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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교단(1984~2016)에서

분필, 혹은 ‘미련과 애착’

by 낮달2018 2019. 8.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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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날 때가 되어서일까, ‘분필’이 자꾸 눈에 밟힌다

▲ 철제 분필통을 쓰다가 요즘은 문구점에서 파는 종이상자를 분필통으로 쓰고 있다.

‘분필과 칠판’은 교직을 상징적으로 이르는 표현 가운데 하나다. ‘분필(粉筆)’은 ‘가루 붓’의 뜻으로 달리는 ‘흰 먹’이라는 뜻의 ‘백묵(白墨)’으로 쓰기도 하는, 교사가 ‘판서(板書)’하는 데 쓰는 필기구다. 칠판(漆板)은 ‘검정이나 초록색 따위의 칠을 하여 그 위에 분필로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게 만든 판’인데 ‘흑판(黑板)’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실제 학교 현장에서는 초록색 칠판을 주로 쓴다.

 

분필의 원료는 활석이다. 석고 비슷한 것인데 예전에는 소석고(燒石膏) 제 분필을 쓰다가 요즘은 탄산칼륨 제를 주로 쓴다. 소석고로 만든 분필은 가볍지만, 가루가 많이 날리는 흠이 있지만, 탄산칼륨 제 분필은 조금 무겁지만 가루가 덜 날리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교단, 혹은 ‘분필장사’

 

소석고 제 분필을 쓰던 시절의 이야기다. 교직에 몸담고 있음이 ‘백묵 가루 마시며 사는’ 일이라는 좀 씁쓸한 인식들은 자주적 교원단체의 결성을 전후해 김민기의 노래를 개사한 ‘늙은 교사의 노래’를 통해서 널리 알려졌다. 30대 초반의 한창때였지만, 그 노래는 우리가 수십 년 세월을 교단에서 보낸 듯한 비장감에 빠지게 만드는 꽤 슬픈 노래였다.

 

나 태어난 이 강산에 교사가 되어
꽃 피고 눈 내리기 어언 삼십 년
(……)
아~ 다시 못 올 흘러간 내 청춘
분필 가루에 실려 간
꽃다운 이내 청춘

 

날리는 분필 가루도 문제지만 분필을 잡고 한 시간 동안 판서를 하는 과정에 손에 묻는 분필 가루도 문제였다. 요즘이야 교무실마다 개수대와 온수가 기본으로 갖추어져 있으니 시간마다 손을 씻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30여 년 전 교직에 처음 나가니 이 뒤처리가 예삿일이 아니었다.

 

좀 걸게 침을 튀겨가며 한 시간, 열강하는 과정에 지우개 대신 손을 쓰기도 하면서 수업을 마치면 손바닥이 허옇게 된다. 아니 씻을 수 없는 상황이라는 얘기다. 한겨울이면 건물 바깥에 있는 수돗가에 가서 손을 씻어야 하는 것 성가실 뿐 아니라 꽤 괴로운 일이다. 이는 교직을 ‘백묵 장사’라 비하하는 이유의 일부이기도 하다.

 

▲ 갖가지 분필홀더들

그래서였던가. 어느 날 출근하니 책상 위에 깔끔하게 포장된 물건이 하나 놓여 있었다. 포장을 뜯으니 분필 한 통이다. 통 안에는 일일이 색종이로 감싼 분필이 가지런히 누워 있었다. 종이를 조금씩 벗겨가며 쓰게 만든 분필이었다. 얼마나 쓸모 있을지 몰랐지만, 여학생의 따뜻한 마음이 그대로 전해져 오는 듯했다.

 

그 무렵엔 아이들이 그런 형식으로 교사들에 대한 호감을 표시하는 일이 흔했다. 교사치고 그런 분필통을 받아 보지 않은 사람은 없었을 것이지만, 요즘은 사라진 풍속이다. 그러나 정작 그 분필을 교사들이 즐겨 쓴 것 같지는 않다. 나도 그랬지만 쓰다 보면 종이를 벗겨내는 일이 그리 수월치 않았기 때문이다.

 

‘분필홀더’라 해서 금속이나 플라스틱으로 만든 분필 끼우는 기구가 언제쯤 나온 것인지는 모르겠다. 내가 처음으로 그걸 쓰게 된 것은 서른아홉, 해직된 지 5년 만에 복직한 한 시골 학교에서였다. 양쪽으로 열리게 된 둥근 원통 안 바닥에 용수철이 달려있어서 밑부분을 누르면 원통이 열리면서 용수철에 밀려 분필이 조금씩 위로 올라오는 구조였다.

 

일단 손에 분필 가루를 묻히지 않아도 되어서 꽤 오랫동안 그걸 썼다. 나중에 이 홀더는 좀 더 편리한 형태로 진화했다. 마치 샤프 연필처럼 머리 부분을 누르면 분필이 조금씩 튀어나오는 구조로 바뀐 것이다. 홀더는 분필보다 크므로 기존의 분필통에 넣어 다니는 게 무리다. 처음엔 문구점에서 파는 소형 철제 상자를 이용하다가 나중에는 아이들 선물 따위를 넣는 종이상자를 분필통으로 썼다.

 

탄산 분필이 나오면서 분필 가루가 덜 날리게 되어 한결 편리해졌다. 그러나 분필의 굵기가 달라지면서 분필이 홀더 안에서 노는(움직이는) 문제가 불거졌다. 홀더의 구경보다 가늘어진 분필을 홀더가 제대로 고정해 주지 못하면서 홀더는 가장 요긴한 기능을 잃어버린 것이다.

 

두어 해 만에 가는 구경의 새 홀더가 나왔던 것 같다. 그 새 홀더로 얼마간은 썼는데 여전히 말끔히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었다. 분필의 구경이 제품에 따라 들쑥날쑥한 것이다. 공산품인데 어떻게 규격이 들쑥날쑥한지 모를 일이었다. 굵기가 가는 놈을 쓸 때는 홀더를 힘주어 잡아야 밀리지 않는데 이도 저도 마땅찮으면 나는 아예 초임 시절의 맨 분필로 돌아가곤 했다.

 

탄산 분필과 분필홀더

 

다행스럽게도 전임 학교에서의 마지막 두 해는 탄산 분필이 더 이상 쓰이지 않았다. 이른바 ‘위생 물칠판’이 들어온 것이다. ‘워터 초크’라는 분필로 쓰는 이 칠판은 일반 지우개를 사용하지 않고, 물에 적셔서 닦는 지우개를 쓴다. 당연히 분필 가루가 거의 생기지 않는 구조다. 물기가 느껴지는 분필은 아예 전용 홀더에 끼워 쓰면 되었다.

 

학교를 옮기면서 다시 탄산 분필로 돌아왔다. 맨 분필을 쓰다가 아무래도 불편해서 전에 쓰던 철제 홀더를 꺼내서 쓰는데 여전히 들쑥날쑥한 규격 때문에 마땅하지가 않았다. 맨손으로 잡고 쓰면 글씨 쓰기가 훨씬 수월한 대신에 분필이 낭비된다. 특히 습기 찬 날이 그렇다. 습기가 분필의 강도를 떨어뜨리는 것이다.

 

까짓것, 이제 교단에 설 날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대충 버티자고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불편하기가 이를 데 없다. 결국, 묵은 짐 꾸러미에서 예전에 쓰던 홀더 몇 개를 끄집어냈다. 얼마간은 생광스럽게 썼는데 어느 날부터 다시 굵기가 다시 말썽이다.

 

어쩌나 하다가 혹시 싶어서 인터넷 검색을 했더니 고가의 분필홀더가 눈에 띄었다. 한 개 만 원이 넘으니 값도 값이지만 이놈은 외국산이다. 분필홀더조차 외국산 제품을 사 써야 한다니 좀 그랬다. 어떨까 싶어 주문했더니 이튿날 벼락같이 물건이 왔다.

 

체코에서 만든 이 금속제 홀더는 묵직하다. 그 양감이 일단 마음에 들었다. 검정빛 몸통도 양 끝의 스테인리스강도 고급스러웠다. 가끔 강조할 때 쓰는 노란 분필(흰 분필보다 더 굵고 짧은 놈이다.)을 끼워 보았는데 이놈도 훌륭히 붙잡아 준다.

 

정말 9mm에서 10mm에 이르는 다양한 굵기의 분필을 가리지 않고 고정해 주는 악력(握力)은 최고였다. 나는 좀 흥분했던 모양이다. 망설이지 않고 바로 한 개를 더 주문했다. 살 때마다 물어야 하는 배송료 따위가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고 나니 새삼 이 물건의 기품이 한눈에 잡혔다.

▲ 이 철제 분필홀더는 9mm에서 10mm에 이르는 다양한 굵기의 분필을 잡아준다.

“이렇게 쓸 만한 물건이 있었던 걸 모르고 한세월 다 보냈네!”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이제라도 쓰게 되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수업하면서 잠깐 아이들과 이 홀더 이야기를 했다. 본 적 있느냐니까 중학교 때 쓰는 선생님이 많았노라고 한다. 그런데 그걸 난 왜 몰랐지? 이렇게 좋은 물건이 있는 줄 모르고 산 시간이 원통하구나. 그나저나 이제 이걸 쓸 날도 그리 많지 않네……. 농조로 중얼거리다가 그런 이야기도 덧붙였다.

 

“떠날 때는 이걸 기념으로 갖고 떠날까 한다. 교단에서 보낸 세월, 기념할 수 있는 게 뭐 있니? 제자를 남긴다는 얘기는 틀린 얘기는 아니지만, 사람은 사람이지 물건이 될 수 없는 게고. 마지막 시간을 함께한 이놈이 그나마 기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으니 말이야.”

“난 죽으면 화장해 달라고 했는데, 유골을 뿌릴 산등성이 어디에 이놈도 묻어달라면 어떨까 싶기도 하네.”

 

순전히 농담이었다. 아닌 밤중에 ‘유언’까지 들먹인 것도 너스레였다. 그런데 애들은 교사의 너스레가 좀 안쓰러웠던 걸까. 싱거운 소리 잘하는 녀석 하나가 좀 안 됐다는 듯 넌지시 그렇게 말했다.

 

“이참에 학교에 좀 더 남아 계시지요.”

 

글쎄, 아이야 그냥 인사치레로 한 말이겠다. 그런데 그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기분이 묘해지는 거였다. 정말 그래 봐? 분필홀더 때문에 퇴직의 결심을 바꾸었다면, 손에 살갑게 붙는 분필홀더에 미련이 남아서 작파하려던 일을 미루었다고 하면 자칫 코미디가 될 수도 있겠다.

 

사소한 것에 대한 애착, 미련일까, 감상일까

▲ 2008년, 여학교에서 근무할 때, 꽃 몇 포기를 길렀다. 이 제라늄은 한번씩 교무실 밖 베란다에서 햇볕이 쪼이곤 했다.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로 돌아와 분필통 뚜껑을 열고 거기 얌전히 담긴 녀석을 바라보았다. 손바닥에 올려놓고 마치 내 삶의 중량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 무게를 가늠해 보기도 했다. 매끄러운 금속 면의 서늘한 감촉에 나는 무심히 그간 달려온 스물여덟 해의 시간을 아련하게 떠올렸다.

 

몇 해 전에 결심하던 순간부터 마음은 이미 떠나기 시작했던 듯싶다. 아이들과 서로 다른 눈높이에 따른 부조화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지체(遲滯)를 굳이 이야기할 것도 없다. 떠날 때가 되었다는 자각도 그랬지만 떠나고 싶다는 욕구가 너무 강했기 때문이다.

 

올해 들어 유난히 힘이 드는 이유를 나는 ‘정을 떼려고 그러는 모양’이라고 우정 생각하고 있었다. 그럴 까닭이 별로 없는데도 이래저래 모든 게 불편하고 마땅찮았다. 사소한 일들도 성가시고, 매사가 막연하게만 느껴질 때가 많았다.

 

1학기를 마치면서 잠깐 위기를 느꼈다. 어차피 1년은 더 머물러야 한다. 이래서는 힘만 더 들 뿐이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2학기가 시작되면서 몸을 한번 추스르는 시점, 찬 바람이 불면서 좀 차분해져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와중에 이 분필홀더를 만난 것이다.

 

그러면 이 물건에 대한 ‘뜬금없는’ 애착은 도대체 무언가. 막상 떠나겠다니까 새삼 미련이 새록새록 돋아나는 것인가. 아니면 철이 바뀌면서 빠진 공연한 감상일까. 대수롭지 않게 잊고 있다가도 분필통을 열면 가지런히 든 녀석을 바라보며 나는 시방 조금 심란해지고 있다.

 

 

2012. 9. 4. 낮달

 

 

그 시절의 댓글들

해를그리며 2012/09/05 15:20
분필을 보니 바로 생각 나는 것은 학교 다닐 때 선생님들이 칠판에 글을 쓰다보면 가끔 찌익~~~ 하고 날카롭게 긁히는 소리가 나잖아요. 그 소리를 들으면 온 몸에 털이 곤두서더라고요. 소름도 돋고. 가끔 어떤 선생님은 일부러 그런 소리를 낼 때도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비몽사몽할 때였나... 분필과 칠판을 보니 그 날카로운 소리가 떠오르네요.

그렇게 손에 하얀 가루를 묻히며 강의를 하던 때도 지나고 보면 한 때로 느껴지시겠지요?
그 동안 수고 많이 하신 것이지요. ^^

낮달 2012/09/07 09:42
그뿐입니까. 더러는 분필을 흉기(?)처럼 쓰는, 아이들을 향해 분필탄을 마구 날리는 교사도 있지요. 다행히 나는 그런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만.^^

가을이 오니까 공연히 심란해진 것 같습니다. 이리저리 스스로를 돌이켜보기도 하면서요...

이야기꾼 2012/09/05 21:28
저는 종이 테이프를 감아서 쓰고 있는데 하나 살까봐요.
수학시간에 워낙 많이 써서요.
선생님 말씀처럼 가지고 있는 분필집게가 분필 두께에 맞지 않습니다.
그나저나 안타깝습니다.
선생님처럼 좋은 분이 그깟 나이때문에 그만두셔야 한다는 것이요.

낮달 2012/09/07 09:46
강력추천합니다!
약간 묵직하고 값이 꽤 센 걸 빼면 나무랄 데 없는 제품입니다. 요즘은 덕분에 아주 유유자적하게 판서를 하곤 합니다.

학교를 떠나겠다고 마음 먹은 게 꽤 됩니다. 그러나 내년은 꽉 채울 작정이니 떠나면 후내년 2월이 되겠지요. 그것도 승인이 나야 하고 중간에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유보할 수도 있으니 지금은 아무것도 결정된 것이 없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나이 때문에 떠나는 것은 아니고, 정직하게 말하면 ‘지겹고 싫어져서’ 입니다. 떠날 사람은 떠나는 게 자연스럽지요.^^ 고맙습니다.

youngchippy 2012/09/05 21:30
그 분필홀더에 마음이 뺏겨 더 머무신다해도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겠다 공감이 가는 걸요. ㅎ...때로는 아주 사소하고, 남들 눈엔 거슬리지도 않는 것들에 온 마음을 빼앗기기도 하지요. 분명 무엇인가 마음을 다쏟지 못한 어떤 부분이 있는 것이지요. 심란하기 보다는 흥미를 갖고 따라가보면 어떨런지요...일상의 지리멸렬함 속에도 감춰진 보석같은 어떤 것이 있는 법이니 말입니다. ^^

낮달 2012/09/07 09:48
그 공감을 아주 따뜻하게 받아들입니다. 글쎄, 아무것도 아닌데도 그게 마음에 밟히고 하는 게 어디 우리네 인생에 한둘이겠습니까. ^^
심상한 일상 속의 ‘보석’까지는 아니라도 그런 삶의 편린들이 생애의 위로가 되기도 하지요.

소녀1 2012/10/03 17:30
선생님 ^^ 안녕하세요. 저 다영이에요.
또 정말 오랜만에 뵙네요.
선생님들에겐 분필이 어쩔 수 없이 다뤄야만 하는 조금은 골치아픈 것 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어요. ^^ 하지만 학생입장에서 (다른 친구들은 어떨지 모르지만) 화이트보드나 전자칠판보다는 평범한 보통의 녹색칠판이 더 정감가고 집중도 되었던거 같아요 ^_^
선생님이 판서하시다가 분필 든 손을 머리 위에 올려 두기도 하시고 허리에 놓기도 하시며 열심히 수업해 주시는 모습을 쉬는시간이 되면 친구들하고 흉내내기도 했었는데... ^^ 옛날 기억이 새록새록 나요 ^^
아무쪼록 날이 많이 추워졌는데, 건강 조심하시고 2학기도 열강!^ㅠ^ 하세요!!

낮달 2012/10/04 11:38
그래 오랜만이구나, 반갑다. 다영아.
이 분필 장사도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것 같구나.
내가 분필 든 손을 머리 위에 올려두었다고? 기억에 없는데 너희들 기억이 그렇다면 그랬겠지...
어느새 너희도 어른이 되었구나. 세월은 내게만 가는 게 아니라는 걸 새삼 확인한다.
늘 건강하고, 뜻한 바대로 열심히 살아가거라.

하대환 2016/02/27 11:17
분필을 검색하다 우연히 들어와 좋은 글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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