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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안동 이야기

안동 ‘강남’의 정자들, 450년 전 원이엄마의 편지

by 낮달2018 2019. 10.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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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정자 기행 ③] 안동시 정상동의 귀래정··반구정·어은정

▲ 귀래정 전경. 앞으로 도로가 나 있어 대문을 뒷면에 내었다.
▲ 귀래정 앞쪽. 대청 쪽은 문으로 닫혀 있다.

귀래정(歸來亭)은 이굉(李굉, 흙 토 변에 팔뚝 굉厷 잔데 아래아 한글에는 이 글자가 없다.)이 반변천과 낙동강이 만나는 경승지에 지은 정자다. 낙포 이굉은 고성이씨 안동 입향조인 증(增)의 둘째 아들이다. 동생인 명은 군자정을 지었다. ‘귀래정’이란 이름은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취한 것이다. [관련 글 : 군자정은 그의 삶과 함께 기억된다]

 

<택리지>에서 안동에서 으뜸으로 친 귀래정

 

같은 이름의 정자가 경북 영천과 전북 순창에도 있다. 영천의 귀래정은 조선조 말의 문신 현찬봉(1861~1918)의 우거(寓居)를 다시 세운 것이고, 순창의 그것은 신숙주의 아우 신말주(1429~1503)가 불사이군의 절의를 지키면서 은둔생활을 하던 곳이라 한다.

 

지금 귀래정은 안동에서 ‘강남’으로 부르는 정상동에 있다. 새로 지은 영가대교를 건너면 만나는 사거리에서 왼쪽 모퉁이에 외따로 자리를 잡았다. 이 동네의 이름이 정상동(亭上洞)인 것은 이 정자와 인근에 있는 반구정(伴驅亭)을 기준으로 구분한 것이다. 오른편에 있는 법원과 검찰 지청 쪽이 정하동(亭下洞)이다.

 

지금은 사거리 한 귀퉁이에 서 있는 고택에 불과하지만, 옛 귀래정은 빼어난 경관을 자랑했던 모양이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안동의 정자 중 임청각 군자정, 하회의 옥연정과 함께 귀래정을 으뜸으로 꼽았다. 그러나 안동에 개발 바람이 불면서 정자 앞에 제방 도로가 생기고 주변의 낮은 산들이 택지로 바뀌면서 귀래정의 아름다움은 예전 같지 않다.

▲ 도로 쪽에서 바라본 귀래정. 담 밖의 은행나무는 원래 안쪽에 있었다.

귀래정은 앞면과 옆면 각각 2칸의 대청을 만들고, 그 뒤에 방 4개를 나란히 두어 ‘T’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대청은 4칸의 통마룬데 내부에는 고산 황기로(1521~1567)가 쓴 ‘귀래정’ 편액과 함께 주인인 낙포 이굉(1440~1516)을 비롯하여 농암 이현보(1467~1555), 송재 이우(1469~1517), 택당 이식(1584~1647), 백사 윤훤(1573~1627) 선생 등 30여 명의 시판이 걸려 있다. [관련 글 : 해동초성이 시서(詩書)를 즐기던 매와 학의 정자]

▲ 귀래정 현판. 고산 황기로의 글씨다.

정자라고 하면 사방이 탁 트인 누마루 형식의 건물만 생각하는 이들에게 귀래정이 정자라고 설명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귀래정은 강을 바라보고 앉은 정자인데 제방 도로가 열리면서 도로 쪽은 담으로 막아 놓았다.

 

자연, 대문은 정자 뒤쪽에 있어 이곳을 찾는 이들은 방 네 개가 가지런히 선 뒷면부터 만나게 된다. 한 바퀴 돌아야 앞면인데, 정작 대청 쪽은 모두 문을 닫아 놓았으니, 좀 이상한 형태의 살림집처럼 보일 수도 있는 까닭이다.

 

귀래정, 반구정, 어은정 등 고성이씨가 남긴 정자들

 

귀래정은 흙 돌담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정자 뒤쪽과 왼편 담에는 사주문(四柱門)을 내었다. 예전에는 담 안에 있던, 정자와 역사를 함께 한 수령 약 480년의 은행나무는 지금은 도로변에 나와 있다. 은행나무 위로 전선인지 전화선인지 무려 10가닥의 줄이 걸려 있다. 명승을 다니며 사진을 찍을 때마다 느끼는 것은 하늘에 걸린 줄이 너무 많다는 것인데 여기도 예외는 아니다.

▲ 귀래정 대청. 귀래정 편액 외에도 30 여 명의 시판이 걸려 있다.

도연명의 “귀거래사”에서 땄다고 하지만, 귀래정을 지은 낙포(洛浦) 이굉은 부친 증(增)과 마찬가지로 자연으로 ‘귀거래’한 이다. 25세에 진사, 40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지평, 상주 목사, 개성 유수 등을 지내다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귀양을 가기도 했던 낙포는 중종 8년(1513) 벼슬에서 물러나 안동으로 퇴거해 이 정자를 지었다.

 

피가 남달랐는가. 그의 동생인 임청각 이명은 아들, 손자에 이르는 삼대가 벼슬을 버리고 낙동강 변에 은거했다. 이명은 군자정을 지었고, 그의 아들 반구옹 이굉(낙포와 반구옹은 숙질간인데 이름의 음이 같으나 글자가 다르다.)은 반구정을, 손자인 어은(漁隱) 이용은 귀래정 인근에 어은정을 지었다.

 

벼슬에서 물러나 마음먹은 대로 정자를 짓고 자연을 벗하며 산다는 것은 일정한 사회경제적 조건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안동 고성이씨 일문의 재력도 만만찮았던 듯하다. 임청각 이명이 다섯째 아들 이고의 분가 때 지어준 정자가 안동 소호헌(蘇湖軒)인데, 이 건물은 이고가 외동딸과 혼인한 서해에게 물려줌으로써 지금은 대구서씨 문중 소유이다.

 

이명은 여섯째 아들 이굉에게 임청각을 물려주었는데, 이굉은 호가 반구옹(伴鷗翁)으로, 사마시에 합격하고 임용되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향리로 돌아와 1530년(중종 25)경 이 정자를 짓고 학문과 자연을 즐겼다고 한다.

▲ 반구정 재사 전경. 이명의 아들 이굉이 지은 정자다.
▲ 반구정. 왼편에 '고성이씨 삼세유허비'가 있다.
▲ 어은정. 반구옹 이굉의 아들 이용이 지은 정자다. 정자에는 명호서원 현판이 걸려 있다.

반구옹 이굉이 지은 반구정 재사(伴驅亭齋舍)도 부근에 있다. 이증의 신도비 옆의 배추밭 저 너머에 안온하게 들어앉은 반구정 재사는 모두 세 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원래의 건물은 1945년 화재로 잃었고, 지금 있는 정자는 이듬해 중건한 것이다.

 

처음 지은 연대는 1530년대 초기로 추정한다. 당시 안동 유림이 여기서 자주 시회와 향회(鄕會)를 열어 선비의 출입과 숙식이 잦았다 한다. 이에 동·서재를 비롯하여 장판각과 주사(廚舍)까지 중축하게 되면서 강학 공간에 버금가는 시설을 갖추게 된 것이다.

 

따로 들어 사는 이가 없으니 정자는 퇴락해 있다. 쓸쓸한 마당에 내리는 늦가을의 햇살이 애잔했다. 대문간을 들어서면 왼편에 ‘고성이씨 삼세유허비(固城李氏三世遺墟碑)’가 세워져 있다. 이굉의 아들 이용(李容) 역시 벼슬을 버리고 여기 은거하니, 고성이씨 3세가 모두 벼슬을 버리고 은둔한 곳이 되었다 하여 이를 기리는 비다.

 

반구정과 귀래정 중간쯤에 어은정(漁隱亭)이 있다. 퇴계의 문하였던 어은(漁隱) 이용이 1570년에 지은 정자다. 앞면 세 칸, 옆면 두 칸의 팔작집은 원래 와룡면 도곡리에 있었으나 안동댐 건설로 이리로 옮겨온 것이다. 정자에는 ‘명호서원’의 현판이 걸려 있다.

▲ 원이엄마 상. 450년 전 애절한 연서를 남편에게 전한 여인은 21세기에 환생했다.

정상동 기슭 무덤에서 발굴된 한 통의 편지

 

정상동 일원은 귀래정과 반구정 외에 한 무덤에서 발견된 ‘한 통의 연서’로 그 이름을 온 나라에 알렸다. 1998년 정상동 기슭에서 이루어진 이장 작업 중 고성이씨 가문 이응태(李應台,1556~1586)의 무덤에서 그 부인의 애절한 사랑의 편지가 발견된 것이다.

▲ 정상동 기슭의 한 무덤에서 발견된 이응태의 처가 남긴 편지. 남편을 '자내'로 부르고 있다.

서른한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이응태에게 남긴 아내의 편지는 애절한 사랑으로 그득하다.

 

당신을 여의고는 아무리 해도 나는 살 수가 없어요. 빨리 당신께 가고 싶어요. 어서 나를 데려가 주세요. 당신의 향한 마음을 이승에서 잊을 수가 없고 서러운 뜻 한이 없습니다. 내 마음 어디에 두고 자식 데리고 당신을 그리워하며 살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편지 전문은 아래에 있음.>

 

함께 묻힌 시와 몇 통의 편지로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밝혀졌지만, 그 아내의 신원에 대한 실마리는 없다. 편지 속에 나타난 ‘원이’의 어머니로만 부를 뿐이다. 남편의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 아내가 쓴 이 편지는 망자와 함께 어두운 무덤 속에 잠들어 있다 무려 415년 만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망자의 머리맡에서 나온 유물은 또 한 번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한지 속에 담긴 것은 미투리였고 그것은 아내의 머리카락으로 삼은 것이었던 게다.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자기가 입은 은혜는 잊지 않고 꼭 갚겠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머리털을 베어 신발을 삼는다.”는 속담이 있다는 건 널려 알려진 일이다. 그러나 정말 머리털로 미투리를 삼았다?

 

그 까닭은 미투리를 싼 한지에서 밝혀졌다. 아내는 편지를 쓸 당시 병석에 있던 남편이 다시 건강해져 신을 신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머리를 풀어 미투리를 삼았고 보살핌도 헛되이 남편이 숨지자 그 미투리를 남편과 함께 묻은 것이었다.

 

지금 유물들은 안동대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는데 그 여자의 사랑을 기리는 ‘아가페상’이 인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원 앞에 세워져 있다. 미투리를 보듬고 선 여인상이다. 웬 아가페? 뜬금없는 이름을 붙인 것은 이 밀레니엄 시대의 느끼한 사유법인 모양이다.

▲ 귀래정 앞에서 바라본 안동 시내 풍경. 앞은 낙동강. 건너편 산이 영남산이다 .

귀래정 주변 도로에 일렬로 늘어선 벚나무 가로수에 단풍이 붉게 타고 있다. 단풍든 나뭇잎 너머로 바닥을 드러내 보이는 강과 건너편 군자정이 깃든 영남산에도 가을빛이 완연하다. 새로 지은 영가대교를 쏜살같이 건너오면서 나는 천천히 저 ‘중세의 시간’에서 벗어났다.

 

2008. 11. 18.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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