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첫 절기 입추(立秋)
지난해의 끔찍한 더위를 떠올리는 이에게 올여름은 양반이다. 글쎄, 견디기 힘들 만큼 더웠던 날이 있었나 싶기 때문이다. 6월 초순에 뜬금없이 온도가 예년보다 높았지만 그걸 더위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더위는 낮도 그렇지만 열대야가 이어질 때 잠을 설치게 하는 게 제일 힘이 든다. 그런데 그간 열대야라고 한 날이 며칠 있었지만, 지난해같이 끔찍하지는 않았다. 새벽녘에 이불 속으로 기어들게 하는 날도 적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틀 전부터는 사정이 달라졌다. 한낮 기온이 35도에 육박하고, 자정까지 28, 29도를 오르내리는 열대야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이 기분 나쁜 온도와 습기는 숙면을 불가능하게 한다. 자긴 하는데, 어쩐지 반쯤을 깨어 있는 상태가 이어지는, 한마디로 수면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 일주일 전쯤에 처음 냉방기를 시험 운전 겸 돌렸는데, 이제 하루 서너 시간 이상은 줄곧 돌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인간의 기억과 느낌이란 얼마나 얄팍한가, 올해는 더위도 아니었다는 말은 일찌감치 쑥 들어가 버렸다. 이제 빨리 열대야가 끝나고 성큼 가을 소식이 오기를 기대할 뿐이다.
입추, ‘설 립(立) 자’를 쓴다
글쎄, 8월 8일(2024년도는 7일), 입추 날까지 더위가 이어질까. 더위가 아직 끔찍한데 가을 절기가 다가온다는 게 ‘생뚱맞다.’ 그러나 계절과 시간의 순환이란 늘 그렇지 않은가. 다음 주 중반쯤이면 이 더위도 꼬릴 내리게 될지도 모른다.
‘겨울이 오면 봄이 멀지 않다’고, ‘새벽이 가까워질수록 어둠은 더욱 짙어진다’고 노래한 시가 아니더라도 늘 더위는 서늘한 가을을, 혹독한 추위는 봄의 따뜻한 볕을 예비하고 있는 법이다. 입추 지나 보름 후인 23일이 더위가 물러난다는 ‘처서(處暑)’니 절기는 고르지 않은 일기와 무관하게 계절의 발걸음은 누천년의 관습을 따라 계속되고 있다.
입추는 전체 절기 가운데선 13번째, 가을 절기로는 첫 번째 절기다. 대서(大暑)와 처서(處暑)의 사이에 든 입추는 곧 ‘여름이 지나고 가을에 접어들었음’을 알리는 절후이다. 이날부터 입동(立冬) 전까지를 ‘가을’이라고 부른다.
입춘, 입하, 입추, 입동은 ‘들 입(入)’자 대신 ‘설 립(立)’ 자를 쓴다. 까닭은 두 글자의 뜻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들다’는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가다’의 뜻이 강하다. 그러나 ‘서다’는 ‘없었던 것이 새로이 나타나다’라는 뜻이나 ‘이전 계절의 기운이 강해서 숙이고 있다가 고개를 내밀듯 새로운 계절의 기운이 일어나다’의 뜻이라는 것이다.
‘가을로 접어든다’라고 했지만, 입추 무렵의 날씨는 여전히 덥다. <고려사>의 기록이다.
“입추는 7월의 절기이다. (……) 초후(初候, 첫 5일)에는 서늘한 바람이 불어온다. 차후(次候, 두 번째 5일)에 흰 이슬이 내린다. 말후(末候, 마지막 5일)에 쓰르라미[한선(寒蟬)]가 운다.”
“입하부터 입추까지 백성들이 조정에 얼음을 진상하면 이를 대궐에서 쓰고, 조정 대신들에게도 나눠주었다.”
“입추에는 관리에게 하루 휴가를 준다.”
‘어정 7월, 건들 8월’
입추 무렵은 벼가 한창 익어가는 때여서 맑은 날씨가 계속되어야 한다. 조선 시대에는 입추가 지나서 비가 닷새 이상 계속되면 조정이나 각 고을에서는 비를 멎게 해달라는 ‘기청제(祈晴祭)’를 올렸다 한다.
입추에는 날씨를 보고 농사의 풍흉을 점친다. 하늘이 청명하면 풍년, 비가 조금 내리면 길하되 많이 내리면 벼가 상한다고 보았다. 또 천둥이 치면 벼의 수확량이 적고 지진이 있으면 이듬해 봄에 소와 염소가 죽는다고 여겼다.
더위가 가시지는 않았지만, 입추 무렵부터는 가을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 이때 김장용 무와 배추를 심는다. 이 무렵에는 김매기도 끝나가고 농촌도 한가해지기 시작한다. 그래서 ‘어정 7월, 건들 8월’이라는 말이 생겼다. 이는 모내기와 보리 수확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5월을 일러 ‘발등에 오줌 싼다.’고 하는 것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여름 과일로 수박과 참외가 물러나고 자두와 복숭아 등이 저자에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올엔 이 여름과일이 풍년이란다. 풍작인 대신 값이 떨어진 것이다. 인근 도시의 청과시장에서 폭락한 과일 소식을 듣는데, 그게 남의 일 같지 않아서 걱정스럽다. 복숭아 농사를 짓고 있는 벗을 찾았다가 과일 한 상자를 얻어왔다.
입추를 향해 달려가는 8월 둘째 주도 초반은 지난주와 다르지 않으리라고 한다. 서북 서진하고 있는 제8호 태풍 프란시스코가 수요일(7일)쯤에 우리나라에 상륙할 것이라 하는데, 이 태풍이 몰고 오는 비가 온도를 얼마나 떨어뜨릴 수 있을까.
두려운 건 낮 기온이 아니다. 열대야로 잠 못 이루는 밤이 계속되는 게 더 힘든 것이다. 바라는 것은 ‘열대야’가 숙지는 것, 어쨌든 절기는 ‘처서’를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으니까.
서늘한 바람은 아직 ‘언감생심’, 들판은 아직 푸르기만 하고 한낮의 수은주는 한껏 달아오르고 있지만, 여름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온 세상을 다 덮어버릴 듯한 기세의 무더위도 곧 한풀 꺾이면서 가을이 그 차분한 발걸음을 떼기 시작하고 있다.
2019. 8. 6. 낮달
[서(序)] 새로 ‘24절기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가을 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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