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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교단(1984~2016)에서

작별, 그렇게 아이들은 여물어간다

by 낮달2018 2019. 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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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과 헤어질 때가 되었다

▲  아이들이 떠난 빈 교실 . 3 월 개학하면 아이들은 마지막 짐을 가져가리라 .

지난 12일은 졸업식이었다. 꽃다발과 사진기 조명 세례를 받으면서 아이들은 행복해 보였다. 열아홉 살 여고생의 신분을 벗고 예비 대학생, 방년 스무 살로 진입하는 아이들을 나는 마음속으로 축복했다. 아이들은 저마다 엷게 화장을 하고 있었는데 선입견 탓일까, 그 화장기는 마치 그들이 헤쳐나갈 미래처럼 불안해 보였다.

 

나는 지난해 우리 반이었던 아이들을 찾아 일일이 손을 잡고 축하해 주었다. 자신이 꿈꾸어 온 대로 진학하게 된 아이는 몇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모두들 자신의 선택을 받아들이고 있음이 분명했다. 수능을 치르고 나서 눈물을 쏟았던 아이들의 얼굴에도 함박꽃 같은 웃음이 가득했으니.

 

작별의 때가 왔다

 

이튿날은 종업식이었다. 나는 일찌감치 마음먹고 있었던 대로 정장을 하고 출근했다. 아이들과 처음 만나던 지난해 3월 3일(<다시 3월> 기사) 이후 두 번째로 넥타이를 맨 것이다. 방송 종업식이 끝나고 아이들에게 물었다. 우리 담임은 격식을 좋아한다? 아이들은 고개를 저었다.

 

넥타이를 맨 이유를 나는 작별의 시간이니 으레 그래야 할 것 같아서라고 말해주었다. 기억하니? 내가 작년에 너희들을 처음 만난 날, 정장을 했던 것을. 아이들은 그제야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는 한 오 분쯤 훈화했다. 혈기 방장하던 시절의 결기도 비장감도 물론 없었다.

 

이상한 일이다. 날이 들수록 훈화는 짧아진다. 기억건대 내 초임 시절의 조종례는 절대 짧지 않았다. 나이 들면서 나는 가끔 그 시절의 자신을 미스터리로 떠올린다. 지지난번에 근무한 여학교에서 나는 종례를 간단히 하는 거로 정평이 나 있었다. 아이들은 환호했다. 우리 선생님 종례하시는 것 좀 봐!

 

나는 아이들에게 물었다. 내 종례가 왜 짧은지 아는 사람? 아이들은 고개를 저으면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할 말이 별로 없어서야……. 그렇다. 무엇을 말할 것인가. 초임 시절에 무슨 갈증 난 것처럼 아이들에게 중언부언했던 얘기들, 그건 다만 자신에 관한 확인이었을 뿐이었다. 그때, 대체 나는 무슨 얘기를 그렇게 한 걸까!

 

개학을 앞두고 나는 집에서 교무업무시스템에 접속하여 학생생활기록부의 ‘행동특성 및 종합의견’을 입력하는 것으로 학년 업무를 마감했다. 인증서만 가지고 있으면 어떤 장소에서도 담임 업무를 볼 수 있는 것도 이 시대의 풍속이다.

▲ 생활기록부의 '행동특성 및 종합의견'란

학년 말에 생활기록부를 작성하면서 아이들을 종합적으로 평가해야 하는 일은 담임 업무 중에서 가장 곤혹스런 부분이다. 담임교사는 어떤 형식으로든 아이들은 이해·판단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아이의 일부일 뿐이지 완전하고 최종적인 평가가 될 수 없다. 그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일 년 동안의 한시적 판단이라 할지라도 아이들의 ‘판관’이 되는 일은 쉽지 않다.

 

자기 나름의 판단에 대한 확신이 있든 없든 그것은 조심스러운 일이다. 더구나 영구히 남을 기록으로 아이들을 평가하는 일임에랴! 자신이 알고 있었던 것과 아이의 진실이 전혀 상반된 것까지 포함한다면 정작 교사가 보는 아이들의 모습이란 일면의 진실에 그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마지막 업무를 위해서 일찌감치 아이들로부터 사전 조사를 해 놓았다. 학생부에 기록할 ‘특기 및 흥미’, ‘진로 희망’, 그리고 ‘자기 장단점’ 10가지가 그것이다. 진로 희망이야 학기 초와 말이 다 다르니 당연한 일이지만, 굳이 ‘장단점’을 쓰게 하는 것은 두 가지 면에서 뜻이 있다.

 

아이들은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을까

 

아이들은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를 들여다보는 것은 교사들이 아이들의 진실을 이해하는 일이 될 수 있다. 동시에 아이들이 자신을 기록하는 행위는 자기 정체성을 새롭게 바라보는 계기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열여덟 살, 아이들은 이미 자랄 만큼 자랐다. 자기 자신을 객관화할 만한 능력은 차고 넘친다. 아이들이 쓴 글을 훑어보면서 그런 생각을 아니 할 수 없었다. 아이들은 대부분 내가 판단한 것과 다르지 않아 보이는데, 개중에는 좀 뜻밖의 모습을 발견할 때도 많다.

 

아이들이 자신의 장점으로 가장 많이 꼽은 것은 ‘잘 웃는다’, ‘친구들의 말을 잘 들어준다’, ‘솔직하다’, ‘잘 먹는다(편식하지 않는다)’, ‘긍정적이다’ 등이다. 반대로 단점으로 가장 많이 든 것은 ‘의지가 약하고 끈기없다’, ‘우유부단하다’, ‘소심하다’, ‘뒤끝 있다’, ‘게으르다’, ‘귀가 얇다’ 등이다.

 

10개를 쓰라고 했더니, 그것도 부족해서 스무 개씩 쓴 아이들도 있다. 이건 상상력의 문제라고 나는 생각한다. 지난해에는 다 채우기 힘든다며 엄살을 떤 아이들도 있었는데 올해는 웬걸, 스무 개를 쓴 아이들도 여럿이다. 인상 깊은 것들 몇 개를 골라보았다.

 

장점
- 친구들이 나와 함께 있으면 즐거워한다.
- 낙천적이다. 작은 일에도 행복해한다.
- 남들이 기분 나쁘게 해도 잘 참는다.
- 좋아하는 일에는 집중력이 좋다.
- 분위기 파악을 잘한다. (상황 판단을 잘 한다.)
- 내가 한 행동에 대하여 당당하다.
- 주관이 뚜렷하다.
- 긍정적 마인드를 가지고 있다.(긍정적이다.)
- 말을 할 때 오버하게 되면 그걸 금방 의식하고 자제한다.
- 맺고 끊기를 잘 한다.(낄 때 안 낄 때 구별)
- 남보다 돋보이고 싶어 한다.
- 마음으로 새겨놓은 어느 선을 벗어나는 일은 하지 않는다.
- 쿨하고 간결하다.(뒤끝이 없다.)
- 수다스럽지 않다.
- 친구와의 우정을 지키려 한다.
- 대범하다.
- 유쾌하다.
- 독립심이 강하다.
- 감정에 솔직하다.
- 목표가 뚜렷하다.
- 붙임성이 좋다.

단점
- 말귀가 어둡다.
- 눈물이 많다.(감정의 기복이 심하다.)
- 나 자신에게 너무 관대하다.
- 남이 상처받는 말을 한다.
- 눈치가 없고 무뚝뚝하다.
- 자주 쓸데없는 생각을 한다.
- 결정하고 나서 후회를 많이 한다.
- 사소한 것에 매달린다.
- 나 자신과 경쟁하지 못하고 남을 의식한다.
- 소심하다.(뒤끝이 있다.)
- 가끔 너무 과신하여 자만한다.
- 솔직히 이기적이다.
- 타율적이다.
- 둔감하며 눈치가 없다.
- 인생을 재미없게 살고 있다.
-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혼자 끙끙거린다.
- 낯가림이 심하다.
- 열등감을 느낀다.
- 질투가 심하다.
- 오지랖이 너무 넓다.
- 감정표현이 격하다.(감정 절제를 잘 못 한다.)
- 의지는 충만하나 실천에 옮기지 않는다.

 

물론 자신을 안다는 것과 그것을 고친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그러나 아이들은 자신을 새롭게 바라보면서 자기 정체성을 하나씩 정립해 갈 것이다. 버릴 수 있는 것과 버리지 못하는 것의 경계까지도 아이들을 깨달아 가리라.

▲ 아이들과 함께한 1년. 예절교육, 수학여행, 찜닭 파티 등이다 .

행동특성과 종합의견은 써서 사흘쯤에 걸쳐서 여러 번 고치고 다듬어서 입력했으나 여전히 마음에 차지 않는다. 예전에 ‘행동발달상황’이라 하여 아이들의 근면성, 준법성, 도덕성, 책임감 따위를 ‘가나다’로 매겨야 했는데 그때 느껴야 했던 곤혹스러움에 비기면 약과지만 말이다.

 

한 해를 꼬박 가르치고도 아이들에 대해서 서너 문장 이상을 쓰는 게 어려울 때 느끼는 열패감은 만만하지 않다. 물론 거기에 아이들과 마음을 나눌 기회도 넉넉하지 않았다든가, 판단한 대로 직설적으로 적는 게 쉽지 않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말이다. 결국, 아이들에 대한 자신의 관심을 새삼스럽게 되돌아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절반의 성공과 실패, 혹은 만족하기

 

아이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포함하여 두서없는 얘기를 몇 자락 했다. 작년 처음 만나던 때와 비교하면 너희들의 정신의 키는 얼마나 자랐을까, ‘스스로 주인 된 사람’이란 급훈을 얼마나 우리는 얼마나 제대로 실천했을까……. 아쉬움도 많지만, 내가 가진 한계를 인정한다면 만족감도 반쯤은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그러면 결국 절반만 성공, 절반은 실팬데 그쯤으로도 만족해야 하지 않을까. 마지막 말은 농담처럼 했다. 학급 간부들을 불러내 고맙다고 수고했다고 치하를 하고, 너희가 희망하는 대학을 가고, 원하는 삶을 살기를 바란다면서 나는 마지막 인사를 했다. 3학년이 되어도 교정에서 만나면 반갑게 인사를 나누자고도 했다.

 

아이들이 떠난 빈 교실에 잠깐 있었다. 특별한 감회는 없었다. 비로소 처음으로 한 해가 오롯이 흘렀구나 하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유난히 순하고 다감했던 아이들이었다. 나야 그들의 삶의 한 과정을 스쳐 간 바람 같은 존재였다 할지라도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아이들이 하교한 뒤, 신학년도 근무희망원을 써서 교감 선생께 냈다. 글쎄, 새로 아이들을 맡는다면 그게 내 마지막 담임이 되지 않겠는가. 3월에 새로 만날 아이들을 잠깐 상상하면서 나는 책상을 정리하고 귀갓길에 올랐다.

 

 

2009. 2. 16.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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