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독립운동기념관 ‘만주 망명 100주년 기념 특별기획전’
인류의 역사가 ‘그의 역사(history)’였다는 걸 중언부언할 필요는 없겠다. 인류의 탄생 이래 세상은 남성들의 것이었고, 그들이 교직해 낸 삶의 누적이 역사였으니까 말이다. 그러면 여성들은 어디에 있었나. 그들도 역사의 도도한 물결 속에 있었다. 단지 그들이 선 곳이 남자들에게만 쏟아지는 빛 저편의 ‘그늘’이었다는 점이 달랐을 뿐이다.
그의 역사에 묻힌 ‘그녀들의 삶과 투쟁’
뜬금없이 ‘인류사’를 들먹이게 된 것은 안동독립운동기념관에서 ‘만주 망명 100주년 기념 특별기획전’(2011.8.12~2012.2.29)을 다녀온 소회 때문이다. 이 특별기획 전시회의 주제는 ‘만주를 품은 안동 여인들! 광복의 꽃이 되다’이다.
안동의 애국지사들이 얼어붙은 압록강의 칼바람을 가로지르며 만주 땅으로 망명의 길을 떠난 것은 경술국치(1910) 이듬해였다. 올 광복절은 예순여섯 돌이었지만, 이 기획전이 ‘만주 망명 100주년’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나라를 잃은 통한의 슬픔과 분노를 가누며 그들이 조국을 떠난 지 어느덧 한 세기가 지난 것이다.
경술년에 나라를 잃자, 이듬해 당시 대한협회 안동지회장이었던 석주 이상룡(1858~1932)과 내앞마을의 백하(白下) 김대락(1845~1914) 서간도로 망명하였다. 인척 50여 가구를 이끌고 망명의 길에 오른 석주는 쉰셋, 만삭의 손부와 손녀를 데리고 나선 백하는 예순여섯의 노인이었다.
이들은 안동을 떠나 추풍령까지는 걸어서, 신의주까지는 기차로 갔다. 압록강을 건너 만주에서는 수레로 이동하는, 멀고 험한 남부여대(男負女戴)의 망명길이었다. 눈보라 날리는 엄동설한, 크고 작은 봇짐을 이고 진 수백의 남녀노유의 행렬은 그 자체로도 망국의 한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것이었으리라.
이후 이들이 안동·영해 방면의 배일 조선인의 이주를 이끌게 되면서 지역 인사들의 망명도 이어졌다. 만주에는 경상도 중심의 세력이 구축되었고 도내로 이주 열기가 전파되면서 1911년 중 이주자는 250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1920년대 말에는 만주 지역의 이주 동포는 2만5000명에 이르렀으니 망명의 세월이 깊어지는 만큼 망국의 한과 설움도 깊어갔으리라.
석주가 동지들과 함께 서로군정서를 설립하고 신흥무관학교와 백서농장을 세운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여기서 독립군 병사로 거듭난 조선의 청년들은 청산리 전투 등 조국광복을 위한 무장투쟁의 주역이 되었다. 이들 유·무명의 독립투사들의 항일 투쟁은 지금껏 기려져 왔다. 그러나 이 전시회가 겨냥하는 것은 그들 독립지사를 뒷바라지했던 아내와 어머니, 여성들이다.
만주 지역 항일 투쟁의 현장 곳곳에는 수많은 여성이 있었다. 그들은 잔혹한 일제와 싸워야 했고, 굶주림과 추위, 각종 전염병과 맞서야 했다. 낯선 땅 만주에서 가족과 조국광복을 위해 인고의 세월을 견뎌낸 이들이야말로 참 어머니이자 광복의 꽃이었다.
- ‘만주 망명 100주년 기념 특별기획전 팸플릿’ 중에서
빛바랜 사진과 기록으로 호명한 ‘그늘 속의 삶’
이번 전시에서 그 삶을 조명하고 기리고자 하는 이는 당연히 여인들이다. 임청각이 낳은 항일투사를 지켜낸 종부 3대(김우락·이중숙·허은), 합니하(哈泥河) 신흥무관학교에 남편 권기일(1886~1920)을 묻은 김성, 남편 배재형이 병사하자 18일 동안의 단식으로 절명한 김씨 부인, 일송 김동삼(1878~1937)의 부인 박순부와 며느리 이해동, 아들 권오헌을 따라나선 김우모 등이다.
특별전이긴 하지만 이 전시회의 한계는 뚜렷하다. 전시의 주인공들은 역사의 빛이 아니라 그 그늘 속에서 자기의 삶이 아니라 가족과 남편의 삶을 살아낸 이들이다. 기록할 공적도 없고, 남긴 묵직한 유물도 없다. 단지 전시회는 그들의 그늘 속의 삶을 몇 장의 빛바랜 사진과 기록으로 호명해 낼 뿐이다.
조촐하게 꾸며진 기획전시실에는 ‘만주 지역 항일 투쟁의 주춧돌이 된 안동 여인들’의 삶을 추적하며, 이들의 만주 망명길과 희생적 삶을 소략하게 반추하고 있다. 인상적인 것은 안동 출신의 독립투사들과 그들 가운데 남편의 선택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인 여인들의 초상이 기왓장에 유화로 그려진 것이었다.
고성이씨 종택인 임청각에선 석주를 비롯해 무려 아홉 분의 독립 운동가가 태어났다. 석주와 함께 간도 망명을 떠났던 당숙 이승화(애족장), 아우인 상동(애족장), 봉희(독립장), 조카로는 상동의 아들인 운형(애족장), 형국(애국장), 봉희의 아들인 광민(독립장), 친아들 준형(애국장), 친손자 병화(독립장)가 그들이다. 무려 4대에 걸친 이바지다.
임청각 종부 3대의 희생과 헌신
말이 아홉이지 일가를 건사해야 할 가장들이 조국을 위해 바친 세월에 서린 고통이 어찌 그들 자신의 것뿐이었을까. 지아비를 위해서, 아들을 위해서 숨죽여 삼켜야 했던 아내와 어머니의 한과 슬픔은 그것이 오롯이 스스로가 감내해야 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남정네들의 그것과는 감히 비길 수 없다. [관련 글 : 임청각 - 석주 일가의 사위·며느리들]
석주의 부인 김우락(1854~1933)은 김대락의 맏누이로 남편과 오빠를 따라 서간도로 망명한 4년 만에 오빠를 잃는다. 남편의 풍찬노숙만큼이나 낯선 땅에서 남편 대신 일가를 건사해야 했던 아내들의 삶도 힘겨운 것이었다. 고난과 곤궁 속에서 그는 어린 손자와 손녀를 잃고, 1932년 남편의 순국을 지켜보아야 했다. [관련 글 : “공맹은 나라 되찾은 뒤 읽어도 늦지 않다”]
2대 며느리인 준형의 아내 이중숙(1875~1944)의 삶도 다르지 않았다. 그에게는 이국땅에서의 간난의 삶은 물론 남편과 시부의 안위를 걱정해야 했고 시모를 모셔야 했다. 이들 고부는 석주의 유골을 안고 귀국길에 오른다. 일제 관헌의 눈을 피해 오른 귀국길도 고통스럽긴 마찬가지였다. 고향으로 돌아온 김우락은 이듬해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해방을 일 년 앞두고 며느리 이중숙도 시모를 따랐다.
3대 며느리 허은(1907~1997)은 구미시 임은동에서 태어났다. 의병장으로 활약하다 순국한 왕산 허위 선생이 그녀의 재종조부다. 1915년 아버지를 따라 만주 영안현으로 망명한 허은은 열여섯 되던 1922년 석주의 손자 이병화와 혼인한다. 그이의 반평생은 시조부와 시부, 그리고 남편의 3대에 걸친 항일 투쟁을 뒷바라지한 삶이었으니 그이가 지은 내방가사 ‘회상’에서 그 일단을 엿볼 수 있다. [관련 글 : 광복 73돌, 허은·이은숙 여사도 마침내 서훈 받다]
이국풍토 견문 없이 십육 세가 되었으니
성혼(成婚) 운운하시다가 안동지(地) 임청각은
동방의 명문이요 세대로 학행도덕(學行道德)
조선의 국록지신 국은이 망극한데
선왕(先王)구(舅) 애국충신 백이숙제 효칙(效則)하셔
배일(排日) 결심 백절불굴 이국(異國) 유락(遊落) 수십여 년
우리 대한 복국(復國) 경영 국내에 뉘 모르리.
- 허은 여사 ‘회상’(회고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중에서
일송 김동삼 일가의 여인들
만주벌의 호랑이로 불리었던 일송 김동삼 선생의 부인 박순부(1882~1950)는 그 남편에 못잖은 기개를 가진 항일투사의 아내로서의 모범을 보인 여인이다.
1911년 아들 형제를 데리고 서간도로 망명한 이래 그녀는 남편을 대신한 가장으로 살았다. 간도에 살면서 그이가 남편을 만난 것은 고작 두 번에 지나지 않았고, 1931년 남편이 일경에 체포되었을 때도 그이는 남편 면회를 가지 않았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이는 이후 남편을 다시 만나지 못했던 듯하다. 평양지방법원에서 10년을 선고받은 남편 일송은 1937년 4월에 “나라 없는 몸, 무덤은 있어 무엇하느냐”는 유언을 남기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기 때문이다. 일송의 유해는 가족이 아니라 평소 그를 존경하던 만해 한용운이 수습하여 화장한 후 유언대로 한강에 뿌렸다고 한다. [관련 글 : ‘남만의 맹호’ 김동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다]
일송의 며느리 이해동(1904~2003)은 김동삼의 제자 도산 토계리 이원일의 딸이다. 부친을 따라 만주로 망명한 이해동은 1921년 일송의 맏아들 김정묵과 혼인했다. 그녀의 삶도 시모인 박순부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녀와 가족들은 북만주를 떠돌며 힘겨운 삶을 이어나갔다.
해방이 되었지만, 이들은 조국에 돌아오지 못했다. 생이별로 남편을 보냈던 박순부는 해방 후에도 귀국하지 못하고 온갖 고초를 겪다가 1950년에 이국땅에서 통한의 삶을 마감했다. 이해동은 시어머니를 망명지에 묻고 1989년 한중 수교 후 아들 김중생과 함께 이국에서의 77년 삶을 마감하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시어머니의 삶을 두고 “혁명가의 부인으로서 손색이 없다.”, 시아버지가 “혁명가로서 국권 회복에 공을 세웠다면 그 속에는 시어머님의 몫도 있다.”고 했다.
김성과 김씨 부인
김성(1885~1958)은 1912년 남편 권기일과 함께 만주 통화현 합니하로 망명했다. 한족회·교육회를 이끌며 항일 투쟁을 펼친 남편은 1920년 봉오동 전투에서 패한 일본군이 그 보복으로 신흥무관학교를 공격할 때 무참하게 살해되었다.
남편을 신흥무관학교 뒷산 ‘깨금다리밭’에 옮겨 묻고 그녀는 남은 가족들을 이끌고 만주를 떠돌며 갖은 고초를 겪어야 했다. 1945년 해방이 되어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그녀 일가족을 반긴 것은 가난뿐이었다. 그녀는 남편이 그토록 원했던 조국 해방, 광복의 과실을 나눠 받지 못한 채 1958년 세상을 떠났다.
김성이 겪은 간난에 비기면 배재형과 혼인하여 일가를 따라 1912년 만주로 망명한 안동 김씨의 삶은 차라리 나았을까.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활약하던 남편이 1919년 병사하자 김씨 부인은 18일 동안의 단식 끝에 절명했다. 한족회에서 그녀의 뜻을 기려 포열장을 추서하였다. 그녀의 죽음에서 읽을 게 고작 ‘열(烈)’밖에 없을까. 매정한 주류 남성의 역사는 그이의 이름조차 남기지 못했다.
아들과 함께한 67살의 모정
김우모(1874~1965)는 1920년대 신간회 안동지회와 안동청년동맹에 참가해 항일 투쟁을 벌인 권오헌의 어머니다. 그녀는 1940년 아들이 만주 유하현 삼원포로 망명하자 67세의 나이로 망명길에 올랐다. 이때 그녀는 ‘눈물 뿌린 이별가’를 지어 고향을 떠나는 이별의 슬픔을 노래했다.
서럽도다. 서럽도다. 망국 백성 서럽도다.
아무리 살려 해도 살 수가 바이 없네.
충군 애국 다 팔아도 먹을 길 바이 없고
효우(孝友)를 다 팔아도 살아날 길 바이 없고
서간도나 북간도로 가는 사람 한량없네.
가자 가자. 나도 가자. 애국하는 사람 따라
가자 가자. 너도 가자 돈 골병 든 사람아
고국을 떠나가니 그 심사 어떠하리.
백발노인 두 노인도 그중에 끼었구나.
저런 막대 던지고 두 손을 서로 잡고
간다 간다. 나는 간다. 그 어디로 가는 길인고.
이국땅 만주에서의 풍찬노숙을 뒷바라지한 여인들이 어찌 이들뿐이겠는가. 단지 이들은 이름을 남긴 남편과 가족에 힘입어 그 삶의 한 자락이 기록되었을 뿐이다. 역사의 그늘에서 지아비를, 아들을 뒷바라지한 여인들의 삶은 조국 해방을 위해 바친 이들의 그것과 같은 무게를 지닌다. 남성 독립 운동가 1만2천 명에 비겨 고작 202명에 불과한 여성 독립 운동가의 나머지 자리에 이들이 있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 지아비와 자식의 선택이었다고 해서 이들의 희생과 간난의 삶을 폄하할 수는 없다. 그 선택의 수동성과 불가피성은 시대의 한계였을 뿐, 그게 여성 자신의 한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점은 김우락이 지은 노래 속에 그 일단을 드러낸다.
슬프다. 내일이야 진몽(眞夢)인가.
이 땅이 어데런고. 아마도 꿈이로다.
중천의 저 기러기 너는 어찌 날아가노.
이 몸이 남자라면 세계 각국 두루 놀아
천하 사업 다 할 것을. 무용(無用) 여자 애닯도다.
- 김우락 ‘간운사(看雲詞)’ 중에서
시대의 삶과 한계가 그녀들의 삶을 그늘 속의 그것으로 한정했다. 정정화나 남자현 같은 여성 독립 운동가들은 그 한계를 뛰어넘은 특별한 선택이었다. ‘무용한 여자’의 애달픔을 노래한 김우락의 노래는 그네들 삶의 ‘유용성’을 새삼 반증해 주는 듯하지 않은가.
시대와 삶의 한계, 여인들의 삶과 희생
여성으로 안동 지방에서 유일하게 건국훈장을 받은 이는 김우락의 여동생 김락(1863~1929)이다. 향산 이만도(1842~1910)의 며느리였던 그이는 의병장이었던 시아버지의 순국을 지켜보았고, 3·1운동 때에는 그 자신이 예안 시위에 참여했다가 수비대에 잡혀 두 눈을 잃기도 했다.
그 자신(애족장)을 포함, 시아버지 이만도(독립장), 남편 이중업(애족장), 아들 이동흠(애족장) 등 3대에 걸쳐 8명이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친가를 포함하면 훈장과 표창 등 위훈을 추서 받은 독립지사가 무려 26명에 이른다.
그이에게는 미치지 못하지만, 김우락을 비롯한 임청각 종부 3대 등 전시회가 조명한 이들은 물론 기억되지 못한 무명의 아내, 며느리들의 희생과 헌신도 기억되어야 한다. 기념관에는 ‘나라 위해 살다 간 안동 독립 운동가 1000인’의 이름과 출신지가 돌벽에 새겨져 있다. 그 가운데 독립 유공 포상자 명단의 끝은 비어 있다. 아직 포상받지 못한 이들을 위해 비워둔 것이다.
포상 여부가 그 삶을 온전히 기린다고 볼 수만은 없다. 그러나 조국을 위해 바친 삶을 기리는 것은 몇 푼의 포상금이 아니라 그 삶을 기억하겠다는 국가공동체의 확인이다. 어쩌면 비워둔 돌벽에 새겨져야 할 이름은 저 역사의 그늘 속에서 올곧게 살다간 여인들, 그 어머니와 그 아내들이 아니었던가. 돌벽의 이름들 위에 꽂힌 무궁화 속살이 핏빛처럼 붉었다.
2011. 8. 17. 낮달
8년이 지났지만, 소개된 ‘독립투사의 아내들’ 가운데 정부의 기림을 받은 이는 두 분뿐이다. 2018년에 석주의 손부이자, 병화의 부인인 허은 여사가 애족장을, 이듬해에는 석주의 부인인 김우락 여사가 애족장을 받은 것이다.
[관련 글 : 광복 73돌, 허은·이은숙 여사도 마침내 서훈받다]
독립 운동가를 뒷바라지한 부인들에게 정부의 기림이 인색한 이유는 무얼까. 이들은 남편을 대신하여 가정을 건사했고, 자식을 기르면서 남편을 뒷바라지하는 등 남편보다 더 힘들게 살았다. 그러나 이들의 이바지는 독립된 활동으로서가 아니라 단지 남편의 보조에 그쳤다는 통념을 벗어나지 못한다.
조명받지 못한 역사에서 지아비를, 아들을 뒷바라지한 여인들의 삶의 무게도 조국 해방을 위해 바친 남정네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나라와 역사의 눈길이 이들에게 온전히 머물러 그 삶이 새롭게 기려지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다.
2019. 8.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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