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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길 위에서

어떤 백일몽

by 낮달2018 2019. 4.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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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 사내의 가슴의 뚫린 황량하고 어두운 통로…

▲ 순수와 섹시를 동시에 표현해내는 묘한 분위기의 이탈리아 여배우.  모니카 벨루치.

‘젊은 여자’가 유난히 눈에 밟히는 날들이 계속되었겠다. 오해할 필요는 없다. 무슨 신이라도 내린 듯, 짬만 나면 디지털카메라 마니아들의 SLR(Single Lens Reflex) 포럼을 드나들었고, 거기 실린 아름다운 사진 속의 여인들을 원 없이 만났다는 얘기다.

 

세련된 아웃포커싱(배경을 흐릿하게 처리하면서 피사체만을 선명하게 표현하여 피사체를 부각하는 촬영)으로 잡힌 고운 색감의 배경 속에서 여자들은 ‘존재’만으로도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그들은 대학 교정에서, 하오의 공원에서, 저무는 들녘에서 무심한 눈길로 렌즈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 방심한 시선 속에 담긴 것은 꼼짝없이 낡고 오래된 세월에 대한 도전과 멸시 같았다.

 

중년의 일상과 젊음의 낙관과 오만

 

이미 과거가 된 청춘과 열정의 잔해일 뿐인 중년의 일상에 그녀들이 온몸으로 내뿜는 것은 넘치는 관능, 미래에 대한 도저한 낙관과 오만이었다. 설명할 수 없는 갈증과 조바심으로 되돌아보게 되는 우리의 지난 세월과 일상은 진부한 흑백사진과도 같았다.

 

그럴수록 그 여자들이 넘치는 성적 에너지로 증언하는 것은 그들의 살아 있는 ‘젊음’이었던 듯하다. 아울러 그것은 지금 현재, 우리가 선 자리가 ‘나이 듦’이 아닌, ‘늙어감’의 과정임을 훌륭하게 깨우치고 있었던 것이다.

 

순수와 섹시를 동시에 표현해내는 묘한 분위기의 이탈리아 여배우로 모니카 벨루치(Monica Bellucci)는 또 다른 의미로 느껴지는 사람이다. 이 서른아홉 살의 젊지 않은 여배우가 가진 양면성을 늘 경이의 눈으로 바라보는 이유다. <라 빠르망>에서 보여줬던 청순하고 우수에 찬 눈빛에서부터 최근 개봉된 <사랑도 흥정이 되나요>에서 보여주는 뇌쇄적 매혹과 아름다움은 노유(老幼)와 미추를 넘어 삶이 가진 모순적 양면성을 여과 없이 드러내 주기 때문이다.

 

중년의 막바지, 늘그막에 사내들이 젊은 여자에게 빠져 집과 가족을 버리는 게 반드시 남의 일만은 아니지 않겠냐며 던진 내 말끝을 40대 초반의 여자 동료가 이렇게 받았겠다. 그건 여자도 마찬가질 걸요. 여자도 멋진 젊은 남자에 사로잡히면 기꺼이 모든 것을 버리게 된다지요…….

 

노년의 어귀에 선 사내들에게, 혹은 여인들 앞에 맨살의 청춘을 들이미는 ‘젊은 이성’은 마치 부도난 열정의 수표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날 밤, 한 여자를 만났다.

 

젊고 낯선 여자였다. 무슨 이유에선지, 난리가 났던가, 아니면 사랑의 도피행이었는지 우리는 가파른 산길을 돌아 나오는 길 위에 있었다. 낡은 오두막집의 천장 낮은 방에서 여자를 껴안은 것 같다. 가녀린 몸피, 여자의 몸은 가볍고 떨고 있었다. 현실과 꿈의 경계가 아주 모호해진다고 느끼는 순간, 나는 눈을 떴다.

 

아내도,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여자와도 닮지 않은, 참으로 낯선 여자였다. 갓 깨어났을 때 선명하게 떠오른 얼굴은 천천히 기억 속에서 흐릿하게 뭉개져 간다. 아주 젊은 여자를 만났어. 꿈에 말이지……. 그런데 누군지 전혀 모르겠어……. 아내가 심드렁하게 받아 주었다. 당신, 아직 망녕할 나인 아니지 않우?

 

첫눈 오는 날
빨간색 쉐타를 사 가지고
다시 술 마시러 오마
술집 여자아이와
손가락 걸어 약속을 한다
에라, 이 철딱서니 없는 사람아
처자식 두고
잘 먹이지도 못하면서.

  - 나태주, “에라” 전문(84인 시집 <서울의 우울>에서)

 

시인 나태주가 위 시를 쓴 것은 “익명의 사회, 산업화의 사회가 되면서 인간스러움이 경시되고 따뜻함이 멀어지고 인간의 양심에 많이 금이 가 있는 현상”을 보면서 ‘우리들의 속악성(俗惡性)과 허위의식’을 표현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술집 여자아이에게 손가락을 거는 저 어리석은 중년 사내의 가슴에 뚫린, 황량하고 어두운 통로가 눈에 익다.

 

 

2006. 10. 3.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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