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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풍경

도라지, 도라지꽃, 도라지 고갯길

by 낮달2018 2019. 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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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지꽃의 계절

▲도라지는 더덕과 함께 널리 알려진 초롱꽃과의 여러해살이풀이다.

요즘 일주일에 서너 번은 아파트 뒷산을 오른다. 시간은 대체로 오전 6시부터 9시 사이다. 좀 빠른 걸음으로 내달으니 숨이 가쁘고, 오르막도 단숨에 오르기 때문에 무릎에 부담을 느끼기도 한다. 그래도 그런 방식을 버리지 않는 것은 그래야 운동 효과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것은 체력 때문에 내 속도를 따라오지 못하는 아내가 따로 평지를 걷는 이유이기도 하다.

 

산길 어귀마다 부지런한 주민들이 일구어 놓은 손바닥만 한 밭뙈기가 흩어져 있다. 거기 얼마 전부터 도라지꽃이 활짝 피었다. 그 하얀빛과 보랏빛의 꽃을 바라보는 것도 산행이 주는 즐거움 중 하나다.

 

그런데 요즘 주변을 둘러보면 곳곳에 도라지꽃이다. 산 아래에 난 길옆, 지난해 출퇴근하던 숲길 주변의 좁은 도로 옆은 말할 것도 없고, 간선 도로변의 놀고 있는 땅에도 보랏빛 도라지꽃이 넘실댄다. 올해만 유난스레 사람들이 도라지 농사를 많이 짓는 것은 아닐 터이다. 예전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던 주변의 도라지가 올해 한가해진 내 눈에 유난히 많이 뜨였을 뿐일 것이다.

▲ 흰색의 꽃이 피는 도라지를 백 도라지라고 부른다.

도라지는 더덕과 함께 널리 알려진 초롱꽃과의 여러해살이풀이다. 산이나 들에서 잘 자라며 한반도를 비롯해 일본 전역, 중국, 동부 시베리아에 서식한다. 꽃은 7~8월에 청 자주색으로 피는데 흰색의 꽃이 피기도 한다. 이를 백 도라지라고 하며, 꽃이 겹으로 피는 것을 겹도라지라고 한다.

 

한방에서 ‘길경(桔梗)’이라 부르는 도라지의 뿌리에는 당질·칼슘·철분이 많고 섬유질이 주성분이다. 그래서 씹는 맛이 특별한데 특히 2, 3년생의 어린뿌리는 아주 연하다. 봄에서 가을에 걸쳐 캐어 먹는데, 날것을 그대로 먹기도 하고 말려서 갈무리해 두었다가 먹기도 한다.

 

식용과 약용으로 쓰이는 도라지

 

또한, 도라지 뿌리에는 인삼의 주요 성분 가운데 하나인 사포닌이 함유되어 있어 약재로 쓰이기도 한다. 도라지의 지질(脂質)은 점성과 독특한 향기가 있으며 불포화지방산보다 포화지방산이 많은 게 특색이다.

 

도라지는 생으로도 익혀서도 먹는다. 생채는 가늘게 찢어서 소금으로 아리고 쓴맛을 중화하였다가 나중에 양념한다. 숙채(熟菜)는 생것을 볶기도 하고, 살짝 데쳐서 볶아내기도 한다. 생채는 아삭한 식감이 좋고 숙채도 비빔밥의 재료로는 빼놓을 수 없는 나물이다.

 

또, 도라지를 쪼개어 쇠고기와 번갈아 꼬치에 꿰어 도라지 산적을 만들기도 하며, 누름적(여러 가지 재료를 양념하여 다 익힌 다음 색을 맞추어 꼬치에 꿴 음식)이나 화양적(각색 재료를 양념하여 익힌 다음 색을 맞추어 꿴 음식)의 재료로도 많이 사용한다. 별미로 더덕처럼 고추장을 묻혀서 구워 먹기도 한다.

 

도라지는 구황식(救荒食)으로도 중요하였다. 도라지 밥은 흉년의 대용식으로, 잘 씻은 다음 충분히 삶아서 주머니에 넣고 물에 담가 발로 밟아주면 쓴맛이 빠지므로 이를 밥에 섞어서 먹었다고 한다. 16세기 중엽의 <구황촬요(救荒撮要)>에 따르면 도라지로 장을 담근다고도 하였다.

 

도라지는 약용으로도 널리 쓰였다. 문헌 기록 중 최초인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을 비롯하여 <동의보감(東醫寶鑑)>에서는 도라지의 약성과 효능을 기록하고 있다.

 

“맛이 맵고 온화하며 독이 약간 있다. 2∼8월에 뿌리를 캐며, 햇볕에 말린 것은 인후통을 잘 다스린다.”
   - <향약집성방>

“성질이 약간 차고, 맛은 맵고 쓰며 약간 독이 있다. 허파·목·코·가슴의 병을 다스리고 벌레의 독을 내린다.”
   - <동의보감>

 

이처럼 일찍부터 먹거리로 약으로 널리 쓰여 온 도라지는 겨레의 생활과 아주 친근한 식물이었다. 도라지에 관한 한국인의 정서는 각지에서 전승되는 ‘도라지타령’에서 잘 드러난다. 그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게 경기 지방의 ‘도라지타령’이다.

 

“도라지 도라지 백도라지
심심산천에 백도라지
한두 뿌리만 캐어도
대광우리에 철철 넘누나
(후렴) 에헤요 에헤요 에헤야
어여라 난다 지화자자 좋다
네가 내 간장 스리살살 다 녹인다.”

▲ 식용이지만, 그 꽃말이 '영원한 사랑'인 도라지는 그 꽃잎이 아름답고 기품이 있다.

우리 고향 말로는 도라지를 ‘도래’라고 했는데 요즘 젊은 사람들은 이 말을 거의 쓰지 않는다. 우리가 시중에서 살 수 있는 ‘깐 도라지’는 대부분 깨끗이 씻고 다듬어져 압축 팩에 담겨 수입된 중국산이다. 다. 무침으로 먹는 도라지는 국내에서 부업으로 하는 부인네들이 찢은 것이다.

 

도라지 꽃말은 ‘영원한 사랑’이다. 관상용이 아니라 주로 식용인 도라지의 꽃말이 왜 뜬금없이 ‘영원한 사랑’인지는 알 수 없다. 보랏빛과 흰빛의 이 꽃이 지닌 기품 때문일까. 나는 도라지꽃만 보면 1970년대에 히트한 가수 김상진(1954~ )의 ‘도라지 고갯길’을 떠올린다.

 

도라지 고갯길

연보라색 도라지꽃
피던 고갯길
사나이 가슴에 사랑을 주고
가버린 정든 님
이별 서러워 이슬비도 하염없이 오는데
첫사랑에 울고 웃던 첫사랑에 울고 웃던
도라지 고갯길

백도라지 꽃잎이
지던 고갯길
사나이 가슴을 그리움 주고
떠나간 천릿길
잊지 못해서 산새들도 구슬프게 우는데
첫사랑에 울고 웃던 첫사랑에 울고 웃던
도라지 고갯길

 

1969년 ‘이정표 없는 거리’로 데뷔해 ‘고향’을 주제로 한 일련의 노래로 유명인 반열에 오른 김상진은 여성적인 음색에다 창법이 남달랐다. 나는 그의 목소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의 웬만한 히트곡은 따라 불렀던 것 같다.

 

70년대 대중가요, 김상진의 ‘도라지 고갯길’

 

유튜브에 올라 있는 ‘도라지 고갯길’을 새로 들으며 가사를 새겨보는데 쓴웃음이 났다. 그땐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이 노래를 불렀던가 본데 노랫말이 너무 심심했기 때문이다. 고갯길을 소재로 한 대중가요로 대표적인 노래가 ‘울고 넘는 박달재’나 ‘비 내리는 고모령’인데 이 노래들에서 ‘고개’는 이별의 공간이다.

 

‘울고 넘는 박달재’에선 우리 님이(천둥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 님아), ‘비 내리는 고모령’에선 화자가 고향을 떠난다.(어머님의 손을 놓고 떠나 올 때엔) ‘도라지 고갯길’에선 떠나는 주체가 다소 모호해 보이지만 ‘사랑을 주고 가버린’ ‘정든 님’으로 봐야 할 듯하다.

 

연보라색 도라지꽃 피던 고갯길에서 임은 떠나고 내 첫사랑은 끝났다는 게 이 노래의 내용이다. 하긴 도라지꽃이 이별의 배경이 되는 것 말고 노래의 주제와 관련짓는 게 쉽지는 않겠다. 새삼 들여다보니 ‘사나이 가슴’과 ‘정든 님’, ‘하염없이 오는’ 이슬비, ‘구슬프게 우는’ 산새 등 신파조의 낱말들이 진부하기만 하다.

 

어떤 노래는 노랫말로 특별히 기억되곤 하지만 또 어떤 노래는 단지 한 시절의 기억으로만 남는가 보다. 인터넷을 검색해 봐도 가수 김상진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다. 1949년생이라고도 하고 1952년생이라고도 하는데 어쨌든 그는 회갑을 훌쩍 넘겼다.

 

3년 전, 경상북도 어느 소읍의 공설시장에서 베풀어진 축제에 초대가수로 와서 노래를 불렀다는 동영상 하나가 그에 관한 마지막 소식이다. 그는 지금 어디서 ‘고향이 좋아’ 같은 옛 노래를 부르고 있을까.

 

김상진의 '도라지 고갯길'  듣기

 

2016. 7. 17.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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