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 체험활동에 묻어 간 부석사
부석사를 다녀왔다. 근 4년 만이다. 예천에 살 때는 일 년에도 서너 차례 넘게 다니던 곳이다. 멀리서 온 벗이나 친지, 제자들의 길라잡이가 되어서였다. 안동으로 옮아오고 나서는 발길이 뜸해졌다. 바쁘게 산 탓일까. 마지막으로 다녀온 게 2007년 5월이었다.
아이들 ‘체험활동’에 묻어간 부석사
10월 마지막 토요일(10월 29일) 1학년 아이들의 체험활동이 부석사와 소수서원 일원에서 펼쳐졌다. 1학년을 전담하고 있던 나는 이 활동에 무임승차(?)했다. 10월도 깊었겠다, 나는 부석사의 가을을 좀 진국으로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8시께 출발한 전세버스는 9시가 조금 넘어 부석사 주차장에 닿았다. 차에서 내리는데 아뿔싸, 빗방울이 듣기 시작했다. 오후에나 비 소식이 있겠다던 일기예보는 보기 좋게 빗나간 것이다. 그러나 사복으로 멋을 낸 아이들은 심드렁한 척 얌전을 빼고 있었지만, 은근히 이 빗속 여행을 즐기는 듯했다.
나는 이 체험활동의 안내서를 만들어 주었다. 지지난번 학교에서 만든 같은 내용의 안내서에다 날짜와 학교만 바꾸는 것으로 A5 4면 규격의 유인물이 만들어졌다. 나는 아이들이 뚜렷한 동기를 가지고 이 산사를 답사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역시 그것은 내 바람에 지나지 않았던 것 같다.
아이들을 모아 가르쳐 가면서 하는 답사는 이제 옛날이야기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자란 아이들은 끼리끼리 모여서 자기들 방식으로 구경을 하거나 논다. 고리타분한 해설 따위에 목을 매는 아이는 없다. 동행한 역사 교사의 흥미로운 해설을 듣는 이는 불과 열 명 안팎이다. 오히려 주변을 지나던 일반 답사객들이 더 진지하게 거기 귀를 기울였다.
요즘 아이들은 걷는 것도 싫어한다. 이름난 산사나 사적지를 골라서 데려가도 심드렁하기만 하다. 아이들은 끊임없이 군것질해 대거나 옷맵시로 멋을 내는 데 마음을 뺏길 뿐, 정작 목적지에 닿아도 차에서 잘 내리려고도 하지 않는다. 유홍준의 책을 끼고 답사의 정석을 배워가는 사람들에 감히 비길 수 없다.
안타까움으로 아이들에게 사전 지도를 하곤 하지만, 그것도 들을 때뿐이다. 아이들을 나무라다가도 문득 자신도 그런 시절을 지났다는 생각을 아니 할 수 없다. 우리의 학창 시절도 마찬가지가 아니었던가. 초등학교 때의 기억은 말할 것도 없고 중고교 때의 기억도 모호하기만 하다. 그뿐인가, 대학 때도, 사회에 나와서의 기억도 다르지 않다.
그 기억은 ‘언제 어디를 간 적이 있다’는 기본적 사실관계에 그친다. 거기서 만났던 유물과 풍경의 기억 따위는 한 오라기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런 뜻에서 유홍준의 답사기 시리즈가 사람들에게 미친 영향은 엄청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한 바퀴 ‘돌아보기’ 식의 답사에서 유적과 풍경이 지닌 의미를 배우며 그것을 꼼꼼히 되새기는 새로운 답사 문화를 익히기 시작한 것이다.
왜 아이들과 우리 젊은 시절의 기억들은 그렇게 비어만 있을까. 외부의 사물을 받아들이기엔 내면의 열망이 너무 큰 시절이었기 때문일까. 그 시기는 모든 관심과 지향이 자신에게 쏠려 있는 시대다. 내가 마주한 세계를 느긋하게 바라볼 만한 여유도 관심도 없던 시절이라는 이야기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서 비로소 나와 마주 선 ‘객관적 세계’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자신을 배제하고 세계를 바라볼 수 있게 되면서 관계를 이해하고 자연과 풍경의 일부로서 자신을 돌아다보게 된다. 이르든 늦든 사람들은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성장해 가는 것이다.
아이들은 이 절집이 부석사여서가 아니라, 그냥 목적지이기 때문에 무심하게 무리 지어 재잘거리면서 산사로 오른다. 유홍준이 그의 ‘답사기’에서 극찬한 그 과수원 옆 은행나무길이다. 올 은행나무 단풍은 유난히 곱다. 잎이 지기 시작하는 은행나무 가로수 길을 아이들은 우산을 받고 어깨동무를 하고 오른다.
범종루가 ‘옆’으로 앉고 지붕 모양이 다른 까닭
수업시간에 교재에 나왔던 부석사 당간지주를 아이들은 힐끗 일별하고 지나친다. 아이들을 붙들고 몇 마디 일러줄까 하다가 내처 아이들을 뒤따른다. 천왕문을 지나자 ‘회전문’ 공사가 한창이어서 오른쪽으로 우회해야 한다. 웬 회전문? 그러나 주변에는 관련 안내판 하나도 없다.
해우소를 지나자 막아서는 만만찮은 규모의 누각이 범종루다. 그런데 사람들은 무심코 지나고 말지만, 이 누각은 정면이 아닌 측면으로 앉아 있다. 게다가 양쪽 지붕의 구조가 다르다. 아래쪽은 팔작지붕이지만 위쪽은 맞배지붕이다. 무량수전 앞에서 바라보면 왜 그런 배치와 지붕 구조를 한 것인지가 깨달아진다.
무량수전 앞에 날아갈 듯 배치된 누각이 안양루(安養樓)다. 그 아래가 범종루인데 이 누각이 정면으로 앉아 있으면 무량수전에서의 조망을 막아버려서 답답하다. 그래서 이 누각을 옆으로 앉히고, 맞배지붕으로 가운데를 터서 조망을 틔워주는 것이다. 선인들의 지혜란 이렇듯 현대인의 지적 능력을 뛰어넘는 것이다.
무량수전 앞마당은 아이들과 분주하고 오가는 관람객들로 마치 소란스러운 장터 같다. 여남은 명의 아이들은 역사 교사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고 있고 나머지 아이들은 심드렁한 얼굴로 이리저리 경내를 배회하고 있다. 아이들은 저희끼리 사진을 찍거나 안내판을 읽으며 마지못해 이 절집을 ‘자습’하고 있다.
나는 그런 아이들과 절집의 여러 풍경을 사진기에 담았다. 무량수전 동쪽 언덕 위에 선 삼층석탑(보물 제249호) 앞에서 부석사 일원과 산 아래 소백산 자락을 내려다보는 기분은 남다르다. ‘부석사는 가장 아름답고 너른 정원을 가진 사찰’이라는 유홍준의 지적에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기억 속의 부석사’는 어떻게 남을까
탑은 원래 법당 앞에 세우는 게 통례다. 그러나 이 돌탑은 법당의 동쪽 언덕에서 법당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다. 부석사 창건 시에 세워진 돌탑은 온전한 모습은 아니다. 지붕돌 모서리는 떨어지고 상륜부는 노반과 복발만이 남아 있다. 그 세월의 흔적 때문에 돌탑의 침묵은 더욱 깊어 보인다.
비는 그치는 듯하다가 다시 내린다. 아이들 사진을 찍어주고, ‘배흘림기둥’ 이야기를 잠깐 해 주고 하산길에 오른다. 안양루 기둥 사이로 울긋불긋 물든 소백산 자락의 단풍이 곱다. 범종루의 법고와 목어, 운판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소백산 실루엣이 아련했다.
내려오는 길의 단풍은 또 다른 느낌이다. 아이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절을 내려오면서 어땠느냐고 묻는다. 아이들은 마땅한 답을 찾지 못해 안타까운 얼굴이다.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아이들은 훗날, 고교 1학년 때 들른 부석사를 전혀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아이들이 ‘객관적 세계’로서 풍경과 유적을 이해하게 되는 날은 언제쯤일까. 자연과 풍경의 일부로서 자신을 돌아다보게 되는 날, 비 내리는 주말의 부석사를 어떻게 다시 불러낼 수 있을까. 나는 잠깐 아득해졌다.
매표소에서 나는 ‘회전문’에 대해서 물었지만, 거기 근무자도 ‘복원’이라는 것 외엔 아는 게 없었다. 나는 윤장대처럼 ‘돌아가는[회전(回轉)]’하는 문인가 싶었지만 돌아와서야 그게 ‘생의 윤회(輪回)’라는 뜻이라는 걸 알았다. 강원도 청평사에도 사찰의 중문인 회전문이 있다고 했다.
소수서원을 거쳐 안동으로 돌아온 것은 오후 1시가 겨워서였다. 아이들에겐 그렇고 그런 짧은 주말여행이었을지 모르지만 내게는 쏠쏠한 답사 여행이었다. 그야말로 가을의 ‘진국’을 제대로 맛본. 찍은 사진을 불러내어 놓고 나는 시방 지난 10월의 마지막 주말을 천천히 복기하고 있다.
2011. 11. 9.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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