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겪다’를 ‘젺다’로 쓰는 경상도 말
경상도에서 나고 자라서 군대 생활 빼고는 지역을 떠난 적이 없다. 당연히 경상도 고장 말에 인이 박였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국어를 가르쳐야 한다. 당연히 수업 때 쓰는 ‘말’을 의식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초임 시절엔 딴에는 표준말을 쓴다고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였다.
억양이야 타고난 지역의 그것을 버리기 어렵지만, 일단 어휘는 공인된 표준말을 썼다. 자주 ‘ㅓ’와 ‘ㅡ’를 잘 구분하지 못하는 편이긴 하지만. 그래서 뜻한 바는 얼마간 이루었다. 강원도에서 전학 온 아이가 다른 교사들의 수업은 잘 알아듣지를 못하지만 내 수업은 힘들이지 않고 들을 수 있었다고 했으니.
표준말 정책이 고장 말을 열등한 존재로 밀어냈다
경력이 늘고, 나이가 들면서 수업 언어로 굳이 ‘표준말’을 고집할 필요가 있을까 보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선 자연스러운 수업의 흐름에는 다소 딱딱하달 수 있는 표준말보다는 고장 말이 마침맞다. 딱딱한 높임말로 진행하는 수업보다 가끔 평어를 쓰는 수업이 부드러운 것과 마찬가지로.
국어를 가르치면서 나는 우리나라의 표준어 정책이 결과적으로 방언, 혹은 사투리라 부르는 고장 말의 가치를 깎아내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표준어는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이다. 이 ‘표준어 규정’은 고장 말을 쓰면 ‘교양 없는 시골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이다.
문학작품은 맛깔난 고장 말의 가치를 확인하는 구실을 하지만, 한편으론 표준말과의 대립을 통해 ‘열등한 언어’로서의 지위를 고착시키는 측면도 있다. 지방을 무대로 전개되는 소설에서 고장 말을 쓰는 계층이나 집단, 그리고 표준말을 쓰는 인물의 성격은 선명하게 갈리는 것이다.
박경리의 <토지>에서 주인공 최서희는 표준말을, 나머지 평사리 사람들은 고장 말을 쓴다. 이는 교육받은 양반, 지식인 계층과 무지한 농민과 상민을 가르는 주요한 표지로 작용한다. 이러한 구분은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 등에서 일상적으로 쓰인다. 그리고 그런 구분을 통해 고장 말은 낮고 열등한 언어, 상민의 말 정도로 격하되는 것이다.
표준어 정책이 시작된 것은 1933년 조선어학회에서 ‘한글맞춤법통일안’을 제정하고 난 다음부터다. 일제 식민지배자들은 방언을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규정하면서 그 가치를 폄훼하기 시작했다. 국립국어원장을 지낸 이상규 교수(경북대)는 ‘방언의 미학’을 펴내면서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의 표준어 정책은 서방 유럽이 식민정책을 쓰면서 역사와 문학적 지식을 가진 원주민어를 절멸시킨 것과 마찬가지다.”
“편의에 의해 인위적이고 강제적으로 탄생한 표준어가 아름다운 다른 방언을 ‘열등한 존재’로 밀어낸 것은 ‘포식자의 횡포’라고 할 수밖에 없다.”
전 세계적으로 ‘표준어’를 정하고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와 북한(문화어)뿐이라고 한다. 미국에도 표준어 규정이 없고, 일본과 중국도 마찬가지다. 최근 유네스코가 21세기 문화의 다원성을 존중해 원주민어를 보존하자는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도 같은 흐름인 것이다.
표준말과 방언(고장 말)의 관계를 재정립하려는 시도가 ‘표준말’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이 점에 대해서도 이상규 교수는 일정한 선을 그었다.
“방언을 새로운 각도에서 재해석하려는 노력을 언어 규범을 멸시하는 행위로 여겨서는 곤란하다.”
“표준국어대사전이 한 국가의 말글살이를 종합하는 언어 창고로서 거듭날 수 있도록 이를 보완하는 작업이 시급하다.”
수업 중에 아이들에게 익숙한 고장 말을 쓰는 것을 꺼리지 않게 된 것은 타의로 떠났던 학교로 되돌아오면서부터였다. 그전까지 나는 수업 때 깍듯한 높임말을 썼고, ‘가능한 한’ 표준말을 쓰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었다.
그러나 경력이 쌓이면서 수업의 긴장감도 따라 느슨해졌다. 나는 수업 시간에 친근한 고장 말을 슬슬 쓰기 시작했다. 동시에 딱딱한 높임말 대신 평어를 섞기 시작했다. 정겨운 평어와 고장 말의 조합은 교사와 학생 사이의 거리를 좁힐 뿐 아니라, 수업의 성패를 좌우하는 ‘교감’에도 도움이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사라져가는 고장 말, ‘질다’, ‘젺다’
그러구러 복직하고 20년이 코앞이다. 그 사이 세월만 흐른 게 아니라, 아이들도 많이 바뀌었다. 어느 날부터 아이들은 예전처럼 고장 말을 입에 달고 살지 않는다. 아이들은 억양까지는 따라가지 못하지만 거의 표준말에 가까운 말을 쓴다. 때로 묵은 고장 말을 쓰면 그게 무슨 뜻인지 몰라 맹한 표정을 짓곤 한다. 다행스러운 일은 아이들이 일본어 찌꺼기도 생각보다 많이 버리고 있다는 점이다.
교사들 사이에서는 통하는 고장 말이 아이들 앞에 가면 외계어 비슷해지는 경우도 더러 있다. 그러다 보니 요즘은 다시 아주 토속적인 고장 말은 스스로 가려서 쓴다. 요즘은 아이들의 부모들도 예전처럼 고장 말을 잘 쓰지 않는다. 특히 ‘길>질’과 같이 형태소 내부에서 일어나는 구개음화 현상으로 이루어진 말은 거의 사라지고 있지 않나 싶을 정도다.
· 길→질
· 기름→지름
· 김→짐
· 김→지심
· 길다→질다
· 겪다→젺다
연구개음 ‘ㄱ’을 입천장소리(경구개음)인 ‘ㅈ’으로 대체해 발음하는 이 현상은 주로 노인들에게서 나타나는 듯하다. 60대들도 중등교육을 받은 이라면 이런 발음을 잘 하지 않는다. 대체로 보아 교육 정도가 낮고, 시골에 사는 60대 이상의 노인들에게 일반적인 현상 같아 보인다.
이들은 ‘길’을 ‘질’이라 하고 ‘길가’를 ‘질가[질까]’라 한다. 당연히 ‘길다’도 ‘질다’로 쓴다. 이 말은 지명에도 그대로 쓰인다. 우리 고향엔 ‘진실’이라는 동네가 있는데 이 마을에 들어선 초등학교 이름이 ‘장곡(長谷)’이다. 그게 ‘긴 시내’라는 뜻의 고유어 명칭 ‘진실’을 한자로 바꾼 것이라는 걸 나는 고등학교에 들어갈 무렵에야 알았다. ‘실’은 대체로 ‘계(溪)’로 쓰는데 여기서는 ‘골짜기’라는 뜻의 ‘곡’으로 바꾸었다.
먹는 ‘김’이나 나는 ‘김’도 어른들은 ‘짐’으로 쓴다. ‘짐 안 나는 음식이 더 뜨겁다.’라고 쓰고, ‘그 귀하던 짐이 요샌 흔전만전이다.’ 등과 같이 쓴다. ‘논밭에 난 잡풀’을 뜻하는 ‘김’을 ‘지심’이라 쓴 시는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이다. 시의 일곱째 연에 있는 ‘아주까리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가 그것이다.
나이 들면서 고장 말을 아무 저항 없이 받아들이게 된 것은 어릴 때부터 받아온 교육, 또는 그 도그마로부터 자유로워졌기 때문이다. 규범으로서의 표준말이 모든 언어의 절대 표준은 아니라고, 아주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되는 것은 대체로 ‘밥그릇’의 힘이 아닌가 싶다.
고장 말에 담긴 ‘원초적 정서’, 그 떨림
언젠가 후배에게 ‘겪어보라’ 대신에 ‘젺어보라’고 했더니 아주 낯설어했다. 저도 경상도 출신인데도 고장 말이 얼른 느낌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다른 건 몰라도 ‘겪다’ 대신에 ‘젺다’가 우리네 삶에서 드러내는 느낌을 훨씬 더 정직하게 표현하는 말이라고 믿는다.
“이 방 저 방 젺어봐도 서방이 제일이다.”
“이 집 저 집 젺어봐도 계집이 제일이다.”
‘어렵거나 경험될 만한 일을 당하여 치르다.’나 ‘사람을 사귀어 지내다.’는 뜻을 가진 낱말 ‘겪다’가 어떤 현상의 외연만을 건조하게 이른다는 느낌이지만, ‘젺다’는 그 현상의 속살을 아주 날 것으로 드러내는 느낌이 있는 것이다.
표준말과 견주어지는 고장 말의 가치는 ‘그 지역의 고유한 역사가 숨 쉬고 얼이 스며있는 문화유산’이어서만이 아니다. 같은 고장 말을 쓰는 사람들이 나누는 정서적 동질감도 소중하다. 낱말 하나하나에 담겨 있는 것은 그 시대와 지역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희로애락, 그 떨림일 터이기 때문이다.
‘-니껴’와 ‘-니더’를 쓰는 경북 북부를 떠나 고향 가까이 오면서 사람들과의 대화가 한결 편해졌다. 몇몇 어미와 낱말의 차이가 있을 뿐, 같은 경상도 고장 말인데도 푸근해졌다고 느끼는 것은 내 원초적 정서가 이 고장 말을 만나 비로소 화들짝 깨어나고 있어서일 것이다.
2012. 6. 22.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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