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안동 학가산(鶴駕山) 광흥사(廣興寺) 이야기
경북 안동의 진산(鎭山)에 대한 설은 분분해서 어느 것을 믿을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안동서 가장 높은 산이 학가산(870m)이라는 건 이설의 여지가 없다. 이 산에 ‘학 수레’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치마폭처럼 넓은 산자락과 머리에 바위를 인 산세가 ‘사람이 학을 타고 노니는 모양’이어서다.
“학가산에는 임금이 머물러 대궐과 육조 터가 남아 있는 2개의 산성 터가 있다. 또 산의 동쪽에는 능인 대덕이 살았다는 능인굴이 있으며, 산허리에는 거찰과 작은 암자들이 둘러 있다.”
이는 안동부의 읍지(邑志)인 <영가지(永嘉誌)>에 담긴 기록이다.
불교 문화가 융성할 때에는 안동에는 150여 개의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중 가장 많은 절집이 깃든 곳이 학가산이다. 그리고 광흥사는 그 산의 중심에 있는 절이다. 이 절집이 깃든 곳은 산의 남쪽으로 주위의 지형이 학의 머리와 날개 모양인데 학이 공중으로 솟아오르려는 순간처럼 날개를 펴고 있는 모양에 해당하므로 ‘넓게 일어난다’는 뜻에서 '광흥사(廣興寺)'란 이름을 얻었다.
광흥사는 의상이 치악산 구룡사를 세운 직후인 669년(문무왕 9)에 창건한 절이다. 그 뒤 수차례 중수·중창하여 대찰이 되었으나 종교 탄압과 관리 소홀로 일제 말기에는 거의 폐사 상태에 이르렀다. 게다가 이 절집에는 무려 세 번에 걸쳐 화마가 스쳐 갔다. 1946년의 큰불로는 대웅전이, 1954년과 1962년에도 화재로 극락전·학서루 등이 무너졌다. 지금 남은 전각은 응진전 등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새로 세운 것이다.
절집의 쇠락은 그 절이 품고 있던 보물급 문화재조차 온전히 지니지 못하게 한다. 광흥사에 남아 있던 고려시대 불경인 <취지금니묘법연화경>(청색 종이에 금색 글씨로 쓴 법화경, 보물 제314호)과 <백지묵서묘법연화경>(하얀 닥종이에 먹으로 쓴 법화경, 보물 제315호) 등 중요 문화재들은 국립 경주박물관으로 옮겨갔다.
이처럼 쇠락한 절집 광흥사가 한 해 전부터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이 절에서 현존하는 세계 최고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1378)>보다 발간 연대가 앞서는 고려시대 금속활자본이 나왔다는 주장 때문이다. <한겨레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이 곡절의 연원은 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9년 9월 광흥사 경내에 강도가 들어 응진전에 봉안한 석가 삼존불상, 아난·가섭 존자상, 십육나한 중 14위 등 모두 39위가 완전히 파손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이때 이 문화재 털이범들이 토불을 깬 뒤 복장유물을 털었는데 여기에서 나온 불경이 직지심체요절보다 50년이나 앞서는 금속활자본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정치권과 불교계가 비상한 관심 속에 이 책의 행방을 추적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
주장이 사실이라면 이는 금속활자의 역사를 새로 쓰는 세계적인 발견이기 때문이다. 직지심체요절은 1377년(고려 우왕 3년) 청주의 흥덕사에서 간행한 금속활자본인데 내용은 백운 화상이 역대 불조 선사들의 주요 말씀을 초록한 것이다. 이는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1450)보다 73년이 앞서는 세계적인 유물로, 상하 두 권 가운데 지금 전하는 것은 하권 1책뿐이다. 이 책은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돼 있으며 2001년에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됐다.
광흥사가 내 흥미를 끄는 점은 이 절집에서 여러 경전이 간행되었다는 점이다. 1999년에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6호로 지정된 <불설대부모은중경>은 1562년(명종 17) 이 절집에서 다른 경전과 함께 간행한 것이다.
주로 산에 세워졌던 사찰은 판각용 목재를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등 목판 인쇄술 발달에 필요한 조건을 갖추고 있어서 고려의 인쇄술도 초기에는 주로 사찰들에 의해 계승, 발전되었다.
조선 중후기에는 대중들의 요구에 따라 지방사찰에서 경전을 간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당시의 신앙 양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불경 외에도 고승들의 사상과 시를 담은 문집도 많았다.
불교 출판은 매우 장려되어 상업 목적의 출판이 아니었을 뿐, 유행이라고 할 만큼의 다양한 책이 간행되었다. 광흥사에서 경전이 간행되었다는 것은 이 절집이 안동 지방에서는 대중의 요구에 부응할 만한 대찰이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한편, 광흥사는 광해군 5년(1613) 11명의 안동부 선비들이 모여 가진 계모임을 기념한 그림, 임계계회도(壬癸契會圖)의 무대이기도 하다. 모임의 이름이 '임계계회'인 것은 임자(1560년)년과 계축(1561년)년에 태어난 사람들이 모여서이다. 이 계회(契會)는 무려 400여 년, 13대에 걸쳐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이 모임은 한 후손이 KBS-TV의 <진품명품>이란 프로그램에 이 그림의 가치 감정을 의뢰함으로써 일반에 알려졌다. ‘계’는 ‘타자와의 조화로운 삶을 중시하고 교유를 통한 인격의 성숙을 꾀한 선인들이 참여한 갖가지 사회적 모임을 아우를 수 있는 개념’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신분 사회의 질곡을 온몸으로 감당하며 살아온 이들의 처지에서 보자면, 그것은 400여 년 연면히 이어져 온 ‘우월 계급의 성찬’이나 강고한 ‘기득권의 연대’로 여겨질 수도 있지 않을까. 더구나 계회에 참여한 10개 문중(안동 권씨, 영해 박씨, 경주 최씨, 일직 손씨, 진주 하씨, 예안 이씨, 순흥 안씨, 순천 김씨, 한양 조씨, 김해 허씨)이 내로라하는 지역 명문가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말이다.
광흥사를 찾는 이를 맨 먼저 반기는 건 길옆에 외따로 선 일주문과 그 주변의 400살도 더 먹은 은행나무다. 이 나무는 500살 가까이 될 것으로 추정되는 길안면 용계리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175호)와 견줄 만하다. 은행나무는 가끔 부는 바람에 점점이 노랗게 익은 잎을 날리고 있었다.
절집은 초라하다. 불사로 새로 세운 대웅전이 날아갈 듯, 방문객을 맞지만, 주변의 조경도 보잘것없고 세심한 관리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것도 그렇다. 주변엔 풀만이 무성하다. 대웅전을 지나 응진전으로 드는 길목 오른쪽에 이태 전에는 빨갛게 감을 매달고 서 있던 감나무는 고사한 듯 가지만이 앙상하다. 그 아래 패인 도랑 너머로는 명부전이 건너다보인다.
대중들이 얼마나 드는 도량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해 질 녘의 절집 풍경은 쓸쓸했다. 유일하게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응진전 앞뜰에 안내판 하나 없이 서 있는 조그만 돌 구조물 하나, 1993년 세웠다는 진신사리를 봉안한 삼층석탑이 장난감처럼 보인다. 뜰에 듬성듬성 난 잡풀들과 함께 고인 것은 적요다. 저녁 공양 시간인가, 잿빛 승복을 입은 중년의 보살 한 분이 밥상을 들고 뜰을 지나갔다.
광흥사 응진전은 1647년(인조 25)에 지은 당우로 통일신라 이래 전승되어 온 나한 신앙의 기도 도량으로 유명하다. 나한은 아라한(阿羅漢)의 준말로 인간과 천인들의 소원을 속히 성취해 준다 하여 일찍이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주로 십육나한과 오백 나한이 숭앙 되었으며 이들 나한을 모셔 놓은 당우를 나한전이라고 한다.
나한전 중 16 나한상을 모신 당우를 응진전(應眞殿)이라 하는데 응진은 ‘진리에 상응하는 이’라는 뜻이다. 나한에 대한 의례를 행하는 불교의식이 나한재(羅漢齋)인데 이는 왕실과 민간에서 행해졌다. 대승불교의 전통이 강한 우리나라에서는 나한을 ‘소승의 성자’라 하여 폄하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민간에서는 나한에 대한 믿음이 크게 성행하였다.
대표적인 나한도량으로는 함경도 석왕사, 경북 영천의 거조암, 청도 운문사, 전북 완주 봉서사, 서울 수유동 삼성암 등을 꼽는데 광흥사도 그 말석에 이름을 올리는 것이다. 광흥사 응진전에서 일념으로 기도하면 한 가지 소원은 꼭 이룬다고 한다.
절집 오른편 언덕, 학가산 등성이에 자리한 애련사로 가는 고갯길 어귀에서 석양의 절집 풍경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았다. 해우소 뒤편으로 난 산길은 우리 지역의 지인들이 즐겨 찾는 길이다.
해마다 가을이면 우리는 광흥사를 한 바퀴 돌아 나지막한 고개를 넘어 천주 마을을 거쳐 애련사로 오르곤 했다. 발밑에 깔려 바스락대는 낙엽 소리가 가끔 침묵 속의 정적을 더해주는 그 산길이 주는 기억은 애틋하다.
고개를 넘으면, 학가산 정상으로 오르는 깎아지른 절벽이 하늘을 받쳐주는 기둥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천주(天柱) 마을이 있다. 마을 뒤편의 가파른 산길을 오르면 산봉우리를 배경으로 서 있는 애련사는 학가산 중심부의 ‘8방 9암자’의 하나로 보이나 창건자와 창간 연대를 알 수 없는 조그만 절이다.
한때 풍산의 소산마을 출신으로 병자호란 때 척화파의 거두 청음 김상헌 선생이 은둔하였던 암자다. 그러나 어디에도 애련사 현판은 없고, 경박한 푸른색 페인트칠 기와를 인 극락전이 저무는 햇살 속에 외로울 뿐이었다.
길가에 하얗게 늘어선 억새의 행렬과 나날이 짙어져 가고 있는 단풍을 둘러보며 재촉하는 하산길, 그나마 길손을 위로하는 것은 길가 다랑논에 그득그득 쌓아 놓은 볏가리다. 한 해에 걸친 고단하지만 정직한 노동의 결과는, 그러나 시나브로 내리는 어둠 살 아래서 땅을 일구며 살아온 이들의 주름진 이마만큼이나 쓸쓸해 보인다. 그것은 이 개방농정 시대의 땅과 흙의 표정일지도 모르겠다.
사라진 고려시대 금속활자본 미스터리
광흥사에서 직지심체요절보다 50년이 앞선 금속활자본이 도굴되었다는 기사를 단독으로 보도한 것은 지난해 7월 초 <한겨레신문>. 이 기사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이 미스터리는 국회 문광위원을 지낸 김원웅 의원이 도난된 고려시대 금속활자본의 행방을 추적 중이라고 밝히면서 시작되었다. 김 의원은 이 금속활자본을 직접 도굴한 이(현재 복역 중)를 면회해 사실을 확인했는데, 이 도굴범이 광흥사에서 턴 불경이 고려시대 금속활자본이라는 전문가의 감정을 받았다는 것이다.
<한겨레> 기자들은 위 전문가를 만났는데 “책의 맨 뒤에 책의 발행 연대를 알리는 ‘간기’가 적혀 있었는데 <직지심체요절>보다 50년 앞섰다”고 주장했다는 것. 그러나 같은 책을 봤다는 남권희 경북대 교수(문헌정보학)는 예의 책이 “원나라 때 불서인 <설두화상어록>이라는 책”이라며 “종이 재질과 책의 모양, 활자체 등으로 판단할 때 조선 세조 때 간행된 목활자본”이라고 주장하며 “책의 집필 연대가 서문에 나와 있는데 이를 발간 연대와 혼동한 것”으로 보았다.
어쨌든 전문가들의 주장이 엇갈리고는 있지만, 문제는 아직도 그 ‘불경’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것이다. 졸지에 뉴스의 주목을 받게 된 광흥사는 고려시대에 번창한 대찰로 전문가들도 여기서 <직지심체요절>보다 앞서는 금속활자본이 발견됐을 ‘개연성’을 인정하고 있다. 금속활자는 <직지심체요절>이 발간되기 140여 년 전에 이미 사용된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는 것.
‘고려시대 금속활자본’이든 <설두화상어록>이든 이 책들은 아직 국내 서지학계에 보고되지 않은 보물급 문화재인데, 김원웅 의원은 “책이 아직 나오지 않고 있는 것은 누군가 ‘선의취득’을 노리고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고.
작년 8월 보도를 끝으로 이 미스터리에 관한 후속 기사는 아직 나오고 있지 않으니 역시 예의 책은 때를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금속활자의 역사를 새로 쓸 수 있는 만만찮은 발견의 진원지인 광흥사는 그러나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무심하게 석양에 저물어가고 있었다.
2007. 11. 16.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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