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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이야기] 언어 민주화 - ‘당 열차’에서 ‘우리 열차’로

by 낮달2018 2019. 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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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 내 안내 방송도 ‘당 열차’에서 ‘우리 열차’로 바뀌었다

▲ 언제부턴가 기차의 안내방송에서는 '당 열차'를 '우리 열차'라고 쓰고 있다. 이 역시 언어 민주화의 일부다.

2010년에 블로그에 ‘권위의 언어, 평등의 언어’라는 글을 썼다. 우리의 일상 언어 속에 깃들어 있을 수 있는 ‘권위와 평등’의 문제를 돌아본 글이었다. 나는 교사들이 자신을 ‘선생님’이라고 지칭하는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하여 권위주의 시대의 권력자들이 쓰던 말도 되돌아보았다. [관련 글 : 권위의 언어, 평등의 언어]

 

박정희는 꼬장꼬장한 목소리로 ‘나’를 썼고, 전두환은 좀 느끼하면서 거만한 목소리를 ‘본인’이라고 말했다. 뒤이어 노태우는 ‘이 사람’이라는 독특한 지칭을 썼다. 그러나 지금은 대통령은 물론, 국회의원이든 누구든 자신을 그런 방식으로 말하는 사람은 없다.

 

말하자면 시대의 진전이겠는데, 대중 앞에 자신을 ‘저’로 낮추는 것은 유권자의 지지로 생명이 오가는 선출직 정치인들의 기본이 되었다. 그것은 단순한 ‘예의 바름’이 아니라 교과서에서나 존재하던 ‘위임받은 권력’의 의미를 요즘 정치인들이 체득하고 있기 때문이다.

 

몸에 밴 겸손이 남다른 문재인 대통령의 언행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이유다. 그는 고개와 허리까지 깊숙이 숙여서 국민을 만난다. 대통령이 허리를 굽혀 국민을 만나니 총리가 굽히고 장관이 굽히며, 관료들도 기꺼이 허리를 굽히곤 한다. 국민으로서는 신선한 경험이 아닐 수 없다.

 

글쎄, 아직도 군대는 예전과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군대에서는 지휘관이나 간부들이 자신을 마치 제삼자처럼 지칭하곤 한다. 자신을 가리켜 ‘대대장’이니 ‘중대장’이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상명하복의 계급 사회인 군대는 태생적으로 언어의 민주화도 늦어질 수밖에 없는 듯하다.

 

언어의 민주화-‘당 열차’가 ‘우리 열차’로

 

국회의원들이 자신을 ‘본 의원’이라 지칭하며 무게를 잡던 때가 1988년 5공 청문회였다. 요즘 청문회는 성격이 다르기도 하지만 그런 식으로 자신을 말하는 이는 드물어졌다. 더러는 ‘본 의원’이라 칭하는 게 헌법기관의 권위를 살리는 표현이라고 보기도 하지만 권위가 그런 표현을 통해서 세워지는 것은 아니다.

 

기차나 비행기에서 승무원들이 하는 안내에서도 언어의 변화를 느낄 수 있다. 요즘 자주 기차를 이용하면서 듣는 안내방송을 통해 이른바 ‘격세지감’을 확인한다. 옛날에 열차의 안내방송에서는 꽤 위압적인 언어가 사용되었다.

 

“당(當) 열차, 잠시 후 종착역인 ○○역에 도착하겠습니다.”

 

정확하지는 않은데 비행기도 마찬가지로 ‘당 비행기’, 또는 ‘당기(當機)’ 정도로 썼던 것 같다. 이런 식의 한자어를 쓰는 방식은 낯설고 권위적이다. 거긴 인간의 감정이 개입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요즘 기차나 비행기에서는 그런 한자 말을 더는 쓰지 않는다.

 

“우리 열차는 잠시 후 종착역인 ○○역에 도착하겠습니다.”

 

처음으로 ‘우리 열차’라는 표현을 들었을 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행자를 목적지까지 이동시켜 주는 기차를 승객들은 ‘우리 기차’로 인식한다. 아, 그렇구나! ‘당’ 대신 ‘우리’를 쓰면 되는구나……. 그건 한편으로 반갑고 한편으로 왜 그런 생각을 못 했던가 하는 아쉬움을 떠올려주는 표현이었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 한자어 관형사로 올라 있는 ‘당(當)’이나 ‘본(本)’은 때에 따라 상당히 권위적인 뉘앙스를 드러내는 말이다. ‘당 열차’도 그렇지만 ‘당사(當社), 당행(當行), 당청(當廳)’ 등은 대체로 위압적인 느낌을 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당 열차가 ‘우리 열차’로 쓰는 것처럼 ‘우리 회사’(당사), ‘우리 은행’(당행) ‘우리 ○○청’(당청)으로 써서 안 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같은 은행 간 이체를 ‘당행이체’라고 쓰는 것은 그렇더라도 고객에게 안내하는 글에서 굳이 ‘당행’을 써야 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법정에서도 ‘기립’ 대신 ‘일어서십시오’

 

‘본’도 비슷한 어감을 준다. ‘본 법정’, ‘본 변호인’ 등의 말도 그렇고, 독립된 낱말이 된 ‘본인(本人)’, ‘본관(本官)’도 쓰임새에 따라서 권위적인 느낌을 주는 말이다. “말하는 사람이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말. 주로 공식적인 자리에서 ‘나’를 문어체로 이르는 말”인 ‘본인’이 그렇다. 문어이긴 하지만 ‘일정한 직급 이상의 관직에 있는 사람이 부하들을 대하여 자기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는 ‘본관’도 마찬가지다.

우리말로 풀어쓰면 부드러워지는데 이를 한자어 형식으로 쓰면 딱딱하고 위압적인 느낌을 준다. 예전에는 법정에서 정리(庭吏)가 재판부가 드나들 때 ‘기립’을, 자리에 앉으면 ‘착석’을 외쳤다. 요즘은 이도 ‘일어서십시오.’, ‘앉으십시오.’ 정도로 부드러워졌다.

 

각종 법률용어에서 일반 시민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한자어로 된 말을 순화하는 것도 언어 민주화의 일부다. 민주주의는 정치적 제도에 그치지 않고 언어의 선택과 사용에도 담겨 있는 것이다.

 

 

2017. 12. 14.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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