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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세시 풍속·24절기 이야기

‘단오(端午)’, 잊힌 명절

by 낮달2018 2023. 6.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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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경사회에서 근대 산업사회로 옮아가면서 잊히고 있는 명절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천년을 이어온 힐링 축제' 강릉단오제.

6월 7일(2024년은 10일)은 잊힌 명절, 단오(端午)다. 나 역시 그랬듯 요즘 아이들은 ‘단오’가 명절이었다는 사실도 모른다. 삼국시대 이래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도 명절로 쇠었던 이 절일(節日)은 농경사회에서 근대 산업사회로의 변화와 함께 사람들에게서 시나브로 잊히어 가고 있다.

 

사실 단오라고 반색을 하긴 했지만, 내게도 세시 풍속으로서의 ‘단오’에 대한 기억은 실하지 않다. 글쎄, 유일하게 기억나는 게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마을 하천 곁에서 펼쳐진 씨름대회가 고작이다. 그리 넓지 않은 모래밭인데 여기저기 가마솥에서 고깃국이 끓고, 한편에선 씨름판이 벌어졌던 1960년대의 광경은 마치 꿈결같이 떠오른다.

 

그 씨름대회의 우승자는 황소를 타 갔다던가. 나는 가난한 농촌에서 단오라고 씨름대회가 베풀어지고 거기 황소가 걸리는 씨름판이 벌어지는 저 1960년대의 풍경을 아직도 합리적으로 상상할 수 없다. 누가 그 판을 벌였는지, 거기 쓰이는 물자와 돈은 누가 냈는지 등을 말이다. 그러나 그게 이른바 ‘근대화’가 이루어지기 이전의 우리 농촌 공동체의 모습이었다는 것은 분명한 듯하다.

 

그리고 자라면서 나는 단오를 한 번도 의식해 본 적이 없다. 그것은 2013년 현재 단오가 박제된 세시풍속이 되어 버린 이유의 하나일 터이다. 단오는 일부 지방에서 단오제, 단오굿의 형태로 가까스로 이어지고 있을 뿐이다. 강릉단오제가 2005년에 유네스코가 지정하는 세계무형유산인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에 선정된 것도 그 쇠퇴를 반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단오의 어원과 유래

 

단오는 달리 수릿날[술의일(戌衣日)·수뢰일(水瀨日)], 천중절(天中節), 중오절(重午節), 단양(端陽)이라고도 한다. 단오의 ‘단(端)’자는 첫 번째를 뜻하고, ‘오(午)’는 ‘다섯’의 뜻이므로 단오는 ‘초닷새’를 뜻한다. ‘중오’는 오(五)의 수가 겹치는 5월 5일을 뜻하는 것으로 양기가 왕성한 날로 풀이된다.

 

음양 사상에서는 홀수[기수(奇數)]가 ‘양’의 수고, 양의 수를 길하다고 여겼다. 전통사회의 절일(節日)로 설(1월 1일)·삼짇날(3월 3일)·칠석(7월 7일)·중구(9월 9일) 등이 있는데, 이는 기수민속(奇數民俗)으로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단오는 중국 초나라 회왕 때에 비롯되었다고 전한다. ‘이소(離騷)’와 ‘어부사’의 시인 굴원(屈原)이 간신들의 모함에 자신의 지조를 보이기 위하여 멱라수(汨羅水)에 몸을 던져 죽었는데, 그날이 5월 초닷새였다. 그 후 해마다 굴원을 위한 제사를 지내게 되었고 이것이 우리나라에 전래하여 단오가 되었다는 것이다.

 

단옷날은 계절적으로 태양 축제에 해당한다. 7세기 문헌인 <수서(隋書)>에 신라인들을 가리켜 일월신(日月神)을 경배하는 민족이라 하였는데, 정월 대보름 축제가 달의 축제였다면 단오 축제는 태양의 축제인 것이다.

 

신라와 가야 시대 이래로 숭상된 단오는 고려시대에는 그네, 격구 내지는 석전(石戰) 놀이를 하는 무용적(武勇的) 속절(俗節)로 성립하였고, 조선시대에는 정조(正朝, 설날), 동지(冬至)와 아울러 삼절일(節日)이 되었으며, 민간에서도 그네와 씨름이 성행하였다.

 

단오 옷은 젊은 낭자(娘子)에게 꼭 맞으니(戌衣端稱少娘年),
가는 모시 베로 만든 홑치마에 잇빛이 선명하다(細苧單裳茜色鮮).
꽃다운 나무 아래서 그네를 다 파하고(送罷秋天芳樹下),
창포 뿌리 비녀가 떨어지니 작은 머리털이 비녀에 두루 있다(菖根簪墮小髮偏).
단오 옷을 술의(戌衣)라고 한다(端午衣曰戌衣).”
   - 유만공(1793~1869)의 <세시풍요(歲時風謠)> 5월 5일

 

단오의 풍속, 그네뛰기와 씨름

 

전통사회에서 단오의 세시풍속은 더운 여름철의 건강을 유지하는 지혜와 신체단련을 위한 놀이, 재액을 방지하기 위한 습속, 풍농을 소망하는 의례가 주를 이루고 있다.

▲ 단오 그네뛰기. 그네뛰기는 단옷날 여성들의 대표적인 민속놀이다. ⓒ 민속박물관

여성들의 그네뛰기와 남성들의 씨름이 단오의 대표적인 민속놀이다. 이때쯤이면 창포가 익어 남녀 어린이들은 창포물에 세수하고 머리를 감은 다음 홍색과 녹색의 새 옷을 입는다. (이를 ‘단오빔’이라고 한다). 이때가 되면 가는 곳마다 전망 좋은 곳의 큰 버드나무 가지나 늙은 소나무 가지에 그넷줄을 매어놓거나 그네틀을 따로 마련해 놓았다.

 

그네는 대개 한 사람이 뛰지만 한 그네에 두 사람이 마주하고 뛰는 ‘쌍그네’ 또는 ‘맞그네’ 방식도 있었다. 그네 경기는 누가 더 높이 올라가는가를 놓고 우열을 다투었다. 조선 후기의 화가 신윤복은 한복을 차려입은 부녀자들이 치마폭을 바람에 날리며 하늘로 치솟는 모습 등을 ‘단오풍정(端午風情)’이라는 그림에 담기도 했다.

▲ 혜원 신윤복의 '단오풍정'. 그네 뛰는 여인과 창포물에 머리 감는 여인을 그렸다. 간송미술관 소장

씨름은 우리 고유의 민속 경기다. 중국 지린성의 고구려 무덤 ‘각저총’ 내부 벽화에 그려진 씨름 그림은 조선 후기 김홍도가 그린 씨름 그림과 비교할 때 복식(服飾) 말고는 별 차이가 없다고 한다. 씨름대회에서 이긴 사람에게는 관례로 황소를 상으로 주는데, 경기는 요즘과 같은 토너먼트식이 아니라 도전자들을 모두 이겨 상대자가 없어야 우승자가 가려지는 형식이었다.

 

이처럼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는 씨름은 이제 완연한 쇠퇴기다. 잠깐 씨름이 프로 스포츠로 인기를 몬 적도 있지만 이미 씨름의 쇠락은 현재형이다. 남북이 각각 신청하여 2018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된 것도 빛이 바랬다. 무엇이 이 전통의 민속 경기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멀어진 것일까. [관련 글 : 쇠락하는 민속 경기 ‘씨름’ 인류무형문화유산이 되다

▲ 씨름대회. 세계문화유산까지 지정되었지만, 씨름도 퇴조하고 있다. ⓒ 강릉단오제 누리집
▲꽃창포. 창포를 삶은 물에 머리를 감아 윤기를 더했다.
▲ 창포물에 머리 감기 ⓒ 한겨레 사진

전통사회에서 농가의 부녀자들은 창포 뿌리를 잘라 비녀로 만들어 머리에 꽂아 두통과 재액(災厄)을 막았다. 이를 ‘단오장(端午粧)’이라 했다. 또 창포를 삶은 물에 머리를 감아 윤기를 더하게 하는 일도 빼놓지 않았다. 요즘 나오는 비누나 샴푸 따위에 창포 이름이 쓰이게 된 까닭이다.

 

남자들은 단옷날 창포 뿌리를 허리에 차고 다니는데, 이는 벽사(辟邪)의 효험을 기대하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농가에서는 가장 양기가 왕성한 시각으로 여긴 오시(오전 11시∼오후 1시)에 약쑥, 익모초, 찔레꽃 등을 따서 말려 두기도 했다. 뜯은 약쑥을 한 다발로 묶어서 대문 옆에 세워두는 일이 있는데, 이 역시 재액을 물리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또 농가에서는 대추 풍년을 기원하기 위하여 대추나무 가지 사이에 돌을 끼워 놓는 습속이 있는데, 이를 ‘대추나무 시집보내기’라 했다. 볼 것 없이 이는 남녀의 성적 결합을 유추한 유감 주술((類感呪術)이다. 성적 교접에 왕성한 생산력에 대한 소망을 거기에 의탁(依託)한 것이었다.

▲ 수리떡 ⓒ 리브레 위키

단오에 베풀어진 의례로 ‘단오첩(端午帖)’과 ‘단오선(端午扇)’이 있다. 단오첩은 신하들이 단오절을 축하하는 시를 지어 궁중에 올린 첩자(帖子)고, 단옷날에 선물로 주고받는 부채가 단오선(端午扇)이다. 절선(節扇)이라고도 한다.

 

▲ 단오선 ⓒ 민속박물관

단오절에 부채를 생산하는 영호남 지역에서 부채를 진상[단오진선(端午進扇)]하면 임금은 여러 자루의 부채를 신하들에게 하사[단오사선(端午賜扇)]하며, 부채를 받은 신하들은 이를 일가친척과 친지에게 나누어주는 풍습이었다. 단오진선은 조세의 일종으로 진상하지 않거나 조잡할 경우 문책하는 등 폐단이 있어 고종 때에 폐지되었다.

 

이밖에도 단오를 맞아 새로 수확한 앵두를 천신(薦新)하고, 조상에게 제사를 올리는 단오절사(端午節祀)를 지냈다. 또한, 집안의 평안과 오곡의 풍년, 그리고 자손의 번창을 비는 단오고사(端午告祀)를 지내기도 했다.

 

단오에는 마을마다 수호신에게 공동체 제의를 지냈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군현 단위마다 큰 단오제가 베풀어졌는데 그중 가장 대표적인 제의가 강릉단오제다. 대관령 서낭을 제사하는 강릉단오제는 중요무형문화재 제13호로, 20005년에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 강릉 단오제 가운데 강릉 관노가면극. ⓒ 강릉단오제 누리집

<동국세시기>의 기록에 따르면 경상도 군위에는 김유신 장군의 사당 등 삼장군당(三將軍堂)이 있는데 해마다 단옷날 고을 아전이 고을 사람을 거느리고 역마를 타고 기를 들고 북을 울리며 신을 맞아서 마을을 돌아다니며 놀았다고 한다.

 

현재 경북 군위군 효령면에 장군당을 복원하여 효령사(孝靈祠)라 하고, 단옷날 제사를 지내고 있다. 경남 창녕군 영산면에서 매년 단오에 문호장(文戶長)을 모시는 영산단오굿을 벌인다. 이들 제의에 담긴 것은 우리 선인들의 ‘벽사진경(辟邪進慶)’의 원초적 소망이다.

▲ 경북 군위군 효령면에 장군당을 복원하여 효령사라 하고, 단옷날 제사를 지내고 있다. 앞은 제동서원. 뒤는 숭무사.(2019.6.4.)

단오의 시절 음식으로는 수리떡과 약떡이 있다.<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의 기록에 의하면 “이날은 쑥잎을 따다가 찌고 멥쌀가루 속에 넣고 반죽을 하여 초록색이 나도록 하여 이것으로 떡을 만든다. 그리고 수레바퀴 모양으로 빚어서 먹는다.”고 하는데 이 떡이 바로 수리떡이다. 그러나 내게도 이 시절 음식은 낯설기만 하다.

 

자본의 크기가 모든 가치의 기준이 되고 경제원리가 삶을 주도하는 각박한 산업사회의 진전과 음력의 쓰임이 점점 줄게 되면서 그예 단오는 잊힌 세시 풍속이 되었다. 변화된 세상과 삶에서 한 시대 이전의 세시풍속을 되뇌는 것은 한갓진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거기 담긴 삶과 노동, 공동체의 의미를 성찰해 보는 것은 여전히 뜻깊은 일이라 할 수 있겠다.

 

 

2019. 6. 6. 낮달

 

 

참고

· 한국민속대백과사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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