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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세시 풍속·24절기 이야기

⑭ 처서(處暑), “귀뚜라미 등에 업히고, 뭉게구름 타고 온다”

by 낮달2018 2024. 8.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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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두 번째 절기 처서(處暑)

▲ 처서 무렵이면 풀도 성장을 멈추므로 산소를 찾아 벌초한다. 다음 주쯤에는 나도 벌초를 가야 할 듯하다. 우리 집안의 벌초 모습.

8월 23일(2024년은 22일)은 ‘더위가 물러난다’는 처서(處暑)다. 처서는 24절기 가운데 열네 번째, 가을의 두 번째 절기로 입추와 백로(白露) 사이에 든다. 흔히 처서는 ‘땅에서는 귀뚜라미 등에 업혀 오고, 하늘에서는 뭉게구름 타고 온다.’라고 표현된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는 계절의 순환을 감각적으로 그린 것이다.

이러한 자연의 미묘한 변화를 <고려사(高麗史)>에선 처서의 보름간을 5일씩 나누어 다음과 같이 풀이했다.

 

“첫 5일간인 초후(初侯)에는 매가 새를 잡아 제를 지내고, 둘째 5일간인 차후(次侯)에는 천지에 가을 기운이 돌며, 셋째 5일간인 말후(末候)에는 곡식이 익어간다.”

▲금오산 채미정 앞에서 만난 고추잠자리
▲ 전주 한옥마을 경기전 내 전주사고에서 실시된 조선왕조실록 포쇄 재현행사에서 유생들이 실록을 바람에 말리고 있다. ⓒ 전북도민일보

처서가 지나면 햇볕이 누그러져 풀이 더는 자라지 않는다고 하여 “처서가 지나면 풀도 울며 돌아간다.”라는 속담이 생겼다. 처서 무렵이면 사람들은 논두렁의 풀을 깎거나 산소를 찾아 벌초한다. 여름 동안 장마에 젖은 옷이나 책을 햇볕에 말리는 포쇄(曝曬)도 이 무렵에 하며 모기의 성화도 사라져 ‘처서가 지나면 모기도 입이 비뚤어진다.’라고 했다.

또한, 백중의 호미씻이도 끝나는 무렵이라 농촌이 한가한 때다. ‘어정거리고 건들거리며’ 7, 8월을 보낸다고 하여 ‘어정 칠월 건들 팔월’이란 말이 생겼다. 대신 이 무렵의 날씨는 한해 농사의 풍흉을 결정짓는다고 믿어졌다.

일본의 경제 보복에 ‘처서에 장벼 패듯’ 일어난 시민의식

▲ 들판에도 나락이 패어 시나브로 익어가고 있다. 8월 21일 아침, 구미.

비록 가을 기운이 왔다고는 하지만 햇살은 여전히 왕성해야 하고 날씨는 쾌청해야 한다. 이 무렵은 벼 이삭이 패는 때로 강한 햇살을 받아야만 벼가 잘 여물기 때문이다. 영남, 호남, 제주 등 여러 지역에서 처서에 비가 오면 ‘십 리에 천석 감한다.’라는 믿음이 전해지고 있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처서에 비가 오면 그동안 잘 자라던 곡식도 흉작을 면치 못하게 된다. 맑은 바람과 왕성한 햇살이 나락을 제대로 여물게 하는데, 비가 내리면 벼의 생장을 크게 그르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념은 전국에서 확인된다. 경남 통영에서는 ‘처서에 비가 오면 십 리 천석을 감하고, 백로에 비가 오면 십리 백석을 감한다.’라고 한다. 전북 부안과 청산에서는 ‘처서 날 비가 오면 큰아기들이 울고 간다.’라고 한다.

예부터 부안과 청산은 대추 농사로 유명한 곳, 결실기인 처서를 전후하여 비가 내리면 대추가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되고, 이는 혼사를 앞둔 큰아기들의 혼수 장만 걱정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처서비는 농사에 유익하지 못하니 처서비를 꺼리게 된 것이다.

‘이삭이 팰 정도로 다 자란 벼’를 ‘장(長)벼’라 하는데 ‘무엇인가 한꺼번에 사방에서 나타나는 경우’를 비유하여 “처서에 장벼 패듯”이라 이르는 것도 이 무렵의 벼가 얼마나 성장하는가를 잘 보여주는 속담이다. 기실 벼가 본격적으로 자라기 시작하기로는 입추 때부터다. “입추 때는 벼 자라는 소리에 개가 짖는다.”라고 하는 속담은 이를 가리키는 것이다.

늦더위가 제대로 제 존재감을 드러낸 시기가 지났다. 한낮 기온은 30도를 훨씬 상회해도 아침저녁 기온은 이미 한풀 꺾였다. 계절의 순환은 어느덧 맹위를 떨치고 있는 더위를 ‘지난여름’으로 밀어내고 있는 참이다.

 

이 여름은 더위에도 시달렸지만, 아베의 일본 정부가 부리는 몽니와 억지에 온 국민이 잔뜩 뿔이 난 시기였다. 우리 대법원이 일본 기업의 강제징용을 배상하라는 판결에 대한 정치적 불만을 일본은 경제 보복의 방식으로 갚은 것이다. 지극히 ‘왜국(倭國)’다운 대처다.

 

광복 74년, 근원적으로 현재 일본 정부에는 제국주의 시절에 저지른 전쟁과 인류에 관한 범죄에 대한 자의식조차 없다. 요시다 쇼인을 사상적 지주로 섬기는 우익 정치인 아베 신조가 꿈꾸는 것은 ‘전쟁을 할 수 있는 보통 국가’이고, 그걸 추구하는 그의 안중에 식민지에 대한 착취와 억압에 대한 책임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아베와 일본 정부의 패착은 도리어 한국인들을 민족적 정체성을 새롭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의 간단없는 도발이 고단하게 살아가던 사람들의 마음을 한번 다잡게 했다. ‘노 재팬’이라는 구호로 광범위하게 전개되는 불매운동은 사태의 충격을 누그러뜨리면서 다시 전열을 가다듬을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준 것이다.

비록 느리지만 끔찍한 더위를 밀어내면서 가을은 천천히 우리 곁으로 다가오고 있다. 감추어지고 외면당하고 있는 진실과 정의 또한, 이 위대한 계절의 순환과 다르지 않을 터이다. 일본의 도발에 따른 온갖 왜곡과 폄훼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의 의식이 ‘처서에 장벼 패듯’ 드러나면서 우리 민족의 저력을 확인하게 해준 것이다.

 

김춘수 시인의 시 ‘처서 지나고’를 읽는다. 뜨거운 여름의 끝, 선선한 바람 부는 가을의 어귀에 비가 내린다. ‘태산목 커다란 나뭇잎’을 적시던 가랑비는 ‘귀뚜라미 무릎’까지 적셔낸다. 여름과 가을이 교차하는 계절의 순환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길은 쓸쓸하지만 담담하기만 하다. 가을은 그렇게 드러내지 않게 슬그머니 우리에게 곁을 내 주는 것이다.

2019. 8. 22. 낮달

 

[서(序)] 새로 ‘24절기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가을 절기
입추(立秋), 어쨌든 여름은 막바지로 달려가고
백로(白露), 벼가 여물어가는 분기점
추분(秋分), 우렛소리 멈추고 벌레도 숨는다
한로(寒露), 제비는 강남으로, 기러기는 북에서 오는
상강(霜降), 겨울을 재촉하는 된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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