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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안동 이야기

부용대, 물돌이동[하회(河回)]의 가을

by 낮달2018 2019. 10.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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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회와 부용대에 닿은 가을

▲ 부용대에서 바라본 하회마을 입구. 은행나무 가로수와 볏논이 노랗게 익어가고 있다.
▲ 부용대에서 바라본 하회마을. 반가의 기와집들은 오른편 마을 안쪽으로 펼쳐진다.

가을이라고 느끼는 순간, 가을이 이미 성큼 깊었던 모양이다. 어느 날 아침 깨어나니 발밑까지 가을이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때아닌 한파가 들이닥쳤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시월도 막바지다. 곧 수능시험이고 올 한 해도 얼마 남지 않았다.

성큼 깊어진 가을, 부용대로 가다

알 수 없는 조바심이 마음속에 똬리를 틀고 있다. 공연히 어지러운 마음을 가누느라 이리저리 책을 뒤적이고 잡다한 상념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지난 일요일 오후에 혼자서 집을 나선 것도 그런 까닭에서였을까. 사진기를 챙겨 들고 떠난 곳은 부용대였다.

며칠 동안 자꾸 부용대에서 내려다보는 하회마을 풍경과 발밑의 강을 오가는 나룻배가 아련하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룻배라고 했지만 기실 그 배는 이미 나룻배가 아니라 발동선이었다. 배의 맨 뒤에 있는 키잡이가 모터를 조종하고 있었다. 모터는 물살을 헤집으면서 배를 앞으로 밀어냈다.

들판은 이미 누런 황금빛이었다. ‘황금들판’이라는 표현이 반드시 진부하지만은 않겠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하회로 가는 길목 곳곳이 ‘낙동강 살리기’ 공사가 한창이었다. 중장비 소음 속에 이리저리 파헤쳐진 모래의 속살이 섬뜩해 보였다.

▲ 하회로 가는 길에서 만난 낙동강 사업 40공구. 풍산읍 회곡 부근이다. 그러나 9년이 지난 2019년, 과연 낙동강을 살아났는가.
▲ 제40공구 공사장. 대형트럭이 끊임없이 드나들며 준설토를 쌓고 있다.
▲ 옥연정사. 중앙의 건물이 세심재, 오른쪽이 원락재다. 서애는 여기서 <징비록>을 지었다.
▲ 옥연정사 앞 모래톱. 이 모래톱은 4대강 공사가 끝나면 사라질지도 모른다.

화천서원 앞 주차장에 차를 대고 서원 뒤편으로 난 길로 부용대로 오르는 대신 나는 곧장 옥연정사(玉淵精舍)로 갔다. 부용대 아래 안온하게 자리 잡은 이 집은 서애 류성룡이 세운 정사다. 임란 후 서애는 이 집에 은거하며 난리를 회고하는 <징비록>을 지었다.

물돌이동의 모래톱, 만송정 솔숲

서당채인 세심재(洗心齋)와 서애가 기거하던 원락재(遠樂齋)가 이웃해 ‘오순도순’ 서 있다. 세심재는 물론이거니와 원락재도 작지 않은 건물이다. 그런데도 정사 안에 들어서면 마치 제집에 온 듯 편안해지는 것은 이 건물들이 자아내는 소박함 탓인 듯하다. 거기 사는 사람들의 온기도 한몫한다. 낮은 뜰, 낮은 마루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두런대는 목소리조차 그 ‘편안’을 더해준다. 

정사를 빠져나오면 언덕 아래에 백사장이 펼쳐지고 그 끝이 하회를 오가는 배를 대는 나루다. 언덕 위에 강을 향해 구부정하게 솟아 있는 노송 너머로 강과 백사장이 한눈에 들어온다. 강변의 붉은빛이 도는 모래 너머로 잔잔하게 흘러가는 강[화천(花川)]의 수면이 오후의 햇살에 반짝였다.

물은 병산을 돌아 하회를 한 바퀴 돌아 구담(九潭)으로 흘러간다. 그 물의 흐름이 ‘물돌이[하회(下回)]’다. 강 건너 하회마을 어귀로 벋은 진입로의 은행나무가 노랗다. 그 너머 다랑논에도 벼가 누렇게 익었다. 저 구불구불한 들길로 곧장 가서 산을 넘으면 병산에 닿는다.

오른편 백사장 너머 울울창창한 솔숲이 만송정(萬松亭)이다. 서애의 형 겸암 류운룡(1539~1601)이 부용대의 기를 누르고 바람과 모래를 막고자 만든 일종의 비보림(裨補林)으로 천연기념물 제473호다. 숲은 하얗게 빛나는 강물에 제 그림자를 무연히 담그고 있다.

마을을 휘감아 흐르는 강물과 하얀 모래톱, 깎아지른 벼랑 부용대가 어우러져 빚는 풍경은 예사롭지 않다. 그러나 이 물돌이동 주변의 모래톱과 만송정 숲은 유실, 훼손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여론에 떠밀려 하회보 건설은 무산되었지만, 그 하류에 구담보가 건설 중이기 때문이다.

▲ 만송정 솔숲. 4대강 사업이 끝나면 이 숲과 아래 모래밭도 훼손될 가능성이 크다.
▲ 하회와 옥연정사로 오가는 나룻배. 지금은 모터를 달아 운행한다.
▲ 부용대는 하회마을 건너편 화산의 소나무 숲 아래 선 해발 64m의 절벽이다.
▲ 부용대 아래에서 겸암정사로 가는 낭떠러지 길.
▲ 겸암정사. 겸암 류운룡이 후학을 가르치던 곳이다. 스승 퇴계가 현판을 썼다.

강 건너 나루에서 배가 출발한다. 주말인데도 배에 오른 이는 그리 많지 않다. 배는 대각선을 그으며 이편 강가로 다가온다. 배가 갈라놓은 물살이 만송정 그림자를 짓이기고 커다란 파문을 만들어낸다. 그 파문은 이 한적한 낙동강 상류에 조만간 들이닥칠 불안한 변화를 닮았다. 

겸암정사 가는 벼랑길

부용대 벼랑에 난 좁은 길로 접어든다. 아래는 깎아지른 절벽, 한 뼘의 여유도 없는 가파른 길은 그 아래 시퍼렇게 흐르는 강물 위로 현기증을 일으킨다. 아우 서애를 대신해 종가를 지킨 겸암이 겸암정사를 오가며 걷던 길이다. 5분쯤 오르자, 부용대 꼭대기에서 겸암정사로 내려가는 산길을 만난다. 

아우 서애의 옥연정사가 나루 앞에 널찍한 자리에 터 잡은 것과 달리 겸암의 정사는 벼랑 위 비좁은 터에 옹색하게 들어앉아 있다. 그러나 겸암정사는 아우의 정사보다 20여 년 앞서 지어졌다. 그러나 장소 탓인가, 겸암정사는 찾는 이가 그리 많지 않아 늘 적요 속에 묻혀 있다.

역사는 늘 승자의 편이고, 삶도 마찬가지다. 항렬과 가족의 위계 따위와는 상관없이 힘의 균형은 부와 권력(벼슬)의 크기에 비례해 기울어진다. 형제였지만 영의정을 지낸 아우에 가려 하회에서도 겸암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는 것이다.

겸암이 이 정사를 지은 것은 스물여섯 살 때. 나룻배로만이 마을과 이어지는, 이 외진 정사에서 겸암은 글을 읽었고, 일곱 해가 지나서야 벼슬길에 나서게 된다. 아우 서애가 출사한 후 무려 9년 후였으니 입신의 순서부터 형제는 달랐던 셈이다.

정사의 누마루에 오르니 난간 너머 댓잎이 푸르다. 나뭇가지 사이로 화천의 하얀 모래톱과 만송정 숲이 아련하게 멀어 보인다. 벼랑에 바투 지은 집이어서 막상 겸암정사를 렌즈에 담는 게 쉽지 않다. 사진 몇 장을 갈무리하고 다시 부용대로 가는 산길을 오른다. 

▲ 부용대에서 굽어본 화천(花川). 사람들을 싣고 나룻배가 강심을 가로지르고 있다.
▲ 만송정 숲과 모래톱. 하회십육경의 하나인 ‘송림제설’과 ‘평사하안’의 무대지만 앞날을 예측할 수 없다.
▲ 부용대에 왔다가 하회마을로 돌아가는 나룻배. 강물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흐른다.
▲ 초가지붕의 부드러운 선과 양감, 흙벽의 안온한 빛깔은 와가의 무거운 느낌을 덮고도 남는다.

부용대는 하회마을과 마주 보는 벼랑이다. 과거, 음력 7월 보름이면 이 대 아래서 시회와 함께 유명한 선유(船遊) 줄불놀이가 벌어졌다고 한다. 이 강상류화(江上流花)의 놀이는 하회별신굿과 함께 이 고장의 오랜 민간전승 놀이다.

하회에서 볼 수 없는 ‘하회(河回, 물돌이)’를 부용대 정상에서는 제대로 볼 수 있다. 동남쪽의 병산 앞에서부터 남쪽 산 밑을 지나 서쪽으로 흘러온 물굽이는 부용대 앞을 지나 동쪽 면에 부딪혀 돌아서 흘러간다. 그 유장한 흐름만큼이나 하회마을의 역사도 유구하다.

부용대에서 굽어오는 하회마을은 늘 넉넉해 보인다. 그런데 그 넉넉함은 즐비한 반가의 기와집이 아니라 반가를 둘러싸고 마을 가녘의 민가에서 나온다. 색 바랜 초가지붕의 부드러운 선과 양감, 흙벽의 안온한 빛깔은 이웃한, 각진 와가의 검은 실루엣이 주는 무겁고 음습한 느낌을 너끈히 덮어버리는 것이다.

부용대에서 망원렌즈로 당겨본 화천의 빛깔은 좀 다르다. 나루 위 벼랑길에서 바라본 수면보다 훨씬 그윽하고 깊어 보이는 것이다. 배에 오른 선객들의 모습도 분명하게 조망할 수 있다. 선객들은 고물에서 키를 잡은 이와 이물에 앉아 균형을 잡는 이 가운데서 오도카니 앉아 있다.

사라질 위기에 처한 세계문화유산

강 이편에 닿아 사람들을 내리고 배는 다시 마을로 되돌아가는 이들을 태우고 오던 뱃길을 되짚어간다. 빨갛고 파란 원색의 옷을 입은 사람들과 그들이 펼쳐 든 빨간 양산이 화천의 그윽한 물빛 위에서 곱고 화려하다. 어느새 해는 한 뼘쯤 더 떨어졌다.

만송정 그늘에서 쉬고 있는 관광객들도 한눈에 들어온다. 하회에 눈이 내려 만송정 숲이 소나무의 푸른빛과 눈의 은빛으로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풍경을 일러 ‘송림제설(松林霽雪)이라 했다. ‘하회십육경’ 가운데 제5경이다. 겨울이면 만송정 앞 모래밭에 내려앉은 기러기를 만날 수 있다. 제16경 ‘평사하안(平沙下雁)’이다.

그러나 자칫하면 만송정 솔숲과 그 숲 아래 드넓은 모래톱으로 이루어진 하회십육경 두 경치는 사라질지도 모른다. 하회 하류 4.5㎞ 지점에 건설되고 있는 구담보가 하회마을의 수위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어 물이 정체될 수 있고 이 경우 백사장에 개흙이 쌓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회가 세상에 알려온 ‘물돌이동’의 명성도 위태로워졌다.

현재의 계획으로도 하회마을의 수로 쪽은 일부 준설하고 강변 양쪽으로 자전거 도로가 건설될 예정이라니 사람들이 기리는 하회의 아름다운 경관은 옛일이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고도 사라질 위기에 처해있는 역설적 상황’이 된 것이다.

▲ 옥연정사 간죽문에 붙은 서애의 시 편액.

부용대 기슭의 옥연정사 대문은 ‘대숲을 바라보는 문’, 간죽문(看竹門)이다. 대문을 나서면 강 건너 하회를 바라보며 대숲이 앞을 막고 있다. 간죽문 안쪽에 서애의 시 ‘간죽문’ 편액이 붙어 있다. 서애가 노래한 화천의 모습은 이제 간죽문의 현판에만 남게 될까. 이후 물돌이동 주변에 들이닥칠 변화를 우울하게 그리면서 나는 하산길에 올랐다.

봄 되어 강 위엔 가랑비 내리고      細雨春江上(세우춘강상) 
앞산도 아슴푸레 저무는구나.        前山淡將夕(전산담장석)  
마음에 그리는 사람은 볼 길 없고   不見意中人(불견의중인) 
매화만 홀로 피었다 지고 있네.      梅花自開落(매화자개락) 

 


2010. 10. 30.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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