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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안동 이야기

의성 등운산 고운사(孤雲寺)의 가을 본색

by 낮달2018 2019. 1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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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의성 등운산 고운사에 당도한 진국의 가을

▲ 고운사 경내. 여기 서린 적막은 절집의 미덕 중의 하나다.

집을 나설 때의 생각은 소호헌을 둘러 서산서원을 둘러오는 것이었다. 시간이 나면 고운사에 들르든지 말든지…, 하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정작 소호헌은 잠시 들렀고, 서산서원으로 가지 않고 반대쪽 길인 고운사로 곧장 가 버린 것이다.

 

보물 제475호 소호헌(蘇湖軒)은 안동시 일직면 망호리에 있는 조선 중기의 별당 건축물이다. 본래 안동 법흥동 임청각의 이명이 다섯째 아들 이고의 분가 때 지어준 것이나 이고가 외동딸과 혼인한 중종 때의 학자 서해에게 물려준 집이다.

 

망호리는 목은 이색의 후예인 한산 이씨 일족이 세거하고 있는 마을이다. ‘소퇴계(小退溪)’라고 불리는 영조 대의 대학자 대산 이상정(1711~1781)도 여기서 태어났다. 인근의 서산서원은 목은 이색을 배향한 곳이니 이 마을엔 정작 소호헌보다 한산 이씨 일문의 역사가 더 짙게 어린 셈이다.

▲ 소호헌 앞 수령 550년의 은행나무

소호헌은 팔작지붕의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몸채에, 대청 뒤로 온돌방 2칸을 돌출시킨 정자(丁字)형의 독특한 건물이다. 굳게 문이 잠긴 소호헌의 담장을 빙 돌며 사진 몇 장을 찍고 우리는 망호리를 떠났다. 소호헌도 다시 찾아야겠지만, 대산 이상정과 목은 이색의 흔적을 찾는 일은 따로 날을 잡아야 할 듯해서였다.

▲ 소호헌(보물 제475호). 조선 중기의 별당 건물이다. 안동시 일직면 망호리에 있다.
▲ 망호리의 늦가을. 하늘은 시리게 맑고.

거기서 10분, 의성군 단촌면 구계리에 등운산(騰雲山 ) 고운사(孤雲寺)가 있다. 가까워서인가, 그간 두 차례나 이 절집을 찾았고, 블로그에 그 답사기를 올렸다. 오늘은 가볍다. 절집 구경이 아니라 나는 절로 드는 긴 솔숲 길에 깃든 단풍과 거기 그윽하게 고인 가을빛을 보고 싶었다. [관련 글 : 청정 숲길로 드는 옛 가람 고운사]

▲ 젊은 부부와 어린아이 둘. 이들의 모습은 때로 우리의 과거를 돌이키게 만든다.

등운산 고운사에 내린 가을은 따스했다. 주차장에서 일주문인 조계문에 이르는 흙길 주변에 울울창창 들어선 소나무와 단풍나무 들이 연출하는 빛깔은 연한 주황빛, 그것은 잿빛으로 스산하지도, 핏빛으로 처절하지도 않은, 매우 따뜻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조계문과 일부 전각이 보수 공사에 들어가 건설 장비들이 가끔 경내를 오가는 것을 빼면 산사는 적막했다. 그것은 절집이 가진 숱한 미덕 중의 하나다. 팔짱을 끼고 바투 몸을 붙인 연인들, 어린애를 데리고 온 젊은 부부, 그리고 관광버스에서 내린 단체 관람객들이 띄엄띄엄 눈에 띄었으나 아무도 그 적막을 깨뜨리지는 않았다.

▲ 연수전. 만세문 앞에 놓인 빨간 플라스틱 그릇이 인상적이다.
▲ 만세문 앞에서 버섯과 부각용 고추를 말리고 있다.

연수전(延壽殿)은 예나 다름없이 아름다웠다. 연수전 좁은 툇마루에는 고추와 산나물이 널려 있었다. 연수전 만세문 앞마당에 펴 둔 버섯, 밀가루를 버무려 쪄 말리고 있는 부각용 고추와 함께 그것은 이 절집과 납자(衲子)들이 날 겨울 채비일 것이었다.

▲ 고불전(古佛殿). 초소형이지만 매우 단아한 전각이다.

이번 방문에서는 늘 무심코 지나쳤던 고불전(古佛殿)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고불전은 천왕문 옆의 2평도 채 되지 않는 반 아(亞)자 건물인데 작은 석불 하나와 누군가의 공덕비가 있다. 원래 이름도 없는 전각이었으나 몇 해 전 보수와 단청을 새로 하면서 오래된 석불이 있으니 ‘고불전’이라고 이름 지었다 한다.

 

워낙 작은 건물이라 고개를 숙여야 들어갈 수 있고 법당 안은 한 사람만으로도 꽉 차 버리는, 그야말로 초소형의 전각이다. 전각 좌우에 각각 세워 둔 하얀 소형 트럭과 경운기는 조그만 전각과 어울려 묘한 조화를 연출하고 있는 참이다.

 

업둥이처럼 천왕문 옆에 조신하게 서 있는 이 전각이 주는 느낌은 단아함이다. 멀찍이 물러나서 오랫동안 들여다보고 있으면 마치 장난감처럼 조합해 놓은 건물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없는 듯 거기 호젓하게 선 고불전은 ‘천지 생멸과 관계없이 항상 밝은 빛을 발하는 불성’의 표현인 ‘고불’이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은 전각이다.

▲ 내내 우리를 앞섰던 젊은 연인들. 과거의 떠올리게 하는 건 그들도 마찬가지다.

주차장에 차를 두고 걸어갔다가 다시 걸어서 나오는 건 이 절집을 들를 때의 습관이다. 차는 일주문 코앞까지 닿지만, 대체로 사람들은 차를 버리고 솔숲 길을 걷는 걸 택한다. 고운사를 찾으며 그 길을 차로 달리는 건 고운사를 반만 보는 일이라는 걸 사람들은 아는 것이다.

 

단풍을 찾아가는 길은 늘 아쉬움이 남는다.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한 주일이나 열흘쯤 뒤면 이 단풍이 절정이 될까. 그때는 저 빛깔이 더 곱고 아름다워지지 않을까. 그러나 아무도 그날을 기약하지 못한다. 마음이야 늘 뻔하지만, 그날을 만들기는 쉽지 않다. 오늘 만난 단풍이 제일이라고 믿으며 모두 다시 저잣거리로 돌아가는 까닭이 거기 있는 것이다.

 

2007. 11. 4.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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