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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주기, 작가 박경리를 다시 생각한다

by 낮달2018 2019. 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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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박경리 선생의 부음에 부쳐

▲ 작가 고 박경리(1926 ~ 2008) 선생 ⓒ 나무위키

5월 5일은 작가 박경리 선생의 11주기다. 선생은 강원도 원주에서 살다가 2008년 5월 5일, 8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나는 마음으로 꽃 한 송이 바치며 선생을 배웅했다. 일찍이 고교 시절에 <토지>에 입문한 뒤, 대여섯 번쯤 이 위대한 소설을 읽었다.

 

11주기를 맞아 경남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박경리문학관에서는 추모문학제가 열린다고 한다. 하동의 박경리문학관은 2017년 평사리문학관을 개축하고 박경리문학관으로 이름을 바꿔 개관한 곳이다. 나는 2007년에 「토지」의 주 무대를 재현한 이곳 평사리를 찾았었다.[관련 기사 : 평사리, 그 허구와 현실의 경계에 서다]

 

박경리 선생을 기리는 시설은 하동 말고도 타계할 때까지 살았던 강원도 원주와 그의 묘소가 있는 경남 통영에도 있다. 원주에는 생전 거처 주변에 조성한 토지문학공원(원주 시내)과 토지문화재단이 열고 있는 토지문화관(원주시 흥업면)이 있다. 토지문학공원을 찾은 것은 선생의 1주기 때다.

 

고향인 통영에도 선생의 묘소와 함께 박경리기념관이 있다. 벗들과 함께 내가 선생의 묘소와 기념관을 찾은 것은 2009년 8월이다. 선생의 묘소, 소박한 돌비 하나가 마음에 남은 여행이었다.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통영은 아름다운 항구다. 거기서 한 달쯤 살아봤으면 하고 생각할 정도다. [관련 글 : 통영, 박경리 기행]

 

2008년 선생의 부음을 접하고 쓴 글과 이듬해 원주로 박경리 문학공원을 찾고 쓴 글을 붙인다. 글쎄, 무명의 독자로서 이게 선생의 11주기에 바치는 경의로는 최선이 아닐까 싶다.

 

2019. 5. 5.


박경리 선생이 위중하다는 것을 이미 며칠 전에 뉴스를 통해 알고 있었던 까닭에 나는 ‘그랬구나……’ 하는 정도로 선생의 부음을 받아들였다. 향년 여든둘이라는 걸 확인하면서 나는 잠깐 아쉬움을 느꼈을 뿐이다. 82세라면 요즘 같으면 매우 건강하여야 할 연세이니 말이다.

 

선생의 부음은 신문과 방송에서 실시간으로 보도하면서 저마다 선생의 삶과 문학세계를 다투어 기리고 있는 듯하다. 나는 잠깐 그이가 살아낸 80여 년의 삶과 그 행간마다 고여 있을 실존적 고독과 상처를 생각했고 그이가 언제까지 담배를 피웠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물론 나는 작가 박경리를 잘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은 선생과 관련된 가족 사항, 언론을 통해 공개된 근황 따위에 불과하다. 말하자면 그건 이런 형식이다. …… 그이는 경남 통영에서 태어나 여학교를 졸업한 이듬해 결혼해 딸을 낳았고 한국전쟁 때 남편과 사별했다. 유일한 혈육은 시인 김지하와 혼인했고, 박정희 독재와 싸웠던 사위는 70년대 내내 감옥에 갇혀 있었다…….

 

물론 나는 한 번도 그이를 만난 적이 없다. 숱한 무명의 독자 중의 하나일 뿐이니 그이를 만나기 위해선 내가 그이를 찾아야만 한다. 그이는 내가 사는 안동에서 중앙고속도로로 가면 1시간 남짓이면 갈 수 있는 원주에서 살았고 원주를 지나칠 때마다 나는 그이와 토지문화관을 생각하곤 했지만 한 번도 그곳을 찾지는 않았다.

 

<토지>, 박경리의 문학적 성취는 한국 현대문학의 맨 앞자리

 

그러나 나는 그이가 거둔 문학적 성취는 20세기 이래 한국 현대문학이 이룩한 역사적 성취의 맨 앞자리에 있다는 걸 믿어 의심치 않는다. 선생의 문학은 대하소설 <토지> 한편만으로도 우리 문학의 모든 성취의 총합과 견줄 수 있다. 25년 동안, 원고지 4만 장에 문학적으로 재구성한 우리 근대사는 그것 자체로 이미 문학적 기념비다.

 

내가 그이를 처음 만난 것은 초등학교 고학년 시절이었던 것 같다. 보라색 장정판 신구문화사 한국문학전집을 나는 거의 ‘날것(!)’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거기서 읽은 선생의 단편이 ‘시계’나 ‘불신시대’ 따위였던 듯하다. 그러나 나는 그이의 초기 단편들을 인상적으로 기억하고 있지 않다.

 

내가 <토지>를 만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쯤이었던 것 같다. 당시 형이 받고 있었던 문예지 <문학사상>을 통해서였다. 습관적으로 읽을거리에 굶주려 있던 때여서 허겁지겁 읽기 시작한 <토지>에서 나는 서희와 길상을 만났고, 그들 삶의 자취가 이 땅의 근대사였다는 걸 막연하게나마 깨달았던 듯하다.

 

내 서가에 꽂힌 선생의 <토지>는 모두 네 군데 출판사에서 펴낸 것들이다. 1부에서 3부까지는 지식산업사에서 부별로 두 권씩 모두 6권인데 세로쓰기 본이다. 제4부는 삼성출판사에서 펴낸 장정판. 그리고 제5부는 솔에서 펴낸 4권이다. 나머지는 지식산업사에서 낸 2부 첫째 권을 잃어버려서 새로 산 나남출판사 본 1·2부 8권이다.

 

나는 <토지>를 대여섯 번쯤 읽었다. 같은 작품을 여러 번 되풀이해 읽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10년 전에 쓴 “문학교사의 책 읽기”라는 글에서 나는 그렇게 썼다.

 

그러나, 여전히 내 독서의 본령은 문학이어서, 이번 겨울에도 나는 딸애가 읽고 있는 박경리 선생의 <토지> 5부를 한 번 더 읽었고, 서사 문학이 다다를 수 있는 감동의 깊이를 다시금 확인했다. 격동의 한국 근대사를 살아간 이 땅의 사람들의 삶의 흔적들을 통해 내가 이해한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쉼 없는 모색과 투쟁이었고, 한국인의 삵의 원형을 바라보는 이 위대한 작가의 따뜻하면서도 냉정한 시선이었다. 고교 시절, 한 문학 잡지에 연재되던 이 작품을 처음 만난 이래, 통틀어 네 번쯤 완독했는데,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새로운 이해와 깨달음을 새록새록 되새기곤 한다.

    “문학교사의 책 읽기” 중에서

 

선생의 부음을 듣고 나는 서가에 꽂힌 대하소설 <토지>를 꺼내 뒤적였다. 새로 구매한 나남출판사 본 <토지> 제1부 1권의 ‘2002년 판 <토지>를 내며’에서 작가는 그렇게 쓰고 있다.

 

어디 지리산뿐일까마는 산짐승들이 숨어서 쉬어볼 만한 곳도 마땅치 않고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운 식물, 떠나버린 생명들, 바위를 타고 흐르던 생명수는 썩어가고 있다. 도시 인간들이 이룩한 것이 무엇일까? 백팔번뇌, 끝이 없구나. 세사(世事) 한귀퉁이에 비루한 마음 걸어놓고 훨훨 껍데기 벗어던지며 떠나지 못하는 것이 한탄스럽다. 소멸의 시기는 눈앞으로 다가오는데 삶의 의미는 멀고도 멀어 너무나 아득하다.

    “ 2002년 판 <토지>를 내며”(2001. 12. 3.)

 

그예 작가는 이승에서의 삶과 인연의 끈을 놓았다. 이제 선생은 그가 재구(再構)한 근대사의 슬픔과 고통의 역사, 거기 당신이 낳고 숨결을 불어넣은 인물들의 삶에서 벗어나 ‘훨훨 껍데기를 벗어던지며 떠나시리라.’

 

2008. 5. 5. 낮달

 

 

[추모] 아아, 박경리 그리고 <토지>

▲강원도 원주시 토지문학공원 안의 박경리 선생의 옛집

원주(原州)를 다녀왔다. 나를 강원 내륙의 군사도시로 부른 이는 돌아가신 작가 박경리 선생이시다. 중앙고속도로가 뚫리면서 자주 이 도시를 스쳐 지나가긴 했지만, 원주는 이번이 초행길이었다.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 살겠다.’는 얘기에 익숙한 동부전선 쪽에서 군 복무를 한 사람이라면 또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군대 생활도 서부전선 쪽에서 해 강원도 골짜기에 대해서 아는 게 없다.

 

도시 ‘원주’가 떠올리는 사람은 지학순 주교가 있지만 70년대 유신독재에 저항했던 이 강골의 사제는 내게 아득히 먼 존재다. 그러나 작가 박경리(1926~2008)라면 좀 다르다. 나는 그이의 대하 장편소설 <토지>를 대략 예닐곱 번쯤 읽었고, 그이를 얘기할 때마다 ‘존경하는’이라는 관형어를 붙이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이 여기는 사람이니까 말이다.

 

<토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쉼 없는 모색과 투쟁의 대 서사시

 

박경리를 처음 만난 것은 초등학교 고학년 때였다. 자줏빛 장정판 신구문화사 간 <한국문학전집>에서 ‘계산’과 ‘불신시대’ 등, 그의 초기 단편소설을 읽었다. 그때만 해도 나는 박경리를 ‘별로 재미없는 작가’로만 알았다. 장편인 <시장과 전장>, <파시(波市)>는 읽다가 말았던 것 같다.

 

작가를 다시 만난 것은 고교 시절 집에서 구독하고 있었던 ‘문학사상’에서였다. 작가가 문학사상에 <토지> 제2부를 연재하고 있었던 때(1972~1975)는 정확히 내 고교 시절과 일치한다. 나는 거기서 심사가 뒤틀리면 ‘입매가 뱅글뱅글 돌아가는’ 서희를 처음 만날 수 있었다.

 

내 서가의 <토지> 제1·2·3부는 세로쓰기의 지식산업사 판이다. 모두 여섯 권인데 그중 제3권은 누가 빌려 가서 가져오지 않았는지 빠져 있다. 이 책들을 꾸려서 한 이사가 그간 족히 열 번은 되니 누구를 탓하겠는가. 제4부는 삼성출판사가 펴낸 가로쓰기 장정판 3권이고, 제5부는 솔에서 낸 4권이다.

 

출판사마다 책을 내면서 편의에 따라 권수를 더하거나 빼다 보니 현재 시중에 나와 있는 <토지>(나남)는 21권이 되었다. 지식산업사 판은 부당 2권씩으로 펴냈는데, 제4부를 낸 삼성출판사는 부당 3권씩으로 역산했는지 10·11·12권이 되었다.

 

솔에서 낸 5부는 13·14·15·16권이다. 2부 일부가 빠져서 나는 나남에서 낸 신간 8권을 새로 샀다. 결국, 내 서가에 토지는 모두 4종인 셈이다. 최근 <토지> 정본 작업이 필요하다는 논의에 찬성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나는 박경리의 작가적 역량은 말할 것 없거니와 오랜 세월 동안 그이가 벼리고 벼른 삶에 대한 단련 앞에서 전율한다. 여학교를 나와, 스무 살에 딸 하나를 낳고 남편과 사별, 반세기 이상을 창작에 전념해 온 그이의 이력은 단지 그이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 박경리 선생의 옛집을 찾은 사람들

나는 작가가 작품을 쓰면서 들이는 공력과 가누어야 할 고통과 번민은 잘 모른다. 그러나 박경리 선생이 토지 제1부를 썼던 삼 년 동안의 심경을 술회하고 쓴 다음 글 앞에서는 가슴속이 뻐근해지는 동질의 고통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앞으로 나는 내 자신에게 무엇을 언약할 것인가. 포기함으로써 좌절할 것인가,
저항함으로써 방어할 것인가,
도전함으로써 비약할 것인가.
다만 확실한 것은 보다 험난한 길이 남아 있으리라는 예감이다.
이 밤에 나는 예감을 응시하며 빗소리를 듣는다.

   - 1973. 6. 3.

 

거기 담긴 것은 문학적 삶의 창조자 또는 주재자로서의 작가와 현실적 삶의 주체로서의 작가 사이의 간극에 대한 작가의 고뇌고, 번민이다. 그것은 또 작가가 그려내는 숱한 삶의 부침 앞에 완고하고 서 있는 역사의 벽, 혹은 세상살이에 대한 끊임없는 자문과 회의가 아니던가.

 

<토지>는 이 땅의 현대문학 100년이 이루어낸 가장 크고 높은 성취라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누구는 <태백산맥>을 말하고 누구는 <장길산>을 말한다. 그러나 나는 <토지>가 일구어낸 우리 근현대사의 풍경과 거기 등장하는 숱한 삶의 모습들이 숨기고 있는 문학적 함의(含意)만큼 우뚝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과문한 일개 독자로서 <토지>의 문학적 성취를 말하는 것은 외람된 일이긴 하다. 나는 소년 시절에 <토지>를 읽기 시작한 이래, 청년기와 장년기를 거쳐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새로워지는 이해와 깨달음을 새록새록 되새기곤 한다. 더 볼 것 없이 <토지>는 서사문학이 다다를 수 있는 감동의 극한이다.

 

격동의 한국 근대사를 살아간 사람들의 삶의 흔적들을 통해 내가 이해한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쉼 없는 모색과 투쟁이었던 듯하다. 나는 <토지>를 통해 한국인의 삵의 원형을 바라보는 이 ‘위대한’ 작가의 따뜻하면서도 냉정한 시선을 이해할 수 있었다.

 

<토지>의 주인공을 묻는 것은 사족이다. 최서희와 김길상만이 아니라, 하동 평사리, 진주, 서울과 부산, 간도 용정과 훈춘 등의 배경에 등장했던 무명의 인물들조차 고난의 근대사를 구성한 주역들인바, 그들에 삶에 의해서 대하소설 <토지>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소설의 어느 장면인들 삶에 대한 웅숭깊은 시선이 없겠냐만 나는 평사리의 작인 이용과 무녀의 딸 공월선의 사랑만큼 위대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일찍이 보지 못했다. 죽음을 앞두고 월선이 이용의 무릎에 안겨 연인과 나누는 대화는 우리가 늘상 입에 올리는 ‘여한(餘恨)’이 무엇인가를 여과 없이 증명하는 것이었다.

 

이불자락을 걷고 여자를 안아 무릎 위에 올린다.
쪽에서 가느다란 은비녀가 방바닥에 떨어진다.
“내 몸이 찹제?”
“아니요.”
“우리 많이 살았다.”
“야.”
내려다보고 올려다본다.
눈만 살아 있다.
월선의 사지는 마치 새털같이 가볍게, 용이의 옷깃조차 잡을 힘이 없다.
“니 여한이 없제?”
“야, 없십니다.”
“그라믄 됐다. 나도 여한이 없다.”
머리를 쓸어주고 주먹만큼 작아진 얼굴에서 턱을 쓸어주고 그리고 조용히 자리에 눕힌다.
용이 돌아와서 이틀밤을 지탱한 월선은 정월 초이튿날 새벽에 숨을 거두었다.

 

김환의 죽음을 떠올리며 산길을 가는 강쇠의 넋두리 앞에 나는 가장 많은 눈물을 흘렸다. 신분 상승을 꿈꾸다 최치수를 죽이고 세상을 원망하지 않고 형장에서 죽은 귀녀나, 선량한 동생 한복과는 달리 일제의 주구로 살아가다 영락하는 김거복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은 비록 선악과 역사를 살피긴 하지만, 인간에 대한 연민을 거두지 않는다.

▲ 박경리 문학공원(토지문학공원) 입구. 강원도 원주시 토지길 1에 있다.

작가 박경리를 새삼 기리는 것은 그의 1주기가 오늘인 까닭이다. 그이는 지난해 5월 5일 세상을 떠나 고향인 경남 통영 미륵산 기슭에 묻혔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야 세상은 그의 문학세계를 조명하면서 새삼스레 우리 문학사에 드리운 고인의 무게를 느꼈던 것 같다.

 

나는 한 번도 마음에 둔 문인을 만나고 싶다고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이다. 나는 늘 마음속에 그들을 두었고, 작품을 통해서 그들을 이해하는 것에 만족했다. 안동에 와 살면서 나는 1시간 남짓한 거리 너머가 선생이 사는 원주라는 사실을 푸근하게 여겼다.

 

나는 원주를 지나갈 때마다 선생이 글을 쓰는 집과 그이가 손수 벌레를 잡아 가꾸는 텃밭을 떠올리곤 했다. 그러나 역시 선생을 찾아뵙고 싶다는 마음을 내지 못한 채 그의 부음을 들었다. 나는 그이의 장례식에 갈 엄두도 못 냈다. 역시 나는 마음으로 그이를 배웅한 것이었다.

 

원주에서 보낸 만년, 토지문학공원

 

1주기가 가까워지면서 어떻게 원주를 다녀오겠다는 생각이 났는지는 모르겠다. 토지문학공원에서 선생의 사진전·시화전이 열린다는 신문 보도를 보았는데, 마침 그 주 토요일이 ‘놀토’였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길을 떠났다. 내비게이션은 헤매지 않고 나를 원주 단구동에 있는 ‘토지문학공원’으로 안내해 주었다.

 

토지문학공원은 <토지>의 산실인 선생의 옛집이 택지개발지구로 편입되어 사라질 것을 염려한 문화계의 건의에 따라 1999년에 완공된 곳이다. 마땅한 국민작가 한 사람을 갖지 못한 가난한 나라다. 작가의 부음 때마다 한갓진 추모로 그의 문학세계를 돌이켜보는 것은 오래된 관행이다. 1980년 원주로 옮긴 이래, 오랫동안 선생께서 머물렀던 원주의 옛집 주변이 선생 살아생전에 ‘문학공원’이 된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토요일 한낮의 토지문학공원은 한적했다. 공원은 3200평의 부지에 선생의 옛집과 정원을 원형대로 보존했고, 주변은 <토지>의 배경을 그대로 옮겨놓은 테마공원(평사리 마당, 홍이 동산, 용두레벌)으로 꾸며져 있었다. 글쎄, 삼천 평쯤의 공간에 <토지>의 거의 일백 년에 가까운 세월과 삶을 복원한다는 것은 애당초 무리였던 듯하다.

 

테마공원은 그런 뜻으로 지어진 공간이라고 둘러보는 곳 이상의 뜻을 찾기 어렵다. 다만 이 조그만 도시가 한 작가를 수천 평의 크기로 기리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상한 일일지 모른다. 관리사무소 뒤편에 있는 선생의 옛집은 잿빛의 2층 슬래브집이었다. 여기서 선생은 토지 4·5부를 집필하고 완결편을 썼다.

▲박경리 선생 옛집 안내
▲박경리 선생이 생전에 가꾸던 텃밭
▲ 공원 곳곳에 나부끼는 추모 현수막

너른 마당에 느티나무·소나무·자귀나무·살구나무가 시원하게 서 있었고, 집의 왼쪽에는 선생이 가꾸던 텃밭이 펼쳐져 있었다. 나는 사진으로만 만났던 그이의 모습, 무심한 표정으로 채소에 깃든 벌레를 잡고 있는 노작가의 모습을 아련하게 그려보았다.

 

사람도
나무와 같이,
풀잎과도 같이
제 몫을 먹고
과식을 아니 하며
넘보지도 않는다면은
모두 더불어 살 수 있다.
무릇
모든 생명들이 더불어 살 수 있다.

    - <토지>(솔 출판사) 11권 48쪽

 

공원 곳곳에서 나부끼고 있는 현수막 속에서 선생은 후덕하게 웃고 있었다. 그것은 그이가 자신의 작품을 통해서, 그 인물과 삶을 통해서, 그리고 자신의 삶을 통해서 증명해낸 이 자연과 우주에 대한 벅찬 사랑이었다. 그것은 현수막 속에서도 같은 울림으로 시나브로 살아 있었다.

 

“생명은 아픔이요, 생명은 사랑이다.”

▲ 통영시 산양읍에 있는 박경리 묘소. 소박한 봉분과 조그마한 비석, 상석엔 참배객이 놓고 간 솔방울이 놓여 있다. 2009년 8월.

 

2009. 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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