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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안동 이야기

하회, 그 ‘낮은 사람들의 삶’도 기억하게 하라

by 낮달2018 2020. 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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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객 천만 명 돌파] 안동 ‘하회마을’을 다시 본다

▲ 하회마을 전경 . 부용대에서 내려다본 풍경이다 . ⓒ 해를 그리며

경북 북부의 소도시, 안동을 온 나라에 알리는 데 가장 크게 이바지한 곳이 하회마을이다. 요샛말로 하자면 하회는 ‘안동의 아이콘’인 셈이다. 안동이라 하면 ‘퇴계’나 ‘도산서원’을 먼저 떠올릴 법하지만, 사람들은 그리 ‘성리학적’이지 않다. 고리타분한 왕조 시대의 유학자보다야 수더분하게 이웃 마실 가듯 들를 수 있는 ‘하회’가 사람들에겐 더 친숙한 것이다.

 

이 오래된 마을을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린 것은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이다. 1999년 그의 방문 뒤에 봉정사가 생뚱맞게 입장료를 받기 시작했다는 ‘뒷담화’가 떠돌기는 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하회에 머무는 바람과 햇빛이 고즈넉한 중세의 그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한 것은 전적으로 이 할머니의 덕이라 해도 무방할 듯하다.

 

박제화한 역사이긴 하지만, ‘신라’는 경주와 그 인근 고을에, ‘백제’는 부여와 공주, 그 어름에 여전히 소슬한 바람으로 머물고 있다. 그러나 정작 한 세기 저편의 조선 시대를 사람들은 잘 기억하지 못한다. 나라님의 지엄한 영화가 머물고 간 왕궁과 그들의 능침(陵寢)이 서울과 인근에 널려 있지만, 아무도 거기에서 중세를 느끼지는 않는다. 숨 가쁜 밀레니엄 시대의 삶이 고궁의 고색창연을 압도해 버리는 까닭이다.

 

사람들은 여왕의 발길을 좇아 하회의 고샅길과 양반집을, 마을을 둘러싼 초가집을 한 바퀴 돌아본다. 벽안의 손님 뒤를 따르면서 사람들은 의도하지 않은 타자(他者)의 시선으로 낯설고 주의 깊게 하회를 응시했을지 모른다. 그리고 거기서 고풍스러운 중세의 유습을 고스란히 되밟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비로소 물돌이 마을에 서린 바람과 햇빛이 예사롭지 않은 것임을 깨달았으리라.

▲ 하회를 찾은 유치원생들이 골목을 뛰어나오고 있다 . 뒷날 이들은 하회 방문을 기억이나 할까 .

지난 8월에 하회마을을 찾은 관광객이 일천만 명을 넘겼다. 입장료를 받기 시작한 1994년 이래 14년 만이라 한다. 일천만이라면 우리나라 인구의 거의 1/5도 넘는 숫자다. 그건 단순히 하회를 밟은 사람들 수의 누적이 아니라, 하회가 안동의 아이콘으로, 혹은 아직도 옛 왕조의 기억을 재현하고 있는 마을이라는 사실의 ‘전 국민적 승인’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일천만 명이나 다녀갔다고 해서 하회가 변하는 것은 아니다. 하회는 늘 거기 있고, 마을 어귀를 드나드는 사람이 날마다 바뀌는 것일 뿐이다. 지난 10월 초순(2일)에 나는 일천만 명이나 드나든 명승으로서 하회는 어떻게 다른가, 어슬렁거리며 하회를 들여다보았다.

 

하회마을이,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안동시의 하회마을 관리사무소에서 하회마을을 새롭게 정비하고 문을 연 게 지난 6월이다. 마을 안에 군데군데 박혀 있던 가게와 식당 등을 새로 마련한 주차장과 마을 사이로 옮겨놓았다. 바로 음식점과 상가로 이루어진 ‘하회 장터’다.

 

널찍한 광장 중앙에 앉힌 시멘트 정자를 중심으로 빙 둘러선 것은 각종 식당과 기념품 가게다. 평일이어서인지 장터는 한산하고 조용하다. 아직 문을 열지 않은 집도 눈에 띈다. 매표소로 가기 위해서 장터를 반드시 거치게끔 이루어진, 이 선택의 여지가 없는 동선은 마을에서 장터로 생업을 옮겨야 했던 사람들의 영업권을 보장하기 위한 것인가.

▲ 마을 안 민박집

매표소에서 표를 산다. 지난 한 해 동안 하회마을의 수입이 7억 2천만 원이었다면 믿어지는가. 좀 전에 만났던 관리사무소장의 의견도 그랬다. 현재의 입장료 수준으로는 운신하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수입의 40%는 하회마을보존회에 지원하고 나머지가 안동시 수입이다. 입장객 천만 명 돌파가 무색해지는 대목이다. 소장이 입장료 인상 문제를 조심스럽게 꺼내는 이유도 같아 보였다.

 

매표소에서 옛 매표소가 있는 마을 어귀까지는 1Km 남짓. 안동 시내버스 회사 세 군데에서 교대로 셔틀버스를 운행한다. 왕복 요금은 어른 1천 원. 주차장에서부터 치면 세 번째로 지갑을 열어야 하는 순간이다. 하회마을 홈페이지에 오르는 불평의 핵심도 이것이다. 게다가 주차료, 입장료, 버스 요금까지 ‘합치면’ 5천 원이 넘는 것이다.

 

‘합치면’과 ‘합쳐도’ 사이에는 꽤 간극이 넓다. 나는 머리를 갸웃한다. 이름난 놀이공원은 입장료만 해도 일만 원이 넘고,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시설도 그리 많지 않지만, 사람들은 그걸 별로 불만스러워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거기 투여된 노동과 자본을 읽어버리는 탓이다.

 

그러나 멀쩡한(!) 마을을 막아두고 입장료를 받는 걸 사람들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여전히 마을과 거기 고인 삶을 ‘문화’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의 고정관념 탓이다. 하회는 마을 자체가 중요민속자료(122호)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동족 마을 하회가 값으로 매길 수 없는 문화유산이라는 걸 사람들은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상가가 말끔히 나간 마을의 모습을 기대했으나 여전히 몇 개의 가게가 문을 열고 있었다. 골목길마다 민박을 알리는 입간판도 더러 눈에 띈다. 거기 삶이 오롯이 존재하는 한, 마을을 답사객의 구미에 맞게 꾸밀 수는 없다는 걸 새삼 확인한다. 고풍스러운 마을 길에 생뚱맞게 섞여 있는 그런 광고물이나 집안의 편의시설을 굳이 나무랄 수 없는 까닭이 거기 있다.

 

오래된 마을을 찾은 ‘타관 사람’들은 대체로 그 마을에서 ‘고색창연’을 읽고 가기를 원한다. 서투르게 분칠해 놓은 고가나 정자를 보자고 먼 길을 온 게 아니니 그들의 바람을 달리 나무랄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을 위해서 마을에 ‘고색창연’을 지키라는 것은 그리 온당한 요구가 아니다. 한갓진 관광객들이야 탄성을 지르며 기념사진을 찍고, 그것을 통해 한때를 추억하고 말면 그뿐이지만, 그 터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날것 그대로의 삶이니 말이다.

▲ 이런 예스러운 골목길이 하회마을에 서린 중세의 기억을 구성하는 한 요소일지도 모른다 .
▲ 검박한 북촌댁 사랑채 앞뜰에 고인 정적에선 시간의 깊이 같은 게 느껴진다.

하회마을은 여러 번 와도 늘 관광객들은 같은 경로로만 움직인다. 북촌댁을 거쳐 삼신당을 돌아 양진당과 충효당을 보고 나면 이내 마을을 돌아 흐르는 강가다. 강둑을 따라 만송정 숲과 부용대를 건너다보면서 내처 걸으면 하회를 한 바퀴 도는 마을 나들이는 끝나는 것이다. 하회가 낯설지 않은 우리의 이동 경로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한창 보수 중인 양진당은 건축용 비계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정작 마을을 가로지르는 줄기 길 안쪽에 있는 남촌댁이나 담연재, 하동고택과 빈연정사는 지나치기 일쑤다. 문제는 그게 답사객들의 선택이 아니라는 데 있다. 사람들에게 마을 어귀의 안내판에 그려진 집들을 깡그리 머리에 넣고 마을 구경에 나서기를 요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람들이 놓치지 않고 마을의 이름난 고택을 돌아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위한 특별한 동선(動線) 계획이 필요한 이유다.

▲ 하회 별신굿 탈놀이 ⓒ 해를 그리며

하회가 풍산 류씨 등 양반들의 세거(世居)로 이루어진 마을이지만, 이 마을을 여며온 이들은 양반만이 아니다. 수백 년 동안 하회가 이름난 반촌(班村)으로서 자라온 이면에는 양반집들을 둘러싸고 있는 마을 외곽 초가의 주인인 소작인들과 타성바지 상민들이 있었다. 그들은 말할 것도 없이 “하회 별신굿 놀이”의 전승자들이었다.

 

이들은 하회에 세거해 온 풍산 류씨 가문의 경제력을 떠받치는 주요한 노동력이었고, 자신들의 노동을 통해 가문의 위엄과 그들의 안락한 생활을 보장해 주었다. 이들 피지배 민중들은 비록 양반의 지원을 받기는 했지만, 하회 별신굿 놀이라는 걸출한 민중 연희를 창안·전승해 왔다. 또 그들은 그 탈춤 속에 양반·선비·승려들에 대한 신랄한 야유와 풍자로 그들 삶에 똬리 튼 한과 슬픔을 녹여내기도 했다.

 

하회에는 국보가 두 개 있다. 하나는 하회를 상징하는 정치가 서애 류성룡의 문집인 ‘징비록’이고 나머지 하나는 ‘하회탈과 병신탈’이다. 이 두 가지 국보는 하회가 이룬 문화와 역사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표지들이다.

 

마을 안에 전적과 고택 등 국보 1점, 보물 4점, 중요민속자료 10점을 남긴 양반들과는 달리 무지렁이 민중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문화재 하나만을 남겼다. 그게 중요무형문화재 69호 하회별신굿탈놀이다.

 

그러나 이 피지배계급의 백성들이 살았던 삶의 흔적은 어디에도 내보이지 않고 있다. 113동의 기와집에는 미치지 않지만, 하회에는 초가 84동이 전한다. (2000년 통계) 그러나 아무도 그 초가를 주목하는 이들은 없다. 당연히 거기 희미하게 남은 그들 삶의 자취도 덧없기만 할 뿐이다.

 

그것은 하회가 ‘민속 마을’이되 그게 ‘양반들의 민속’에 그치는 이유다. 사람들은 마을에 들러 내로라하는 명문가 후손들의 삶의 모습을 멀찍이서 기웃대다 돌아가곤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마을 가녘에 쏠린 초가집들은 마치 날아갈 듯한 고택들을 위한 들러리처럼 맥없고 쓸쓸해 보인다.

 

과문한 탓에 나는 이러한 문제 제기가 얼마만큼 실현 가능한 것인지, 합리적인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시방도 남아 있는 초가가 얼마만 한 민속학적 가치가 있는지, 그리고 거기 살았던 이들의 삶을 어떤 형식으로 보여줄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대안을 갖고 있지는 않다.

▲ 덩그렇고 이름난 양반집에 가린 하회의 '민가'

그러나 하회가 온전한 민속 마을이 되기 위해서는 반상과 지배·피지배계급을 모두 아울러야 마땅하리라고 생각한다. 하회마을이 하회별신굿의 주인이었던 민중들과 그들의 삶을 기억하는 일은 하회에 머문 ‘중세의 기억’, 그 일부이기 때문이다.

 

안동을 찾은 지인이 있으면 그들과 늘 함께 밟는 하회 부근의 안동 답사 코스가 있다. 쓸 수 있는 시간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경로다. 먼저 화천서원을 거쳐 부용대에 오른다. 산에서는 산을 볼 수 없다. 부용대에서의 하회 조망은 운치도 운치려니와 하회를 바라보는 인식의 지평을 넓혀주는 까닭이다.

 

그다음은 병산서원이다. 못다 나눈 회포를 푸는 데는 만대루가 제격이다. 사람들의 발길로 반질반질 윤이 나는 누마루에 앉으면 역시 거기 고인 중세의 기억도 아스라하다. 하회는 맨 나중에 찾는다.

 

주변의 풍광을 두루 구경하고 난 뒤에 비로소 공들여 하회의 속내를 살피는 것, 그게 바른 순서라고 생각하는 까닭이다. 하회를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이런 답사 모형을 만들어내는 것도 하회가 풀어야 할 과제의 하나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언뜻 해 본다.

 

10월은 해가 짧다. 6시가 가까워지면서 이내 날이 어둑해졌다. 안동시에서는 주차장에서 마을 어귀로 가는, 길을 따라 흐르는 낮은 산에 ‘강섶 오솔길’을 복원한다고 한다. 내년 봄이면 사람들은 셔틀버스 대신 오솔길을 따라 하회에 들거나 날 수 있겠다. 좋다. 하회에 머무는 옛 시대의 기억을 찾는 길은 셔틀버스보다는 오솔길이 훨씬 더 어울리는 일일 터이니 말이다.

 

 

2008. 10. 23. 낮달

 

 

 

하회, 그 '낮은 사람들의 삶'도 기억하게 하라

[관광객 천만 명 돌파] 안동 '하회마을'을 다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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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사랑방 <안동>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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