는 길은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든 길이다. 한티재를 향해 마을을 떠나면서 나는 내년 4월에 다시 오마하고 자신에게 약속했다. 산수유가 이 오래된 마을의 돌담 위에서 노랗게 타오를 때, 의성 화전리 숲실마을이 아니라, 군위군 부계면 대율리, 한밤마을을 다시 찾으마고.

 

 

2010. 11. 21. 낮달

 

 

문화재 등록 거부한 '겁없는' 촌부들, 누구야?

경북 군위 한밤마을 주민들의 돌담길 보전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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