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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풍경

[사진] 탑과 메밀밭

by 낮달2018 2019. 4.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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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밀꽃 속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  5층전탑

 

탑은 이 땅에선 서원(誓願)이었다. 위로는 임금으로부터 아래는 무지렁이 백성에 이르기까지 사직의 안위와 일가의 안녕을 꿈꾸는 '서원의 대상'이었다. 부처님 나라[불국(佛國)]를 꿈꾸었던 왕국의 역사, 탑들이 견뎌낸 천 년의 침묵이 안고 있는 것은 그러한 서원의 세월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탑은 이미 그 고유의 기능을 잃은 것처럼 보인다. 여전히 소수의 사람들이 탑에다 서원을 올리긴 하지만 이미 탑은 잊힌 구조물이 되었다. 한때, 탑은 사부대중들의 서원을 오롯이 품은 거룩한 건축이었지만 이제 그것은 벌판에 선 옹색하고 휑뎅그렁한 ‘돌(벽돌)무더기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에 있는 보물 제57호 조탑리 5층 전탑도 마찬가지다. 조탑리(오죽하면 탑을 지은 마을이라 하였을까!) 탑은 통일신라 시대의 전탑(벽돌탑)으로 높이가 8.65m에 이르는, 작지 않은 탑이다. 그러나 빈 밭 가운데 쓸쓸히 서 있는 이 탑은 금방 눈에 띄지 않는다. 전탑 특유의 어두운 빛깔 때문이기도 하고 고층의 구조물에 익숙한 우리의 시선이 거기 오래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걸 눈여겨보는 이는 드물다. 정작 안동사람들에게도 탑은 ‘아, 그거…….’ 정도의 탄성으로만 기억된다. 조탑리 탑은 중앙고속도로 남안동 나들목으로 들어가는 지방도로에서 마음만 먹으면 내려다볼 수도 있지만 길 바쁜 이들에게 그걸 기대하기는 어렵거니와 그걸 제대로 아는 이도 드문 까닭이다.

 

우연히 조탑리 탑 주변에 메밀꽃이 피어 있는 사진을 보고 마음이 아련해진 게 한가위 며칠 전이다. 간다 간다 하다가 어제 오후에야 조탑리를 찾았는데 아뿔싸, 차를 세우고 밭에 들어서면서 때를 놓쳤다는 걸 깨달았다. 탑 주위에 넘실대는 흰 꽃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는데 웬걸, 탑 저 너머에 펼쳐진 옹색한 밭에 메밀꽃은 이미 시들고 있는 참이었다.

 

누구의 발상인지, 탑 주변에는 연꽃을 기르는 커다란 고무 함지를 빽빽하게 둘렀고 거기 핀 연꽃도 거의 끝물이었다. 글쎄, 연꽃이 만발하였을 무렵에는 이 연꽃의 행렬이 탑의 경관을 얼마나 도왔을까. 잠자리가 어지러이 날고 있는 탑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사진을 찍었다.

 

시들어가고 있는 메밀밭은 규모도 규모지만 제대로 자라지 않은 느낌이었다. 메밀꽃과 연꽃 너머로 희미하게 흐려놓은 탑의 실루엣이 아련하다. 그것은 마치 이 불탑이 처한 21세기의 풍경 같아 보였다. 그래도 따가운 햇볕은 익어가는 들판을 축복할 터였다.

 

조탑리를 떠나는데, 길가 낮은 담 위에 호박이 누렇게 익어가고 있었다. 무릇 익어가는 모든 열매가 환기하는 것은 그것과 더불어 흐르고 있는 시간의 정직한 순환, 그리고 ‘차면 비워진다’는 삶과 자연의 거역할 수 없는 원칙이다.

 

2008. 9. 22.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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