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박 3일 강원도 회갑 여행] ③ 정동진(正東津)과 강릉항 커피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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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포대를 떠나 예약해 둔 숙소가 있는 정동진에 닿았을 때는 이미 날은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리조트의 널따란 주차장에 차를 대자 거대한 배 모양의 건축물이 저 멀리 어둠 속에서 불을 밝히고 있었다. 아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오, 멋있는데! 진짜 배유?”
“설마, 거죽만 배 모양이겠지. 내부는 몽땅 객실일 게고.”
이 리조트에 묵기로 한 것은 방송고 학생의 권유 때문이었다. 나보다 서너 살이 많은 그 학생은 객실에서 해돋이를 볼 수 있지만, 숙박료가 비싸지 않다며 이 리조트를 내게 추천했다. 평소 같았으면 모텔에서 묵는 비용의 몇 배나 드는 데를 고를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정동진에서의 하룻밤
그런데 어쨌든 이름을 따로 붙인 여행이 아닌가, 나는 비어 있는 객실 가운데 ‘오션 뷰(ocean view)’라는 이름의 방을 선택하고 예약 단추를 눌렀었다. 어쨌든 객실에서 바다를 조망할 수 있다면 그것도 괜찮을 거로 생각한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애써서 해돋이를 보는 것에는 별 흥미가 없다. 그러나 바깥으로 나가지 않고 방 안에서 해돋이를 볼 수 있다면 그건 썩 괜찮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해돋이를 찍어 보겠다고 삼각대까지 챙겨 넣었다.
그러나 객실에 들어가서야 내 예약이 헛다리를 짚었다는 걸 깨달았다. 와이파이가 되지 않아 부른 종업원이 해돋이를 볼 수 있는 방은 따로 있다고 말해 주었기 때문이다. 해돋이가 주목적이 아니었으므로 우리는 실망하는 대신 편하게 하룻밤을 묵었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서둘러 리조트를 빠져나왔다. 잘 조경된 리조트 주변의 해돋이 공원에서 조망하는 바다 풍경이 좋았다. 대형 조각 작품이 있는 조각공원보다 소나무가 외롭게 서 있는 낭떠러지 저편으로 잔잔하게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며 아내는 연신 탄성을 질러댔다. 내륙 사람들에게 바다는 언제나 동경의 대상인 것이다.
정동진은 ‘한양의 광화문에서 정(正) 동쪽에 있는 나루[진(津)]’라는 뜻으로 강릉시 강동면 정동진리 일대를 가리킨다. 강릉의 한적한 바닷가 마을이었던 정동진은 1990년대 중반에 인기 TV 드라마 <모래시계>(SBS·1995)의 촬영지로 등장하면서 전국에 알려졌다.
특히 1962년 탄광촌 주민들과 석탄 수송을 위해 영업을 시작한 정동진역은 1980년대 말 석탄산업 합리화 조치 등으로 인하여 탄광촌의 사람들은 떠나가기 시작하면서 폐역을 검토하기도 했으나 인기 드라마의 배경으로 주목받으면서 기사회생했다.
바다 역엔 새마을호도 선다
정동진역은 세계에서 바다와 가장 가까운 역으로 기네스북에 오른 데다가 전국에서 유일하게 해돋이를 볼 수 있는 역이라는 게 알려지면서 상한가를 쳤다. 통일호가 운행되던 시절만 해도 무정차 역이어서 정동진역에서 해돋이를 보려면 강릉에서 내려 다시 비둘기호를 이용하여야만 했다. 그러나 지금 이 역에는 새마을호도 정차한다고 한다.
정동진역은 지척이었다. 나는 정동진에서 삼척까지 운행하는 바다 열차를 타 볼 생각이었으나 공교롭게도 철도공사는 파업 중이었다. 대합실 창구 위에 파업 관계로 바다 열차가 운행하지 못한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대신 우리는 입장권을 사서 플랫폼으로 들어갔다.
앞서 밝혔듯 10여 년 전에 나는 이 역을 다녀갔다. 교지를 편집하던 학생들과 함께 기차를 타고서였다. 1월이었는데 날씨가 너무 추워서 아이들 사진을 찍어주는 게 고작이었을 뿐, 주변 풍경을 제대로 살피지도 못했었다.
안도현 시인은 ‘바닷가 우체국’을 노래했지만 ‘바닷가와 기차역’도 그만큼의 울림을 가진 조합이다. 우체국과 기차역은 ‘보내는 곳’이라는 점에선 비슷하다. 보내는 게 편지거나 사람이라는 차이가 있긴 하지만.
플랫폼에 있는 복선 철길은 여느 역과 다르지 않지만, 정동진역은 바다와 닿은 낮은 비탈에 왕복 철로가 놓였다. 철길 위쪽은 구부정한 소나무와 벤치가 이어지고, 철길을 따라 달리는 목책 너머로 선명한 에메랄드빛 바다가 펼쳐진다. 이 역은 사람들이 꾈 만한 요소들을 두루 갖추고 있는 것이었다.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소나무 사이로 벤치와 정동진 시비를 비롯한 몇 개의 조형물들이 세워져 있는데, 언제나 그렇듯 그건 사족에 불과하다. 정동진역은 바다와 철길과 기차, 그리고 승객들만으로도 넉넉히 완성되는 그림이 아닌가. 그런 조경 탓에 이 한적한 역이 은은히 뿜어내는 정취가 오히려 가려지는 것이다.
뜻밖에 강릉은 커피로 유명한 도시다. 강릉은 2000년대 이후, 한국의 1세대 바리스타들이 강릉에 정착하면서 커피의 메카가 되었다. 강릉엔 강릉항 커피 거리뿐만 아니라 경포와 연곡, 주문진 근처, 그리고 시내 구석구석에 커피집들이 널려 있는 것이다.
커피 강릉, 항구의 커피 거리
이 유서 깊은 도시와 커피의 조합이 가능해진 것은 물맛 덕분이라고 하는데 글쎄다. 차도 아닌 커피에 웬 물맛이냐고, 물맛은 이 땅 어디나 비슷한 것 아니냐고 굳이 반문할 일은 아니다. 무릇 모든 일에는 적당한 인과가 필요한 것이니 말이다.
물 좋은 강릉의 차 문화는 일찍이 신라 시대부터 발전했다고 한다. 강릉에 있는, 하나밖에 없다는 신라 시대의 차 문화 유적지 ‘한송정(寒松亭)’이 그 증거다. <동국여지승람>은 한송정을 일러 “정자 곁에 차샘(茶泉), 돌 아궁이(石竈), 돌절구(石臼)가 있는데 곧 술랑선인(述郞仙人)들이 놀던 곳”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커피에 관한 강릉의 명성을 알고 있었던 나는 강릉의 커피 거리를 내 여정에 끼워 넣었었다. 시간만 넉넉했다면 ‘보헤미안’이나 ‘테라로사’를 들를 수도 있었지만 갈 길이 바빴다. 내비게이션은 정동진에서 불과 20여 분만에 우리를 강릉항에 데려다주었다.
‘안목’이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강릉항에는 해변을 따라 200여 미터에 이르는 커피 거리가 조성되어 있다. 애당초 이 거리의 이름을 알린 건 커피 자판기였다. ‘자판기 커피’라면 누구나 떠올리는 달고 텁텁한 그런 커피가 아니다. 커피 거리의 자판기에선 저마다 다르고 독특한 맛의 커피를 선보인 것이다.
해변을 따라 이어진 커피집이 횟집보다 많았다. 프랜차이즈 커피전문점 사이로 낯선 이름의 커피집이 오히려 당당해 보였다. 바닷가 작은 솔숲 앞에 차를 대고 우리는 하얀 페인트를 칠한 유럽풍의 한 커피집에 들어갔다.
우리는 익숙한 맛의 커피를 주문하고 판매하는 원두커피 두어 봉지를 샀고, 2층 테라스에서 해변과 거리를 내려다보면 커피를 마셨다. 그러면서 나는 처음으로 내가 신맛보다 쓴맛의 커피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꽤 오래 커피를 마셨지만, 별다른 자의식 없이 순간의 맛만 음미해 왔다는 것도.
시간만 넉넉했다면 나는 좀 더 거기 머무르고 싶었다. 그러나 어느새 해는 중천에 걸렸고, 우린 갈 길이 바빴다. 빵 몇 조각으로 아침을 때웠으므로 슬슬 허기가 느껴져 왔다. 우리는 주문진읍 수산시장에서 회를 곁들인 점심을 먹었다.
주문진(注文津)은 고등학교 수학여행 길에서 지나쳤던 동네다. 그때 우리가 탄 버스는 주문진여고 앞을 지나갔고 나는 그 지명이 썩 마음에 들어서 언젠가 저런 여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쳐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뒷날 교사가 되긴 했지만 나는 열여덟 살 때의 생각을 실천하지는 못했다. 사춘기 시절의 순간적 감상은 그냥 감상으로 끝났다. 그러나 교직에 발을 디디면서도 나는 그게 내 평생의 업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우연과 필연의 총합, 그게 삶이었던가.
오후 세 시가 겨워서 우리는 설악동으로 들어갔다. 초행도 아닌데도 우리는 낯선 풍경 앞에서 좀 황망해졌다. 눈 앞에 펼쳐진 산과 골짜기……. 이게 설악산이었다고? 오래지 않은 옛 기억이란 변화무쌍한 세월 앞에서 스러지기 쉬운 것이다.
2017. 1. 7. 낮달
[2박3일 강원도 여행]
* 여행은 다녀와서 글로 정리하면서 마무리된다. 찍어온 사진을 들여다보며 여정을 복기하거나 재구성하면서 그 갈피마다 떠오르던 느낌 앞에 머리를 끄덕인다. 지난해 봄에 다녀온 유럽여행도, 지난 가을의 강원도 여행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유럽여행은 마무리를 못 했다. 여행기 기사를 다섯 편인가 쓰고 난 뒤에 난 얌전히 그 후속 기사를 접어 버렸다. 제 나름대로는 공을 들여 쓴 기산데, 그게 특별한 새로움이나 독자들에게 읽을 만한 흥미를 주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였다.
강원도 여행도 마찬가지다. 앞서 두 편의 기사는 그나마 손쉽게 쓰긴 했는데 이번 글은 당최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정직하게 말하면 마땅히 할 얘깃거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걸 기사랍시고 보낼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실을 기사가 넘칠 텐데 신통찮은 글로 편집자를 성가시게 하면서 귀중한 지면을 축낼 일은 없지 않나 싶었다. 무어 내가 대단한 양심적인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뭔가 좀 겸연쩍고 창피해서다. 글쓴이만 다를 뿐 내용이 거기서 거긴 이야기를 주절대서 어디에 쓸 건가 말이다.
블로그에다 이 글을 올리는 것은 그나마 블로그는 훨씬 사적인 공간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렇고 그런 진부한 얘기라도 이건 내 생활의 일부일 터, 마음이 편해지는 이유다. 물론 책임이 필요하다면 그건 전적으로 나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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