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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풍경

시골 화가의 ‘드로잉’으로 세상 바라보기

by 낮달2018 2019. 4.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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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회] 박용진 드로잉전, 갤러리 카페 ‘포플러나무 아래’에서

▲ 전시회 포스터
▲내 친구 박용진 화백

오래된 벗 박용진이 전시회 소식을 전해 온 것은 가족 여행 출발 전이었다. 상주시 외곽에 후배 미술 교사가 연 카페에서 ‘드로잉(소묘)전’을 연다고 했다. 그는 나보다 반년 앞서 퇴직했고, 예천을 떠나 상주에서 그림을 그리며 살고 있었다. 전시회 여는 날이 여행 일정 중이어서 나는 여행을 다녀와서 보자고 말했다.

 

내가 박용진을 처음 만난 것은 스무 살 무렵이다. 그림 그리는 고교 동기를 통해서였는데 통성명을 하고 동갑내기여서 말을 텄을 뿐 특별한 교유를 나눈 것은 아니었다. 다시 그를 만난 것은 서른아홉, 해직 5년여 만에 복직하면서였다.

 

20년 만의 해후, 그의 판화 ‘실직의 하루

 

나는 신규 특채로 경북 북부 예천군의 한 공립중학교로 발령받았다. 집을 얻어 이사를 하고, 처음 나간 지회 사무실에서 사람 좋은 미소로 다가와 손을 내민 이가 그였다. 근 20여 년 만이었는데도 나는 단박에 그를 알아봤던 것 같다. 그는 지역의 한 사립중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치고 있었고, 놀랍게도 전교조 조합원이었다.

▲ 20년도 전에 그에게 받은 판화. 지금도 내 서가 위에 얹혀 있다. 실직(화선지, 목판화 , 23 ㎝ x17 ㎝)

한동네에서 살면서 매주 회의에서 만났지만, 그가 술 담배를 하지 않아서였을까, 그와의 관계는 그저 그만그만했다. 처음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무던함을 넘어 좀 심심한 사이였다. 그가 과묵했던 탓도 있지만, 아마 나는 그와 내가 동갑내기라는 사실을 빼면 좀 다른 종류(?)의 인간이라고 우정 여겼던 것 같다.

 

국어교사는 결코 모두가 문인이지 않지만, 미술 교사들은 열에 아홉은 화가거나 조각가고 어떤 형태로든 미술 가까이에 있다. 그래서일까, 널리 알려진 유명 작가가 아닌 이상, 우리는 미술 교사를 굳이 예술가의 반열에 올리지 않는다. 박용진에 대한 나의 이해는 그런 전제 위에 있었던 게 틀림없다. 그가 그림을 그린다는 사실은 교사라는 직업을 압도할 만큼 특별한 의미가 있지는 않았다는 얘기다.

 

복직한 이듬해인가 그는 내게 자신의 판화 한 점을 액자에 넣어 선물했다. 지금도 내 서가 위에 세워져 있는 그 그림의 제목은 ‘실직의 하루’였다. 그림에 대한 안목이랄 건 없지만 그의 그림을 좋아했던 나는 반색하면서 그것을 작은 방에 걸었는데, 이를 본 아내는 질린 표정으로 고함을 질렀다. 해직의 하루? 기가 막혀, 당장 떼요!

 

나는 아내의 분노를 이해하고 얌전히 액자를 떼어냈다. 아내는 액자를 볼 때마다 5년여 이어진 해직의 날을 굳이 기억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었다. 뒷날 그도 주제를 잘못 고른 그림이라는 걸 인정했다. 나는 그 판화를 20년 넘게 보관해오다 최근, 서재의 서가 위에다 세웠다.

▲ 포플러나무 아래 팻말과 박용진 작품전 행사 펼침막

날을 저울질하던 나는 어제 오전, 예정에 없이 그의 전시회를 찾았다. 두어 달 전에 연 ‘갤러리형 카페’ ‘포플러나무 아래’는 상주시 지천동, 갑장사(甲長寺)로 가는 도롯가 시내 옆에 있었다. 가게 앞마당 가장자리의 상호가 쓰인 철골 구조물에 그의 전시회 펼침막이 걸려 있었다.

 

“아, 나는 그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차를 대고 카페에 들어갔는데 아무도 없었고, 냉방 중인 실내엔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카페 공간의 반쯤이 갤러리였고, 나머지 반은 카페였다. 그림을 한 바퀴 둘러보고 자리에 앉아 나는 공간을 천천히 탐색했다.

 

나는 한쪽을 전시공간으로 이용하는 전형적인 상업 카페를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갤러리 카페 ‘포플러나무 아래’는 셀프바로 운영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인이 문을 열어두고 가끔 와서 실내를 둘러보고 갈 뿐, 방문자들은 제 손으로 커피나 차를 타 먹고 실비를 내고 가는 형식이었다. (이 가게의 운영과 관련해서는 별도의 글을 한 편 쓸 작정이다.)

▲ 2달 전쯤 문을 연 갤러리 카페 '포플러나무 아래'는 상주시 지천동 130에 있다.
▲ 갤러리 카페 내부는 반은 전시공간, 반은 휴식 공간이다. 비어 있어도 들어가 작품을 관람할 수 있다.
▲ 박용진 작가 ( 오른쪽 ) 와 힘들여 이 갤러리를 열고 있는 안인기 작가 .

나는 얼음제조기에서 얼음을 덜고 냉수를 받아 커피메이커에서 내린 에스프레소를 타 마셨다. 그리고 탁자 위에 놓인 소형 인쇄물 ‘박용진 작가의 미술 세계’를 정독했다. 지역 인터넷 언론인 ‘상주의 소리’에 실렸던 작가의 글과 그림을 모은 글이었다. 그것은 전시회 팸플릿에 실린 그의 인사말과 이어진 것이었다.

 

“지금까지 작품의 주제로 농촌, 학교, 그리고 노동자나 가족 등 ‘인간의 삶’에 매달려왔다. 70년대 이후 우리 사회의 산업화·민주화 과장은 온전히 내가 살아온 삶의 현장이었다.

애정을 가지고 민중의 삶을 지켜보았고 꾸준한 작품활동으로 부족한 공감의 폭을 넓히려 했다. 채색화에 비해 소박한 느낌을 주는 ‘드로잉’은 짧은 시간에 집약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담아낼 수 있다.”

 

모두 다섯 개의 주제로 쓴 박용진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내가 그의 친구라면서도 정작 그를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아는 건 일상적 인간 박용진이었을 뿐, 그가 자신의 정체성으로 여며온 그림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따위는 전혀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그가 쓴 글을 난생처음 읽었다. 글 따위는 전혀 쓸 것 같지 않았던 그가 쓴 글은 유려하지는 않았지만 자기 생각을 담담하게 담아내고 있었다. 거기에는 아마추어가 쓰는 글에 곧잘 드러나고 하는 감정의 과잉도, 같은 말을 되씹는 중언부언도 없었다. 그것은 그의 말수만큼이나 담백하고 소략했다.

▲ 학생 초상화(연필, 콘테, 펜, 켄트지, 25 x 35cm). 그의 교직 생활의 오랜 흔적이다 .
▲ 교실 풍경 ( 화선지 , 목판 , 30 x 20cm)
▲ 석순이 아버지(연필, 켄트지, 25 x 35cm). 그의 학부모다.

나는 그가 쓴 글, ‘학교’를 읽으면서 교사 박용진을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다. 시골 중학교에서 아이들과 함께 한 시간이 그가 진국의 전교조 조합원이었던 이유였을 것이다. 그는 방과 후면 시골 중학생 아이들을 모델로 초상화를 그렸다고 했다.

 

“나는 방과 후 한가하면 각종 살림살이의 복잡 미묘한 냄새가 가득한 학생들의 자취방을 찾아 시간을 보냈다. 걱정 없는 듯 쉴 새 없이 깔깔거리다가도 어느 순간 시무룩해지는 아이들의 생기 넘치는 표정에 매혹되었고 그들을 모델로 초상화를 그렸다.

초상화는 작가의 주관보다 인물의 개성을 존중한다. 뻑뻑한 머리카락, 깊고 검은 눈, 마른 콧물 자국, 붉은 빰, 허연 버짐, 갈라진 입술 등 여러 가지 요소를 세심하게 관찰하여 사실적으로 표현한다. 연필이나 콩테 등 단색 재료는 작업 시간을 줄여주었고, 아이들의 소박한 표정을 잡아내는데 적당했다.

우연히 길에서 졸업생들을 만나 반가움을 나누지만, 초상화의 주인공 대부분은 자신이 모델이었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그 초상화를 보면 세월의 무상함과 당시 천진했던 소년과 풋풋했던 청년의 모습이 떠올라 혼자 웃는다.”

- 박용진, ‘학교’ 중에서

 

그는 학교 풍경과 아이들의 모습을 그렸고 지역 전교조와 함께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행사를 이끌면서 관련 그림을 그렸다. 그는 초임 발령 때, 8, 9백 명에 이른 전교생이 50명으로 떨어진 학교에서 32년 동안 아이들을 가르쳤고 2015년 8월에 학교를 떠났다.

▲ 봉양동에서 ( 켄트지 , 고무판 , 56  x 43cm) 농촌의 폐가를 형상화했다 .
▲ 시항고개의 나물꾼(화선지, 목판, 34  x 50cm/왼쪽) 독죽골 장씨(화선지, 목판, 17  x 25cm)
▲ 상리 가는 막차 ( 유화 , 하드보드지 , 50  x 45cm)

그가 또 하나 관심을 기울인 부분이 ‘농촌’이었다. 나날이 소멸의 길을 걷고 있는 농촌, 특히 그는 늘어나는 폐가에 주목하며 이를 다양한 크기의 판화로 제작했다. 그는 “처참하게 부서진 현재의 모습과 대비된 단란했던 가족의 기억이라는 과거의 이야기 사이에서 풍부한 표현의 매력을 발견했던 것 같다.”고 술회한다.

 

또, 그는 봄이면 학교가 있는 면 지역을 운행하는 시내버스에 가득했던 나물꾼들의 보따리, 진동하던 나물 향과 땀 냄새를 그림으로 표현했다. 고갯길에서 운 좋게 만난 나물꾼의 활기차고 순박한 모습을 사진 찍어 판화로 제작했던 것이다.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는 대구 반야월에서 남의 땅을 몇백 평 빌려 양파 농사를 했다. 아버지는 휴일이면 일손이 부족해 농사를 모르던 나에게 인간 쟁기로 밭을 가는 ‘체험 삶의 현장’을 경험하게 했다. 농사 경험 있는 아버지는 뒤에서 술을 잡고 나는 앞에서 끌었다. 몇 발자국 못가 힘 빠진 다리가 휘청거리고 머리에서부터 땀이 비 오는 듯했다.”

 

그는 농사를 시작한 부친에게 이끌려 난생처음으로 농업 노동을 경험해 보기도 했는데 그의 판화 ‘쟁기질하는 사람’은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이었다.

▲ 쟁기질하는 사람 ( 켄트지 , 고무판 , 56 x  43cm). 작가의 실제 경험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
▲ 근래에 들어 그는 '나무'를 그리고 있다 . 연원동 고목 ( 콘테 , 수채용지 ,53  x 38cm)

근년에 와서 그는 ‘나무’를 소묘로 그리기 시작했다. 나무에 대한 그의 관심은 그것을 ‘민중의 또 다른 모습’으로 여겼고 “긴 세월 동안 온갖 풍상을 겪어도 가을이면 낙엽 지고 봄이면 다시 돋아나는 나무의 생명력” 때문이었다.

 

그는 또 ‘시장 사람들’ 연작을 그렸다. 대형 쇼핑몰에 밀려 지방 읍·면의 장터들은 규모를 줄이거나 사라지고 있지만, 시장은 ‘물건 파는 것보다 사람 만나는 것이 즐거운 공간’이다. 거기 사람들의 다양한 표정을 통해 그는 삶을 일별해 보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가 그린 16장의 ‘시장 사람들’은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각양각색 서민들의 표정을 사실적으로 담아냈다. 누구나 거기 있는 사람들의 표정에서 우리네 부모님이나, 정겨운 이웃의 얼굴을 판박이처럼 떠올릴 수 있는 그림이다.

▲ 시장 사람들 표정 ( 콘테 , 수채용지 16 장 , 30  x 42cm)
▲ 시장 사람들 1, 2( 콘테 ,수채용지 , 53 x  38cm)
▲ 거리의 삶 ( 왼쪽 ), 길거리의 삶 ( 콘테 , 수채화 전용지, 51  x 36cm)

그의 마지막 관심은 ‘노동자와 도시의 삶’이다. 그가 내게 선사했던 판화도 그런 관심의 일부였던 셈이다. ‘떠도는 삶’, ‘작업장 스케치’ 따위의 그림은 삶 말고도 ‘해고’와 싸워야 했던 노동자들의 삶을 생생하게 드러내 준다.

 

나는 그의 글이 실린 소형 인쇄물을 덮고 잠깐 내가 40년 넘게 알아왔으되, 정작 그를 전혀 알지 못한 자신을 뉘우쳤다. 스무 살 시절에 만난 동갑내기 벗이 자신을 그냥 성실한 모범 가장 이상으로 바라보지 않았던 것을 그는 알고 있었을까. 그랬다면 그는 왜 내게 자신이 그림을 통해 이르고 싶었던 걸을 내게 말하지 않았을까.

 

‘교사’, ‘시민’, ‘화가’ 박용진

 

나는 그를 만난 지 40년 만에 비로소 그의 정체성을 온전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는 아이들을 사랑한 훌륭한 교사였고, 성실한 가장이었으며 시대의 아픔을 공감하고자 했던 민주 시민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그림을 통해서 삶과 세상을 이해하고 갈무리해 온 좋은 화가라는 걸 말이다.

 

잠시 후, 박용진 내외와 한때 나와 블로그 이웃이었던 선돌 이 선생이 카페로 왔다. 갤러리의 주인장 안인기 선생도 왔다. 나는 안부를 나누고 나서 대뜸 내가 알지 못했던 부분, 그냥 무심히 벗을 바라보았던 자신의 무심을 사과했다.

 

그는 언제나처럼 빙그레 웃고 말 뿐이었다. 그의 인상은 원래도 그랬지만 나이 들수록 훨씬 더 부드럽고 후덕하다. 그건 그가 살아온 삶 때문일 것이다. 머리가 세긴 했지만, 그는 또래보다 훨씬 젊어 보인다. 나는 선선해지면 지난해 잠깐 들렀던 그의 북천화실을 찾아 그와 못다한 이야기를 오래 나누어 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박용진 전’은 지난 7월 27일 문을 열어 오는 27일까지 열린다. 오전 10시부터 관람할 수 있다.

 

약력
1956년 대구 출생
1983년 계명대학교 예술대학 회화과 졸업
2016년 은풍중학교 퇴임

주요 그룹전
2017 현대미술조망전 오늘의 미술-생존의 방식(대구문화예술회관)
2009 ‘STRUGGLE’전 시안미술관(영천)
2005 광복 60주년 기념 문화사 60년 대구전 국립대구박물관(대구)
2001 봉산미술제 초대전 예술마당 솔(대구)
경북선전 (김천, 상주, 문경, 예천, 영주)

 

2018. 8. 13.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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