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 호거산(虎踞山) 운문사(雲門寺) 기행
운문사는 청도에 있다. 이 진술은 한 마디로 ‘뜬금없다’. 그러나 그 진술은 내게 ‘조계사는 서울에 있다’는 진술과는 전혀 다른 뜻으로 이해된다. 그것은 마음만 먹으면 금방 달려갈 수 있는 두 시간 이내의 거리에, 그것도 같은 경상북도 안에 있다는 전제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 전제 안에는 그런데도 내가 아직 운문사를 찾지 못했다는 사실도 물론 포함된다.
처음 찾은 운문사
정작 가보지 못한 절집인데도 운문사는 내게 ‘비구니 사찰’이라는 이미지로만 떠오른다. ‘구름의 문[운문(雲門)]’이라는 이름이 주는 울림도 예사롭지 않다. 나는 늘 운문사를 생각하면 ‘파르라니 깎은 머리’,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운 ‘두 볼’의 여승들의 수행 정진과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 듯 두 방울’로 ‘별빛’ 같은 ‘번뇌’(이상 조지훈 시 ‘승무’ 중에서)를 떠올리곤 했다.
머리를 깎고 산문에 든 비구니가 걸어온 세속의 길에 대한 대중의 호기심은 그네들 모두를 좌절한 사랑의 여주인공으로 규정한다. 돌아선 사랑에 절망해 머리를 깎고 출가한 여승의 이야기는 그것 자체로 극적인 환상으로 덧칠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그러나 그것은 대중들의 한갓진 호기심이나 호사 취미에 지나지 않은 것, 운문사의 학인 여승들은 비구와 마찬가지로 어려운 구도의 길을 선택한 여성일 뿐이다.
운문사를 찾은 것은 지난 7월 중순께, 벗들과 함께 밀양을 다녀오던 일요일 오전이다. 운문사를 향하면서 나는 비구니 사찰이라는 것 외에 운문사에 대해 아무것도 제대로 알고 있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수행하고 있는 비구니가 얼마나 되는지, 그들의 수행이 대체 어떤 형식으로 이루어지는지도 물론 나는 알지 못했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운문사 편에서 읽은 이야기들도 기억에 아련하기만 하다. 그가 지기라는 운문사의 비구니와 나누었다는 살가운 대화 몇 구절, 학인 여승들이 신고 다니는 남자 고무신 얘기만이 어렴풋이 떠오를 뿐이다.
운문사는 청도군 운문면(지금은 포곡읍) 신원리, 호랑이가 웅크린 듯한 형상의 산, 호거산(虎踞山)에 깃들인 절이다. 무릇 모든 유서 깊은 절집이 그러하듯 운문사의 사적도 이채롭다. 운문사 누리집 등에서 그리고 있는 그 사적은 대충 아래와 같이 줄일 수 있겠다.
신라 불교 중흥기에 창건된 운문사
서기 557년(진흥왕 18년)에 한 신승(神僧)이 북대암 옆 금수동에 작은 암자를 짓고 3년 동안 수도한 끝에 도를 깨친다. 그는 도우(道友) 10여 인의 도움을 받아 7년 동안 동쪽에 가슬갑사(嘉瑟岬寺), 서쪽에 대비갑사(大悲岬寺, 현 대비사), 남쪽에 천문갑사(天門岬寺), 북쪽에 소보갑사(所寶岬寺), 중앙에 대작갑사(大鵲岬寺, 현 운문사) 등 오갑사(五岬寺)를 창건하였다. (그러나 지금 남은 것은 운문사와 대비사뿐이다. )
오갑사가 창건된 시기는 신라가 불교를 중흥하고 삼국통일을 위해 국력을 집중하여 군비를 정비할 때였다. 이때 오갑사가 창건된 운문산 일대에 화랑수련장이 만들어졌다. 이는 곧 신라가 서남 일대 낙동강 유역으로 국력을 신장해가는 과정에서 운문사 일대가 병참기지 역할을 한 전략상의 요충지였기 때문이었다.
그 후 600년(진평왕 22년) 원광 국사가 이 절집을 중창하였다. 그는 대작갑사와 가슬갑사에 머물면서 법회를 열고, 일생 좌우명을 묻는 화랑도인 추항(箒項)과 귀산(貴山)에게 세속오계(世俗五戒)를 내려주어 이곳이 화랑정신의 발원지가 되게 하였다.
한편 후삼국을 통일하면서 태조 왕건은 운문사에 있던 보양 국사의 지혜를 빌려 이 일대를 평정하였다. 그 뒤 후삼국의 사회적 혼란을 수습한 왕건은 937년(태조 20년), 대작갑사에 ‘운문선사(雲門禪寺)’ 사액과 함께 전지(田地) 500결을 하사하였다고 <삼국유사>는 전한다. 전지 500결은 조선조 기준으로 보면 청도군 간전의 1/8에 해당하는 수치니 운문사의 사세가 어느 정도였는가를 짐작게 한다.
운문사를 세 번째로 중창한 이는 원응 국사 학일이다. 왕사로 책봉된 원응이 이 절에 머무를 때가 운문사의 전성기였으니, 원응은 운문사의 새벽 예불 때 원광·보양과 함께 존명을 불리는 삼대 법사가 되었다.
운문사는 12세기 말, 무신정권 아래서 일어난 남적(南賊)으로 다시 한번 주목을 받는다. 초전(현재의 밀양)에서 봉기한 효심과 함께 운문에서 일어난 김사미(?~1194)가 그들이다. 운문이 지명이 아니니 운문산이나 운문사를 가리키는 것은 분명한데 김사미는 이름이 아니라, 운문사에 있던 사미승이 아닌가 하는 견해가 유력하다고 한다.
김사미와 효심의 농민항쟁은 결국 진압되고 농민군들은 운문산으로 숨어들어 이른바 ‘운문적(雲門賊)’이 되었다. 이들은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가 결국 신라 부흥 운동에 동참하다가 최후를 맞았다고 전한다. 역사의 틈바구니에서 고단하게 살다간 백성의 이야기는 어디서든 눈물겹다.
농민항쟁과 운문적, 그리고 일연 스님
<삼국유사>를 쓴 일연(一然, 1206~1289)선사도 운문사를 빛낸 이 중 한 사람이다. 1277년 일연은 충렬왕에 의해 운문사의 주지로 추대되어 운문사에 머물면서 <삼국유사>를 집필하였다. 운문사의 절 동쪽에는 일연의 행적비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일연은 나중에 고향 경산(당시 장산)으로 가 노모를 봉양하다가 군위 인각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한때 대처승이 거주하기도 했던 운문사에는 1958년 불교 정화 운동 이후 비구니 전문강원이 열렸다. 이 강원은 1987년 승가대학으로 바뀌었고 1997년에는 승가대학원이 개설되어 승려 교육과 경전 연구기관으로 많은 수도승을 배출하고 있다.
현재 운문사에서 수행하고 있는 비구니는 대략 260여 명. 국내 승가대학 가운데 최대의 규모와 학인 수다. 특히 이곳에서는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백장청규(百丈淸規)를 철저히 실천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머무는 동안 운문사에서 만난 여승은 고작 몇 명에 지나지 않았다.
대개 뭇 절집들이 그러하듯 운문사로 들어가는 긴 숲길은 아름답다. 유홍준이 그의 답사기에서 찬탄해 마지않은 운문사 입구의 솔밭을 지나 운문사로 든다. 일요일 오전, 답사객이 밀려들기엔 이른 10시께라 인적이 드문 주차장에 차를 대고 절집으로 들어간다.
절집은 주차장 왼편으로 난 담장을 따라가다 만나게 되는 2층 범종루를 지나 들게 되어 있다. 마치 주차장에 토라진 듯 절집은 몸을 돌려 다른 방향을 건너다보고 있는 형국이다. 제법 너르고 곧은 담장 길은 비어 있다. 문득 아련한 여수를 떠올리게 하는 고적한 풍경이다.
국내 최대규모의 비구니 승가대학
범종루 누마루 아래를 지나면 펼쳐지는 것은 나지막한 산을 배경으로 들어선 여러 채의 전각, 천연기념물이라는 처진 소나무, 그리고 왼편 화단에 무리 지어 핀 장미꽃이다. 절집에 핀 화사한 장미가 주는 울림은 좀 색다르다. 그러나 그게 ‘생뚱맞다’는 느낌으로 이어지지 않는 것은 절집이 가진 묘한 안정감과 고즈넉함 때문이다.
대개 전각이 빽빽하게 들어찬 절집은 좀 들떠 보인다. 촘촘하게 배치된 전각이 주는 답답함 때문이다. 운문사도 그리 넓어 보이지 않는 터에 늘어선 전각들이 약 30여 동이다. 대웅전·비로전·오백전·작압전·명부전이 경내에서 가장 큰 누각인 만세루(萬歲樓) 주변에 의좋게 서 있다. 그러나 운문사는 들떠 보이지 않는데, 이는 전체적으로 경내에서 느껴지는 것은 차분한 느낌 덕분인 듯하다.
만세루는 조선 말기에 지어진 정면 7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평면이 164평으로 운문사에서 면적이 가장 넓은 건물인데 기단도 낮고 건물 바닥도 다른 누각에 비하면 낮은 편이다. 사면을 창호 없이 모두 개방해 시원한 느낌을 주는 게 이 누각의 특징이다.
한때 종각으로 쓰이기도 했던 건물의 널찍한 우물마루엔 법고가 덩그렇게 매달려 있다. 단지 크기만 할 뿐 그에 걸맞은 건축적 의미는 별로라고 하지만 그만그만한 전각을 주변에 거느리고 의연히 서 있어 그 중심을 잡고 있어 전체적으로 막힌 숨통을 틔우는 느낌이 없잖아 있다.
1천5백 년의 역사를 가진 절집이라 문화재도 만만찮다. 운문사는 대웅전(보물 835호), 삼층석탑(보물 678호), 석등(보물 193호), 원응 국사비(보물 316호), 석조여래좌상(보물 317호), 사천왕 석주(보물 318호), 동호(보물 208호) 등 모두 7점의 보물을 품고 있다.
의당 보물은 눈여겨볼 일이로되 공연히 바쁜 척을 하느라 이리저리 부산하게 만세루 주변을 맴돌았다. 운문사는 만세루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대여섯 채의 전각만이 나그네를 맞을 뿐, 학인들의 공부와 거주 공간인 절집의 왼쪽 강원 부분은 ‘외인’의 출입을 금하고 있다.
작압전(鵲鴨殿) 앞의 불이문 앞에서 우리는 걸음을 멈춘다. 그 문 안에 펼쳐진 수행의 공간으로 들어갈 수 없는 우리는 ‘잡인’이다. 비구니들의 수행과 삶의 공간인 탓일까. 속인의 범접을 거부하고 있는 듯한 담장, 그 너머에 핀 접시꽃과 능소화 덩굴이 아련하게 다가온다.
담장에 가지런히 덮인 기왓장의 고색창연 위에 고개를 내민 키 큰 빨갛고 하얀 접시꽃의 행렬은 이 절집에 서린 여인들의 향기 같은 것. 어느 전각 앞 댓돌에 나란히 놓인 검정 샌들과 중고생들이 신는 흰빛 무용화의 앙상블만큼이나 그것은 쓸쓸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거듭 말하거니와 운문사에서 공부하는 학인들은 대중의 기대처럼 사랑과 삶의 상처를 치유하고자 출가한 이들이 아니다. 수행과 구도를 선택한 그들의 삶은 여느 종교의 수행자와 다르지 않다.
외인의 출입을 금한 회성당 옆을 지나는, 밀짚모자를 쓴 키 작은 학인과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긴 담장 길을 나란히 걷고 있는 두 비구니의 무심한 뒷모습에서 읽히는 것은 수행자의 삶에서 풍기는 여유다.
돌아 나오는 길, 멀리 단정하게 선 범종루를 배경으로 벌개미취가 활짝 피어 있다. 그 연보랏빛 꽃잎과 노란 꽃술 너머로 ‘아니야, 아니야’ 머리를 흔들면서도 나는 일제 식민지 시대 가족 공동체의 붕괴를 노래한 백석의 시 ‘여승’을 떠올렸다. 왜일까.
스님에 대한 사진 촬영을 금하고 있는 비구니 강원에서 내 렌즈는 고작 그들의 뒷모습을 담았을 뿐이다. 맑디맑은 여성 구도자의 정결한 눈빛을 보지 못했으면서도, 그들이 지향하는 니르바나(Nirvana, 涅槃)의 세계를 알지 못하면서도 백석 시인을 따라 ‘나는 불경(佛經)처럼 서러워’졌던 것일까.
2008. 9. 5.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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