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에 대한 우리의 ‘애증’을 생각한다
벚꽃의 계절이다. 남도의 군항 진해에서 시작된 벚꽃의 물결은 바야흐로 북상 중이다. 지난주에 몽우리가 한창이던 교정의 벚꽃은 지난 월요일 출근해 보니 만개해 있었다. 다음날 비 소식이 있다고 해서 부랴부랴 사진기를 챙겨 와서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비가 내리고 다시 총선날인 휴무일을 지나면 벚꽃은 슬슬 지기 시작할지도 모른다 싶어서였다.
그러나 목요일 출근하니 교정의 벚꽃은 절정이었다. 그나마 분홍빛이 드문드문 보이던 월요일 날과 달리 벚꽃은 더 풍성한 흰빛이었다. 가까이서 보는 것보다 멀리서 바라보는 벚꽃의 물결은 온통 넉넉한 백색의 축복이다. 우리 선인들이 벚꽃이 아니라 배꽃을 더 아름답게 여긴 까닭은 벚꽃이 요즘처럼 흔하지 않아서였을까.
이조년과 이매창(계랑)이 각각 배꽃에 비치는 달빛과 비처럼 흩뿌리는 배꽃을 노래했지만, 현대의 한국인들은 더는 배꽃을 찾지 않는다. 어디 가나 벚나무가 흔하디흔한 까닭이다. 그러나 ‘벚꽃’에는 일제 식민지배의 기억과 관련한 굴절된 민족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
그것은 벚꽃이 아니라 ‘사쿠라’로 불리는 형식이다. 글쎄, 해방 이전만 해도 벚꽃이 오늘처럼 흔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홍난파의 ‘고향의 봄’의 노랫말에 등장하는 꽃도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니 말이다. 모르긴 해도 그게 이 나라에서 가장 흔하고 친숙한 꽃이었으리라.
일제는 ‘사쿠라’라 부르는 벚꽃을 군항으로 개발한 진해에 집중적으로 심었다. 또 일본의 벚꽃놀이 풍습을 들여와, 1907년 창경궁에 벚나무를 심고 1911년엔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했다. 1911년엔 ‘궁(宮)’을 ‘원(苑)’으로 격하시키고, 놀이터로 만들었다.
창경원 밤 벚꽃놀이, 일본식 유흥과 민족의식
1924년에 ‘창경원 야앵(夜櫻ㆍ밤 벚꽃놀이)’이 실시되면서 이 땅에는 일본식 봄꽃놀이 문화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야앵’은 단순히 밤 벚꽃놀이에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휘황찬란한 오색 전등 아래 아악과 양악이 연주되고 기생들의 검무와 노래가 어우러지는가 하면 영화가 상영되고 ‘라디오 공개 무대’가 펼쳐지기도 하는 등 종합 유흥의 장이었기 때문이다.
창경원 밤 벚꽃놀이는 식민지에다 일본식 문화를 이식함으로써 맞춤한 이국정서에 식민지 백성들의 불만과 상실감을 적당히 위무해 준 일종의 당근이었을지 모른다. 흥청거리는 밤 벚꽃놀이를 즐기면서 사람들은 ‘일본식 근대’를 섭렵하고 망국의 설움을 잠시 잊을 수 있었을까.
막상 해방이 되고도 이 창경원의 야앵은 연면히 이어졌다. 해마다 수십만 명이 이 일본식 유흥에 기꺼이 동참한 덕분에 창경원 밤 벚꽃놀이는 서울의 최대 관광자원으로 자리 잡으면서 60여 년간 전성기를 누렸다. ‘창경원 밤 벚꽃놀이’는 1984년 일제 잔재를 청산하는 창경궁 복원공사가 이뤄지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일제가 심은 벚나무도 어린이대공원과 여의도 등으로 옮겨졌다.
나는 한 번도 즐기지 못했지만 창경원 밤 벚꽃놀이는 벚꽃에 대한 우리 민족의 모순된 정서의 상징처럼 보인다. 문학과 예술에서 벚꽃은 종종 일본의 무사인 사무라이를 상징하는 것으로 그려지는 것처럼 벚꽃, ‘사쿠라’를 일본의 꽃, 일본문화의 표상으로 여기는 정서가 일반적인 까닭이다. 벚꽃을 바라보는 태도를 ‘반일’의 척도처럼 여기는 생각은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다.
반대로 벚나무 가운데 왕벚나무는 제주도와 전라북도 대둔산에서만 자생하는 우리나라 특산종이므로 일본에 이 나무가 도입되어 자라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 견해는 벚꽃을 일본문화의 표상쯤으로 여기는 생각의 반대편에 서 있다. 굳이 봄이면 되풀이되는 벚꽃 놀이를 흘겨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일찍이 수필가 김소운은 자신의 수필을 통해 일본을 바라보는 모순적 감정을 꼬집은 바 있다. 그는 해방 이후 경향 각지에서 일어난 ‘사쿠라 벌채’와 창경원 야앵에서 드러나는 사람들의 엇갈린 심사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약이며 화장품, 의료 잡화 할 것 없이 일본서 온 것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사족을 못 쓰는 그 백성이 말 없고 죄 없는 꽃나무 한 그루 베어버리고는 애국자연(然)도 가소롭거니와, 같은 사쿠라가 구 왕궁의 뜰에 피면 하루에 20만 명이 모여든다니 이 수수께끼, 이 캐리캐처(희화)에는 도대체 어떤 제목을 붙여야 좋으랴.
- 김소운, ‘민족문화의 순결을 위하여’ <목근통신>(1974, 삼성문화재단)
벚꽃을 바라보는 좀 개운치 않은 경험이라면 내게도 있다. 창경원 야앵이나 진해 군항제의 벚꽃놀이와 마찬가지로 경주 불국사 앞 벚꽃도 그랬다. 생뚱맞게도 ‘자연보호’를 새긴 자연석 뒤로 펼쳐지는, 박정희 재임 때 심었다는 벚꽃의 행렬을 바라보는 마음은 은근히 씁쓸한 것이다. 이 천년 고찰이 펼쳐내는 아름다움으로도 부족한가, 그것도 하필이면 벚꽃인가 싶어서다.
모두가 일본과 ‘사쿠라’를 연상하면서 일어나는 마음의 작용이다. 그러나 세월이 많이 흘렀다. 일본이야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지만 변한 것은 ‘우리’다. 예전처럼 벚꽃과 그것이 표상하는 일본풍 문화에 대한 적의를 드러내는 사람은 없다. 사람들은 무심히 만개한 벚꽃 행렬이 주는 봄의 축복과 감동을 즐길 뿐이다.
교정의 본관 건물 앞뒤와 오른쪽 옆에는 벚나무가 일렬횡대로 서 있다. 불과 사나흘 간격이지만 그것이 연출해 내는 봄의 빛깔을 놀랍게도 화사하고 아름답다. 나는 무심히 풍성한 벚꽃 물결을 오래 바라보았다. 금오산 입구의 벚꽃길이 유명하다고 하지만 거기는 가보지 못했다.
지난 주말에는 처가에 다녀오다가 강변도로를 찾았다. 거기 벚나무 가로수의 장관이 볼 만하다고 해서다. 북부지역과 비길 수 없는 따뜻한 봄, 벚꽃은 바야흐로 절정이었다. 차를 길가에 대고 사진 몇 장을 찍었다. 새벽의 벚꽃을 구경할 수 있다면 그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늘 그렇듯이 그건 생각만으로 그칠 뿐이다.
오늘 출근하니 교정의 벚꽃은 이미 끝물이다. 남은 꽃 빛은 짙어지고 꽃 진 자리에 연록의 잎이 새로 나고 있었다. 도리사 가는 길의 벚꽃은 지금이 한창이라 했다. 그러나 주중에 거기를 찾기는 쉽지 않다. 아쉽지만 다시 오는 봄을 기다리기로 하고 바람 부는 창밖을 내다본다.
2012. 4. 16.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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