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교단(1984~2016)에서

철도, 기차, 역사

by 낮달2018 2019. 7. 26.
728x90

최남선의 ‘경부 철도 노래’를 가르치며

▲  철도와 기차는 우리의 현대사를 증언해 준다.  중앙선 희방사역 부근. 2009년 가을

며칠 전부터 개편된 <문학> 교과서로 ‘경부철도 노래’를 가르치고 있다. 1908년 최남선(1890~1957)이 신문관(新文館)에서 단행본으로 펴낸 장편 기행체 창가(唱歌)다. 서양 악곡인 스코틀랜드 민요 ‘밀밭에서(Coming through the Rye)’ 곡조를 붙인 총 67절로 된 7·5조 창가의 효시가 된 이 노래는 당시 일본에서 유행했던 ‘철도가’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최남선의 장편 창가 <경부 철도 노래>를 가르치며

노래하기에 알맞은 길이인 일반 창가에 비교해 67절이나 되는 장편의 이 노래는 ‘철도’라는 신문명의 도구가 지닌 이점을 대중에게 널리 알리는 동시에 ‘문명개화의 시대적 필연성’을 강조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창작된 것이었다.

 

노래는 경부선의 기점인 남대문 정거장에서 종착역인 부산까지 연변의 여러 역을 차례로 열거하면서 거기 곁들여 풍물·인정·사실들을 서술해나가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노래의 창작 목적은 다른 창가나 신체시와 마찬가지로 국민의 교도와 계몽이었다. 책 끝에 저자가 밝힌 대로 ‘우리나라 남반편[남반구(南半區)]의 지리 지식을 주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작품에 두드러진 것은 ‘철도의 개통’으로 상징되는 ‘서구문화의 충격’이다. 교과서에 실린 서두 2절은 각각 기차의 외부 모습과 내부 풍경을 노래하고 있다. ‘우렁찬 기적소리’와 ‘바람’ 같은 형세로 드러나는 기차의 위용은 서구 문물의 위력을 대중에게 각인시키는 데 과부족이 없다.

 

또 노소는 물론, 내외국인과 친소의 구분도 없이 섞여 앉은 기차 안의 새로운 풍경은 평등한 '신문명'과 함께 이른바 '사해동포주의'를 떠올리게도 한다. 이 풍경이 절로 ‘별세계’를 이루었다는 진술에서도 개화에 대한 긍정적 시선은 짙게 드러난다.

▲ <경부 철도 노래>(1908). 각주와 그림 등에서 보듯 아이들의 지리 교육에도 신경을 썼다.

개화와 문명 일방 찬양, 혹은 민족의식

 

4·4조의 율조를 깨뜨리고 7·5조라는 새로운 형식을 선택한 노래는 개화를 표상하는 기차와 철도에 대한 찬양을 통해 현대의 신문명과 신문물에 대한 열망과 경도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작가 최남선도 이 창가를 통해서 개화와 신문명에 어두운 민족을 계몽하고 싶어 했던 듯하다.

 

그러나 경부철도가 일본에 의해 부설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환기해 주면서 '철도를 무작정 찬양'하는 데 문제는 없겠는가고 물었더니 아이들이 그제야 뭔가가 짚이는 듯 눈을 크게 뜬다. 학습활동에 들어가니 마침맞게 경부 철도 부설과 관련한 '역사적 사실'이 제시되어 있다. 요즘 교과서의 수준이 이 정도다.

 

대륙 침략을 꾀한 일본은 1904년 러일전쟁 발발 전부터 군사 수송을 위한 경부 철도 긴급 부설을 결정했다. 실제로 경부 철도는 조선 내의 교통이나 경제보다는 중국을 거쳐 유럽에 이르는 대륙 철도의 간선 역할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그 결과 가능한 한 최단 거리로 선로가 획정된 것이다. 당시 시각 표에 따르면 오전 9시에 남대문 정거장에서 출발한 기차는 오후 8시 15분에 부산의 초량역에 도착, 총 11시간 15분이 소요되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당시 사람들에게는 매우 경이적이었다.

▲ 경부선 철도 개통식(1905). 러일전쟁으로 공기가 단축되었다. ⓒ <위키디피아>

철도의 부설이 일제의 대륙 침략을 위한 발판으로 삼기 위해서였다는 것, 근대화의 주체가 우리가 아닌 일본이었다는 점에서 기차는 일제의 매우 효율적인 침략 도구였다. 또한, 일제가 조선에서 수탈한 물자를 반출하는 데에도 철도는 매우 긴요한 경로였다.

 

경인선 부설에 이어 일본은 대한제국의 철도망을 장악하고자 한반도의 2대 간선축인 ‘서울-부산’과 ‘서울-신의주’를 잇는 철도 부설권을 얻는데 골몰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1898년 부설권을 획득한 일본은 1901년 경부철도주식회사를 세운 뒤 공사에 들어갔다. 1904년 발발한 러일전쟁이 완공을 촉진하여 경부 철도는 이듬해 전선을 개통하였다. [관련 글 : 118년 전, 영등포에서 ‘경부철도’ 기공식 열리다]

 

교사 지도서는 작가가 철도 부설로 인한 문명의 개화를 동경하고 찬양한 것은 일제에 의해 이루어진 근대화를 긍정적으로 수용한 것이므로 ‘민족의식의 결여’로 비판할 수 있다고 제시한다. 물론이다. 아이들도 머리를 끄덕인다.

 

1890년생인 육당이 이 노래를 펴낸 것은 1908년, 그는 열여덟 살이었다. 1905년에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이미 반식민지가 되어 있었던 당대 현실을 인식하기엔 그가 너무 어렸던 것일까. 경부 철도 노래엔 문명과 개화에 대한 찬양만이 어지럽다.

 

‘불을 입에 문 철마’ 기차

 

19세기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 개척에서 기차는 그 첨병(尖兵)이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제국주의는 먼저 철길을 닦고 기차를 운행하여 식민지의 자원을 효과적으로 수탈했다. 그리고 철도는 또 다른 식민지를 개척하는 경로로도 요긴하게 이용되었으니 말이다.

 

20세기 벽두, 여전히 전근대의 삶을 살고 있던 한국인들에게 철도와 기차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일종의 공포, 일종의 외경은 아니었을까. 거대한 쇳덩어리가 굉음을 지르며 달려오는 모습 앞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속한 세계가 마치 허구인 듯한 혼란에 빠지지는 않았을까.

 

1960년대 후반에 나온 이동하의 장편소설 <우울한 귀향>은 경부선의 조그마한 정거장, 삼성(三省)역에 내린 주인공의 귀향을 중심으로 젊은이들의 방황과 좌절을 그린 소설이다. 소설 모두에 나오는 경부선 철도 부설 이야기가 아주 인상 깊었다.

 

……마을의 유일한 진사 어르신네가 병자수호조규 이래 그의 사랑에 칩거한 채 두문불출을 해다. 목침을 고이고 사시장철 드러누워서 내방객은 일체 사절했다. 음주·끽연은 물론 조석도 잘 드시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살았다. (……)

그런 진사 어른이 어느 날은 새벽같이 아들을 찾았다. 그의 아들이 황급히 옷을 주워 입고 사랑으로 달려갔을 때 그는 이미 흰 두루마기에 갓을 단정히 차려 쓰고 문 앞에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아들을 보자 아무 말도 않고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 밖으로 허청허청 걸어 나갔다. 아들은 묵묵히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이 동구의 느티나무 아래에 이르렀을 때 마을 앞 들판은 안개가 자욱이 서려 있었다. 남녘 하늘은 아직도 창백한 채로였다. 진사 어른은 그것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서 있었다. 백발의 노안에 이상한 빛이 돌면서 파란 안광이 번뜩였다.

그것이 곧 희미하게 꺼져 드는 것 같더니 입술이 푸들푸들 떨리면서 목이 꺽 멘 듯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저 산발치로, 얘야, 저 산발치로 불을 입에 문 철마가 달려오는구나……. 그리고는 고개를 뚝 떨어뜨렸다. 몸이 썩은 나뭇등걸처럼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아들이 얼른 그 몸을 받아 안았다.

그날로 그 진사 어른은 운명했다고 하며, 그로부터 또 오랜 세월 뒤에 바로 그 산발치에서 경부선 부설 공사가 벌어졌다고들 한다.

      -이동하 장편소설 <우울한 귀향> 중에서

 

철도, 기차와 함께 한 한국 현대사

 

기차를 ‘쇠말[철마(鐵馬)]이라 부를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게 말보다 수백, 수천 배의 짐을 실어 나를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후, 철마는 숱한 사람과 짐을 싣고 달렸고, 철길은 이른바 국가의 대동맥으로 그 구실을 다했다.

 

일제가 물러가고 해방이 찾아왔지만, 분단과 전쟁으로 남북의 철길이 막혀 버렸다. 1906년, 경부선에 뒤이어 부설된 경의선은 한국전쟁과 함께 끊어진 것이다. 그 녹슨 기찻길에 버려진 기관차가 ‘철마는 달리고 싶다’고 절규하며 선 세월이 어느덧 반세기가 넘었다.

▲ 기차는 한국전쟁 당시 숱한 백성들이 피난길을 도왔다. 그러나 기차를 탈 수 있는 사람은 소수였다. (1951년 1월 인천) ⓒ NARA

이제 기차는 더는 증기기관차가 끌지 않는다. 전철이 건설되고, 고속철도로 서울과 부산은 두 시간 거리로 단축되었다. 일제가 경부 철도를 놓았을 때 11시간이 넘게 걸리던 서울-부산 거리를 두 시간 남짓으로 줄이는데 무려 100년이 넘게 걸렸다.

 

철도 100년은 이 땅의 슬픈 현대사다. 일제의 압제에 허덕이다 간도로 연해주로 떠나야 했던 식민지 백성들이 몸을 실은 것이 기차였고, 징용과 징병, 정신대로 끌려간 남녀 젊은이들을 실어 나른 것도 기차였다. 전쟁의 포연 속을 달리면서 병사들과 피난민들을 옮겨 준 것도 기차였다.

 

전쟁이 끝난 후에 가난에 시달리던 시골 사람들이 무작정 상경할 때 몸을 실은 것도, 입대하는 젊은이들이 머리를 깎고 오른 것도 기차였다. 6, 70년대에 완행열차를 타고 대도시의 학교를 통학한 청소년들은 자라 기성세대가 되었다. 이들이 오늘의 베이비붐 세대들이다.

 

철길이 없는 시골서 자란 탓에 나는 초등학교 4학년이 되어서야 기차를 구경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젠 나도 경부선 철길이 지나는 소도시에 살면서 아주 생광스럽게 기차를 이용하곤 한다. 다음 주말엔 장가드는 생질 결혼식에 참석하러 역으로 나가야 할 듯하다. [관련 글 : 역과 기차, 그리고 세월]

 

교과서의 ‘경부 철도 노래’를 펴 놓고 나는 철도와 기차가 꿰뚫고 온 우리 근대사를 무심하게 떠올려 본다. 이제 새 시대는 무엇을 앞세우고 오게 될까.

 

 

 

2015. 4. 15. 낮달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