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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여행, 그 떠남과 이름의 기록

밀양, 2017년 11월

by 낮달2018 2019. 1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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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밀양의 ‘항일투쟁’ 기행

▲ 복개되었다가 도심 자연형 하천으로 바뀐 해천 주위에 '항일운동 테마 거리'가 조성되어 있다.

입대를 앞둔 청춘의 어느 날, 아내와 함께한 짧은 여행을 하기 전까지 밀양(密陽)은 이 나라의 나머지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나와 무관한 도시였다. 그 짧은 여행의 기억으로 밀양은 내 기억의 사진첩으로 슬그머니 들어왔다.

 

밀양, 그 도시와의 인연과 기억

 

그리고 한때 젊음의 열망을 함께 지폈던 벗 하나가 거기 정착하게 되고 30년 전에 내 앞에서 국어 교과서를 펴고 있었던 여제자 하나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면서 밀양은 내 삶의 어떤 부분으로 성큼 들어왔다.

 

벗 덕분에 우리는 매년 한 차례씩 그 도시에 들러 명승을 찾고 함께 술을 마시고 모텔이나 친구의 시골집에서 자곤 했다. 거기 살고 있던 여제자와 연락이 닿으면서 부산에 살고 있던 그 동기들이 대거 몰려와 단란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관련 글 · 밀양, 2006년 8월(1)  · 밀양, 2006년 8월(2)]

 

그렇게 밀양은 벗과 제자가 사는, 타관이되 타관 같지 않은 도시로 내게 다가왔다. 그리 크지도 그리 작지도 않은 소도시 밀양을 생각하며 나는 가끔 이병주의 중편소설 <예낭풍물지>에 등장하는 가상의 도시 ‘예낭’을 생각하곤 했다.

 

그러나 이듬해, 밀양은 내게 아련한 슬픔을 환기해 주는 도시로 바뀌었다. 거기 살던 내 친구가 갑자기 찾아온 병마에 쓰러진 것이다. 우리는 그의 고향인 거창에서 망자를 배웅하면서 삶의 한 자락을 같이하고 있지만 아무도 그 시간의 추이를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밀양의 슬픔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다섯 해 뒤, 우리는 그의 부인의 부음을 전해 들었고 말을 잃은 채 그이를 배웅해야 했다. 그러나 두 딸이 어린 남동생을 보살피며 씩씩하게 살면서 가정을 이루고 어머니가 되는 과정을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은 위안이었다. [관련 글 : 잘 가게, 친구 ]

 

벗 내외를 보내고 난 뒤, 우리는 더는 밀양을 찾을 일이 없었다. 거기 살던 제자도 그로부터 10여 년, 아이들 공부 때문에 밀양을 떠나 있었다. 나는 가끔 글을 쓰면서 의열단의 약산 김원봉과 석정 윤세주, 그리고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최수봉 의사의 고장으로 밀양을 환기해 보고 있었다.

 

문득 밀양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김태빈 선생이 쓴 <그들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를 읽고 나서였다. 중국의 항일 유적지를 답사한 이 책을 통해서 나는 모름지기 답사란 이래야 한다는 걸 새삼 깨우쳤다. 책을 읽으면서 밀양이 최근 약산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를 새롭게 조명하고 있음을 알았다.

 

제자와 약산을 찾아 다시 밀양으로

 

얼마 전 나는 앞의 제자가 대도시를 떠나 다시 밀양으로 돌아왔다는 걸 알았다. 그는 한적한 시골로 귀촌한 것이었다. 밀양은 그렇게 다시 내 기억 속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나는 지난 1일 기차로 밀양을 찾았다.

 

약산과 석정의 밀양을 다시 보겠다고 했지만 내 마음 한쪽에는 10여 년 전에 만났던 제자들과 만남이 자리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성가신 운전 대신에 제자를 길라잡이 삼아 밀양을 돌아보고, 그와 그간의 소회를 풀고 싶었다.

 

10시 40분 넘어 출발한 무궁화호는 정오를 지나 밀양역에 도착했다. 제자는 대합실에서 나를 맞이해 주었다. 세월이 스쳐 간 흔적이 잘 눈에 띄지 않지만 스무 살이 넘은 두 아들을 둔 그는 쉰 살의 중년 부인이다. 그러나 그들 앞에 내가 여전히 풋내기 교사였던 것처럼 그는 내게 열여덟 큰아기일 뿐이다.

▲ 해천 항일운동 테마 거리에 있는 중국 타이항산의 조선의용대 항일 선전 구호를 재현해 놓은 벽화.
▲ 석정 윤세주의 생가터를 알리는 돌 구조물. 왼쪽에는 약산 김원봉 생가터가 있다.
▲ 해천 항일운동 테마 거리의 약산 생가터 건너편의 약산 김원봉과 박차정 내외가 그려진 벽화 .

나는 그의 안내로 먼저 시내 해천 항일운동 테마 거리를 한 바퀴 돌았다. 해천(垓川)은 조선조 성종 때 밀양읍성을 방어하기 위해 만든 인공하천, 즉 해자(垓字)다. 콘크리트로 덮여 있었던 이 하천은 2015년에 도심 자연형 하천으로 탈바꿈했다.

 

일대에 약산 김원봉(1898~1958) 장군과 석정 윤세주(1901~1942) 열사의 생가터가 있어서 주변 상가에 밀양 독립운동 등 주제별로 항일운동 관련 벽화를 그리고 태극기 나무, 독립군 69인 명패, 희망 우체통 등을 설치해 ‘항일운동 테마 거리’가 되었다.

 

약산과 석정이 그런 방식으로나마 다시 밀양에 소환된 것은 반가운 일이다. 약산의 생가터엔 2층 건물이 들어섰는데 밀양시에서 이 건물을 매입하여 의열 기념관을 꾸밀 예정이라는데, 아직 공사는 시작되지 않은 듯했다. 생가터 옆 잔디밭엔 석정의 생가터를 알리는 돌 구조물이 세워져 있었다. [관련 글 : 조선의용대의 영혼윤세주 열사, 타이항산에서 지다]

▲ 밀양 독립운동가 70분의 명패가 걸린 벽. 가나다순인데 약산의 명패는 맨 밑줄에 있다.
▲ 해천은 밀양읍성을 방어하기 위해 조선조 때에 조성된 인공 하천, 즉 해자(垓字)였다.

인근의 돼지국밥집에서 점심을 먹고 밀양시립박물관 오른편에 있는 독립운동기념관을 찾았다. 밀양은 영남 지역 최대 규모의 3.13만세 운동이 일어난 곳이며 의열단과 조선의용대의 고향이다. 마땅히 독립운동기념관을 따로 갖출 만한 지역이다.

 

기념관 내부에는 밀양의 3·13 독립운동과 최수봉 의사의 밀양경찰서 투탄 의거 등이 미니어처로 재현되어 있었다. 약산과 석정의 독립운동도 빼놓을 수 없다. 의열단과 조선의용대는 독립된 공간에 전시되고 있었다. [관련 글 :  1919년 오늘-김원봉의 ‘의열단’ 출범하다]

▲ 밀양의 독립운동을 전시하고 있는 독립운동기념관은 2008년 밀양시립박물관 오른편에 함께 문을 열었다.
▲ 밀양의 3.13 독립운동을 전시하고 있는 공간. 밀양읍의 당시 모습이 모형으로 만들어져 있다.
▲ 최수봉 의사의 밀양경찰서 폭탄투척 의거를 재현해 놓은 미니어처.
▲ 약산 김원봉과 석정 윤세주의 조선의용대를 기리고 있는 독립운동기념관의 공간.

약산 김원봉, 잊힌 삶과 투쟁

 

밀양의 독립운동가로 빼놓을 수 없는 이가 약산이다. 그러나 그는 해방 후 귀국했다가 친일파가 온존해 있는 남에 실망하여 북으로 갔고, 김일성에게 숙청됨으로써 남과 북에서 모두 잊힌 이가 되었다. 테마 거리에 가나다순으로 걸어놓은 ‘밀양의 독립운동가’ 70인의 맨 밑줄에 약산이 걸려 있는 게 그것 때문인가.

 

함께 의열단과 조선의용대에서 활동한 후배 석정은 타이항산(太行山)에서 전사했고, 약산의 부인 박차정(1910~1944)은 1939년 일본군과의 쿤룬산 전투 중에 총상을 입고 그 후유증으로 해방 1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석정과 부인이 추서 받은 건국훈장은 그나마 그의 투쟁에 작은 위로가 될까.

 

밀양시 부북면에 있는 박차정 여사의 무덤을 찾은 것은 그다음이다. 이정표가 잘되어 있어 이내 산 중턱에 있는 묘소를 찾긴 했는데 공동묘지 한쪽에 주저앉은 봉분에 풀 한 포기 없는 묘 앞에서 우리는 잠깐 말을 잃었다. 비석 옆에 꽂힌 태극기와 조화 몇 송이가 아니었다면 누가 거기서 조국을 위해 스러져 간 투사의 자취를 알아볼 것인가.

▲ 밀양시 부북면의 박차정 선생 묘소. 초라한 무덤 앞에 태극기와 조화 몇 송이가 외롭다.

마지막으로 찾은 데는 상남면 기산리와 마산리에 있는 초산 김상윤(1897~1927) 선생과 최수봉(1894~1921) 의사의 기념비다. 김상윤 선생은 1919년 만주 길림성에서 약산, 석정과 함께 의열단을 창립한 13명의 단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김상윤은 13인의 의열단 초기 단원 중 일본의 감시망에 단 한 번도 걸리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는 의열단 창단 후 7년 동안 16번의 폭탄투척으로 항일투쟁을 벌였다. 1920년 그는 의열단의 제1차 의거인 ‘밀양 폭탄 사건’에서 황상규, 윤세주와 함께 국내에서 자금책으로 활동했다.

 

거사가 실패로 돌아가자 삼엄한 경계를 뚫고 상해로 탈출해 약산 김원봉과 합류한 그는 뒤에 최수봉 의사에게 의열단 가입을 권유했고 같은 해 12월의 최수봉 의사의 ‘밀양경찰서 폭탄 사건’의 배후 인물로 밝혀져 수배되었으나 체포되지 않았다.

 

상하이 황포탄(黃浦灘)에서 김익상, 오성륜, 이종암 등이 일본 육군 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를 저격하고자 할 때도 의사 결정에 깊이 관여했다. 그는 의열단 의백(義伯) 김원봉과 함께 집단지도체제였던 5인 참모 회의의 일원이었다.

▲ 의열단 창립 주역의 한 사람이었던 초산 김상윤 선생의 의열투쟁 기념비. 그는 신출귀몰한 투사였다고 한다.

의열단이 재정 위기로 존립이 위태로워지자, 약산은 독립운동 노선변경 및 조직 재정비를 명분으로 1925년 황포군관학교 입교를 결정하였으나 초산은 이를 거부하고 급진적 민족주의 노선의 의열단 재건 의지를 굽히지 않아 사실상 초기 의열단은 해체되었다.

 

1925년 이후 그는 푸젠성(福建省)에 있던 설봉사(雪峯寺)로 들어갔다가 1927년 숨질 때까지 아나키즘 운동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1990년 정부는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고향마을 앞의 의열투쟁 기념비는 2005년 경남 밀양 유지들이 뜻을 모아 건립한 것이다.

▲ 상남면 마산리 앞,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여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된 최수봉 의사의 추모 기적비.

같은 면 마산리 마을 앞에는 최수봉 의사의 추모 기적비가 세워져 있다. 1920년 12월 27일 의열단원 최수봉은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체포되어 이듬해 대구형무소에서 처형되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고 마을 공동묘지에 묻혀 있던 그의 유해는 1969년 국립현충원에 봉안되었다. [관련 글 : · 1920년 오늘-의열단원 최수봉,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지다]

 

밀양에서의 시간여행

 

사진만 찍고 돌아서는 간략한 여정이었지만 밀양 시내로 돌아오니 해가 설핏 기울었다. 시내의 한적한 횟집에서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로 지난 10여 년을 다시 돌아보았다. 나는 벗이 떠나버린 밀양에 자네가 있어서 좋다고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30년 세월을 넘나들며 우리가 공유했던 시대를 반추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줄인다. 우리가 나눈 이야기 속에 나는 내가 여전히 1980년대 어느 시골 여학교에서 좌충우돌하던 젊은 국어교사로 살아나고 있었고, 그는 열여덟 소녀가 된 듯했다. 밀양역에 내리면서 내가 느꼈던 설렘은 바로 그런 시간여행을 그리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우리는 밀양역에서 헤어졌고 나는 밤 8시 20분 기차를 타고 돌아왔다. 기차가 밀양을 빠져나올 때 나는 이 소도시가 환기해 준 내 젊은 날과 친구의 죽음, 그리고 제자들과 만남을 하나씩 떠올리고 있었다.

 

 

2017. 11. 3.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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