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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세시 풍속·24절기 이야기

⑮ 백로(白露), 벼가 여물어가는 분기점

by 낮달2018 2023. 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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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로(白露), 가을의 세 번째 절기

▲ 백로 무렵이면 벌초를 시작하고, 일손을 쉬는 때라 부녀자들은 근친하러 가기도 한다. 올해는 추석이 일러 벌초를 한 주일 당겨야 했다.

처서(處暑)를 지나면서 무더위는 한풀 꺾였다. 30도를 넘는 폭염이 계속되다가 거짓말처럼 기온이 30도 아래로 떨어졌고, 아침저녁으로는 한기를 느낄 만큼 일교차가 커졌다. 사람들은 저마다 ‘절기’를 속이지 못한다고 입을 모은다. 24절기가 태양의 움직임을 기준으로 해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는 것이다.

 

9월 8일(2024년도는 7일)은 백로(白露), 24절기의 열다섯 번째, 가을의 세 번째 절기다. 처서(8.23.)와 추분(9.23.) 사이에 드는 백로는 ‘흰 이슬’이라는 뜻으로 이 시기에 밤에 기온이 이슬점 이하로 내려가 풀잎이나 물체에 이슬이 맺힌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백로는 가을 기운이 완연해지는 시기로 옛날 중국 사람들은 백로부터 추분까지의 시기를 닷새씩 삼후(三候)로 나누어 그 특징을 다음과 같이 일렀다.

 

“초후(初候)에는 기러기가 날아오고,
중후(中候)에는 제비가 강남으로 돌아가며,
말후(末候)에는 뭇 새들이 먹이를 갈무리한다.”

 

백로 즈음이면 고추는 더욱 붉은색을 띠기 시작한다. 맑은 날이 연이어지고 기온도 적당해서 오곡백과가 여물어간다. “백로에 비가 오면 오곡이 겉여물고 백과에 단물이 빠진다.”라는 속담은 백로 무렵의 청명한 날씨가 햇볕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일러 준다.

 

낟알을 여물게 하고 과일에 단맛을 더하는 햇볕

▲ 산행길 근처에 석류가 익어가고 있다.

벼 이삭이 여물어가는 등숙기(登熟期 : 양력 8월 중순~9월 말)의 고온 청명한 날씨는 필수다. 일조량은 수확량과 비례하니 이 무렵의 햇살과 더위는 농작물엔 보약과 같다. 늦여름에서 초가을 사이 내리쬐는 햇볕에 쌀 12만 섬(1998년 기준)이 증산된다고 하니 말이다.

 

특히 중위도 지방에서는 장마 탓에 자라지 못한 벼가 늦더위 햇볕에 낟알이 충실해지고 과일엔 단맛을 더하게 된다. 이때의 더위 덕분에 한가위에는 햅쌀과 햇과일을 먹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릴케가 시 ‘가을날’에서 ‘위대한 여름’을 노래한 것은 이 때문이다.

 

마지막 과일들이 무르익도록 명(命)하소서.
이틀만 더 남국(南國)의 날을 베푸시어
과일들의 완성을 재촉하시고, 독한 포도주에는
마지막 단맛이 스미게 하소서.

 

백로에 관련된 속담으로 “칠월 백로에 패지 않은 벼는 못 먹어도 팔월 백로에 패지 않은 벼는 먹는다.”가 있다. ‘패다’는 ‘곡식의 이삭 따위가 나오다’라는 뜻의 동사다. 백로는 이삭이 여물기에 좋은 철이므로, 백로 전에는 벼가 패어야 한다. 만약 이때까지 벼가 패지 않으면 이삭 여물 시간을 갖지 못하게 되어 그 벼는 먹을 수 없게 된다.

 

“백로가 지나서는 논에 가볼 필요가 없다.”
“백로 전 미발(未發)이면 알곡 수확물이 없다.”
“백로 전 미발이며 헛농사다.”
“백로 미발은 먹지 못한다.”
“백로 안에 벼 안 팬 집에는 가지도 말아라.”
“백로 아침에 팬 벼는 먹고 저녁에 팬 벼는 못 먹는다.”

 

일반적으로 백로는 음력 팔월에 드는 절기로, 음력 칠월에 벌써 백로가 들었다면 이는 절기가 일찍 진행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때까지도 벼가 패지 않으면 이후 벼가 여물어 추수할 시간을 가질 수 없다. 상대적으로 팔월에 드는 백로는 칠월 백로에 비교해 절기 진행이 늦은 편이다. 아직 기대해볼 만한 여유가 남아 있으므로 이때의 벼는 먹을 수 있다고 한 것이다.

 

비슷한 뜻의 속담도 꽤 된다. 백로 때의 이삭 상태는 가을 농사의 성공을 가늠할 만큼 중요하므로 백로와 벼 이삭을 관련짓는 속담이 생긴 것이다. ‘이삭이 패지 않다’라는 한자어로 ‘미발(未發)’이라고 한다. 모두 벼가 여무는 데 백로가 중요한 분기점이 된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백로, 벼가 여무는 ‘분기점’

▲ 이른 한가위 탓에 아직 추수는 멀다. 그러나 시간 되어 나락이 패면서 들판은 가을의 풍요를 바야흐로 준비하고 있다.

백로 이후에는 쾌청한 날씨가 이어지지만, 간혹 남쪽에서 불어오는 태풍이 곡식을 넘어뜨리고 해일의 피해를 가져오기도 한다. 한동안 쾌적한 날이 계속되더니 이번 주 들면서 태풍의 영향권에 들면서 한 주 내내 비가 끊이지 않는다. 일기예보에 따르면 태풍 링링은 오늘 7일 한반도에 상륙한다는데, 이 강형 태풍이 우리나라를 비켜 가기를 기대해 본다.

 

백로인 8일은 일요일이다. 백로 무렵이면 조상의 묘를 찾아 벌초를 시작하고, 고된 여름 농사를 다 짓고 추수할 때까지 잠시 일손을 쉬는 때이므로 부녀자들은 근친(覲親)하러 가기도 한다는데 절기가 제대로 맞아떨어졌다. 그러나 오는 13일이 한가위여서 벌초는 지난주에 끝내야 했다.

 

하얀 이슬 산들바람 가을을 보내주자.
발[염(廉)] 밖의 물과 하늘 창망(蒼茫)한 가을일레.
앞산에 잎새 지고 매미 소리 멀어져
막대 끌고 나와 보니 곳마다 가을일레.
    - 이덕무, ‘사계시’ 중에서

 

조선 후기의 실학자 청장관 이덕무는 사계시(四季詩)를 통하여 가을을 ‘하얀 이슬[백로(白露)]’과 ‘산들바람’으로 정리했다. ‘잎새 지고 매미 소리 멀어’져 그예 ‘곳마다’ 당도한 ‘가을’을 그윽이 바라보고 있는 한 선비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의 시편을 소리 내어 읽어본다.

 

 

2013. 9. 5. 낮달

 

[서(序)] 새로 ‘24절기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가을 절기

입추(立秋), 어쨌든 여름은 막바지로 달려가고

처서(處暑), “귀뚜라미 등에 업히고, 뭉게구름 타고 온다”

추분(秋分), 우렛소리 멈추고 벌레도 숨는다

한로(寒露), 제비는 강남으로, 기러기는 북에서 오는

상강(霜降), 겨울을 재촉하는 된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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