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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교단(1984~2016)에서

띠동갑 내 ‘첫사랑’이 다녀갔다

by 낮달2018 2019. 5.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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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동갑 내 첫 제자들과 만나다

▲ 아이들이 전해 준 선물. 나는 아이들의 마음을 자랑으로 간직하겠다고 말했다.

지난 월요일에 띠동갑인 내 첫 제자들이 다녀갔다. 그간 내왕하던 두 아이를 출판기념 모임에 초대했더니 스승의 날을 앞두고 모두 넷이 겸사겸사 구미를 찾은 것이다. 부산과 경주, 밀양과 대구에서 각각 달려온 이들은 올에 쉰둘, 나와 열두 살 차 띠동갑이다.

 

스물아홉에 만난 열일곱 여고생

 

스물아홉, 뒤늦게 대학을 졸업하고 부임한 경주의 어느 시골 여학교에서 나는 이들, 열일곱 살짜리 여학생을 만났다. 담임을 맡아 졸업할 때까지 내리 3년을 가르쳤다. 이들을 내 첫사랑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관련 글 : 좋은 이웃, 혹은 제자들(1)]

 

나는 꽤 오랫동안 내게 배운 아이들을 제자라고 부르는 것을 삼갔다. 글쎄, “‘스승은 없고 선생, ‘제자는 없고 학생만 있다는 세평을 다분히 의식해서였을까. 아마 그 시절엔 내가 별로 스승답지 못하다는 자의식이 컸던 것 같고, 그런 이름에 대한 결벽이 있었다.

 

6년을 채우지 못하고 부득이하게 학교를 떠나게 되면서 나는 예의 결벽을 버렸다. 내 자의식이란 게 고작 자신을 남과 구별 지우려는 일종의 선민의식이라는 걸, 그런다고 해서 내가 여느 교사들과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으면서였다.

 

그러나 그런 생각의 변화와 무관하게 내게서 국어를 배운 아이들 모두가 온전히 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그들을 가르쳤다고 해서 내가 온전히 그들의 스승이 되는 것도 물론 아니다.

 

내게서 배웠지만 나를 교사로 여긴 아이들에겐 나는 그냥 선생일 뿐이고, 내가 가르쳤지만 내가 따로 기억하지 못하는 아이들 역시 그냥 학생에 그칠 것이다. 일정한 시기와 공간에서 교사와 학생으로서 일상을 나눌 때야 원하든 원하지 않든 사제 관계가 이루어지지만, 졸업이나 전근으로 헤어지고 나면 그 관계는 희미해지고 마침내 끊어지고 마는 것이다.

 

▲ 아이들은 꽃다발을 아내에게 안겨 주었다.

세월이 흘렀는데도 내게 와서 스스로 제자를 칭하는 아이들이라면 내가 그를 기억하든 하지 못하든 내게 온전히 제자가 될 수밖에 없다. 세월이 흘러 그가 설사 나를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아이 역시 나의 온전한 제자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나는 스승의 몫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결국 스승제자는 상대가 그 역할을 받아들일 때 이루어지는 셈이다.

 

졸업 후 32년, 우리는 함께 나이들어 간다

 

이 아이들이 졸업한 게 1987년이니 그간 32년이 흘렀다. 32년은 내가 교단을 떠나 연금생활자가 되고 아이들이 장성한 아이를 둔 어머니가 된 시간, 각각의 삶에 드리운 곡절은 생략해도 좋겠다. 문자 메시지로, 모바일 메신저를 통해서도 안부를 나눌 수 있는 세상, 우리의 관계는 그렇게 이어져 왔다.

 

네 친구 가운데, 둘은 지지난해에, 또 한 친구는 해직 시절에 나를 찾아와 만났고, 마지막 친구는 졸업 후 처음이었다. 아내와 함께 금오산 아래의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기다리는데 일렬로 들어서는 아이들을 처음에는 못 알아볼 뻔했다. 아이들의 얼굴이 낯설어서가 아니라, 생각보다 훨씬 젊고 아름다워서였다.

 

▲ 자투리 꽃은 작은 병에 꽂았다.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나는 서명한 책을 나누어주었다. 미리 책을 산 아이들은 그 책에다 따로 서명을 받아 넣었다. 아이들이 가져온 선물도 받았다. 교외의 전원주택에 살면서 천연염색을 배우고 있는 아이는 염색한 인견 이불과 손수건 등을, 여전히 예전처럼 활달한 한 아이는 보이차를 선물해 주었다. 그는 또 제가 뜯은 쑥으로 떡을 해 왔다. 꽃다발은 아내에게 주었다.

 

식사하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리는 금오산 어귀의 채미정(採薇亭)으로 가서 야은 길재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로 끝나는 그의 회고가(懷古歌)도 아이들에게 가르친 듯했다.

 

잠깐 나는 내 교단생활을 회고하면서 아이들 앞에 저지른 과오와 오류는 얼마였겠는가,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개인적 분노를 다스리지 못해 내뱉은 모멸과 증오의 언어들은 또 얼마였겠으며 관심의 과다가 남겼던 아이들의 상처는 또 얼마나 되었겠냐는 얘기를 했다.

 

좋은 교사가 되겠다고 했지만, 나는 평균을 간신히 넘는 교사에 불과했다. 민주주의를 말하면서도 권위적이었고, 아이들을 기다려주지 못했고, 무엇보다도 독선이 심했다, 고도 이야기했다. 그 시절을 돌이켜보면서 한 아이가 스님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금오산 상가의 찻집에서 커피를 마시며 우리는 이런저런 살아가는 얘기를 나누었다. 사제 사이지만, 지금은 같이 나이 들어가는 이웃이 아닌가 말이다.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아이들은 예의를 잃지 않았다. 눈빛 하나에도 조심스러워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나는 이 아이들을 가르쳤던 행운을 새삼 생각했다.

▲ 지난 13일, 대구와 경주, 밀양과 부산에 사는 내 30년도 전의 첫 제자들이 구미를 다녀갔다. 채미정 앞에서 사진 한 장을 찍었다.

네 시가 넘어 승용차로 온 아이들과 먼저 작별하고, 기차로 온 아이들을 역에 바래다주고 우리는 헤어졌다. 나는 집에 와서 아이들에게 문자를 보냈다.

 

“고맙다. 사제 간에 있을 수 있다고는 하지만 작은 마음이라도 내고 전하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니. 오래 기억하고 마음의 자랑으로 삼으마.”

 

아이들도 저마다 만나 뵈어서 좋았다고, 그때 그 모습으로 계셔 주셔서 감사하다고, 늘 생각나는 선생님이라고 저마다의 말투로 인사를 전해왔다. 그 마음의 결이 전해져 와 마음이 따뜻해졌다.

 

어디서든 열심히 살아갈 일이다…

 

한 아이는 내 앞에만 오면 여고생이 된 기분이라고, 내 책을 읽으면서 내가 하는 강의처럼 그 내용을 듣는다고 이야기했다. 문득 나는 직장생활을 했을 뿐이지만, 아이들은 매우 예민한 시기를 교사에게서 적지 않은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새삼 깨우쳤다.

 

이틀 후가 스승의 날이었다. 참 민망하고, 쑥스러운 날이었는데, 퇴직하고서는 그런 거북한 순간에 맞닥뜨리지 않아서 좋았다. 아이들이 새로 인사를 전해 왔고, 햇병아리 교사가 된 아이에게서도 전화를 받았다. , 저녁에 방송고의 나이 많은 제자들과 만나서 또 회포를 풀었다.

 

나는 농반진반으로 그들에게 이제 이 관계를 끝내자고 말했고, 그들은 이를 완강히 거부했다. 글쎄, 어디에 살든 열심히 살아가면 되는 일 아닌가. 안부를 전하고 만나야만 관계가 이어지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자신의 자리에서 열심히 사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 더는 마음을 쓰지 말라는 얘기였.

 

 

2019. 5. 17.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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