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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길 위에서

2009년 통영, 박경리 기행

by 낮달2018 2019. 4.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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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와 그의 문학의 고향 통영 기행

▲ 동호만 상공에서 바라본 통영시 ⓒ 통영시 누리집

지난 5월 5일은 작가 박경리 선생의 1주기였다. 따로 문상하지 않았던 나는 원주를 찾아 그이의 흔적을 잠깐 더듬었다. 원주 시내에 있는 ‘토지문학공원’에서, 그리고 그이가 살던 슬래브집을 둘러보는 거로 나는 선생을 추모했다. [아아, 박경리 그리고 토지]

 

그이가 묻힌 통영을 다녀오리라고 마음먹은 지 꼭 석 달 만에 나는 통영을 찾았다. 거제도를 다녀오던 길, 벗들과 함께였다. ‘통영(統營)’은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에서 온 이름이다. 통영은 통영군에서 시로 승격되면서 충무공(忠武公)의 시호를 따서 ‘충무’라 하였다가 1995년 시군이 통합되면서 다시 제 이름을 되찾았다.

 

2009년 8월, 통영을 찾다

 

바다가 아닌 산과 어우러진 호수 같은 바다를 가진 이 남해 연안의 조그만 도시는 ‘동양의 나폴리’라 불린다. 그 아름다운 바다가 길러낸 인물인가. 통영은 박경리뿐 아니라, 음악가 윤이상, 시인 청마 유치환과 김춘수를 낳은 고장으로 유명하다.

 

윤이상을 끝내 살아생전에 받아들이지 못한 용렬한 나라 탓에 통영은 이 세계적 음악가를 사후에야 영접해야 했다. 그러나 이 도시는 시방 <윤이상 국제 음악제> 등으로 위대한 음악가를 낳은 덕을 톡톡히 누리고 있다. 대표적 친일 문인인 형 유치진에 이어 청마도 친일 행적이 밝혀지고 있는데도 ‘청마우체국’과 ‘청마문학관’ 등으로 그를 기리고 있는 이 도시의 이율배반은 어쩐지 개운하지 않다.

 

어쨌든 청마와 정운 이영도의 사랑이 이루어진 곳이 통영이다. [이호우·이영도 시인의 생가를 찾아서] 그러나 내게 통영은 선생의 작품 <토지>와 <김약국의 딸들>의 무대로 훨씬 정겹게 기억되는 도시다. 통영은 하동 평사리, 진주와 이웃한 도시로 <토지>의 주인공들의 삶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는 것이다.

 

아비 조준구에게 버림받았으나 ‘인간의 존엄성을 헤아리는 의지를 가진’ 꼽추 아들 조병수가 신분을 버린 채 소목장이로 다시 태어난 곳이 통영이다. 살인죄인 김평산의 둘째 아들인 김한복의 장남 김영호가 어업조합 서기로 옮겨와 사는 곳도 통영이다.

 

일본인과의 ‘민족을 떠난 사랑’으로 고뇌하는 지식인 여성 유인실이 오가다 지로와 하룻밤의 안타까운 사랑을 나눈 곳도 통영이다. 그의 아이를 낳아 조찬하에게 맡기고 독립운동 전선으로 떠나는 유인실은 전편을 통해서 가장 매력적인 여인이 아니던가.

 

꼽추 소목장 조병수와 유인실, 그리고 <김약국의 딸들>의 통영

 

그러나 무엇보다 통영은 소설 <김약국의 딸들>의 무대다. 1962년에 발표한 이 작품은 1969년부터 집필을 시작한 대하소설 <토지>를 위한 ‘워밍업’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한 집안의 욕망과 운명에 의한 비극적 몰락’을 다루고 있는 이 소설에 그려진 삶과 사랑은 <토지>에 이르러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었다.

 

박경리는 삶이 가진 복합적 성격을 가장 탁월한 솜씨로 창조해 내는 작가다. 그의 붓끝을 거쳐 태어난 숱한 인물들은 삶의 희로애락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 있는 캐릭터로 독자들을 압도한다. 그이가 그리는 선인과 악인만큼 생동감 있는 인물이 또 어디에 있을까.

 

<토지>에 등장하는 인물들 600여 명, 그리고 <김약국의 딸들>에 등장하는 김약국 일가와 주변 사람들은 가공의 인물이 아니라 마치 실재하는 이웃 사람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것은 그들의 몸에 피가 돌게끔 한 작가의 내공 덕이고, 그들의 삶이 짜낸 시대와 사회가 획득한 리얼리티와 그 진정성 덕분이리라.

 

문학 교과서에 나오는 <김약국의 딸들>을 가르치면서 나는 그 소설을 다시 읽었다. 잠깐 헷갈리는 부분만 바로잡자고 읽기 시작했는데 웬걸, 나는 자정이 넘도록 책을 놓을 수 없었다. 작품을 새로 읽고 나서 나는 소설에 밑그림처럼 깔린 샤머니즘과 운명론이 오히려 소설의 리얼리티를 강화하고 있음을 깨달았던 것 같다.

 

장편소설 <김 약국의 딸들>
 
선비의 성품을 지닌 김봉제는 김 약국의 주인으로 부유층에 속하는 인물이다. 이에 반해, 그의 동생 봉룡은 충동적이고 격정적 성격을 지닌 인물이다.
 
봉룡은 아내 숙정이 출가 전 그녀를 사모했던 송욱이 찾아오자 극단적으로 시기하여 그를 죽이고 만다. 숙정은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고자 자살해 버린다. 이 사태로 숙정 친정의 보복을 피해 봉룡은 집을 떠나 자취를 감춘다.
 
봉제에게 맡겨진 봉룡의 유일한 혈육인 성수는 봉제의 아내인 송씨의 손에 의해 자라나게 되지만, 죽은 동서에게 항상 열등감을 지녔던 송씨는 그 화살을 성수에게 돌려 심리적으로 괴롭힌다.
 
사냥터에서 독사에 물려 사망한 봉제 영감의 뒤를 이어 성수는 김 약국의 주인이 된다. 성수는 딸 다섯을 두지만 전혀 지식이 없는 어장 사업에 손을 댐으로써 가산이 조금씩 기울게 된다.
 
장녀 용숙은 일찍이 과부가 되었는데, 아들 동훈을 치료하던 의사와 불륜을 맺어 사회적으로 지탄받는다. 둘째 용빈은 교육을 받아 똑똑하여 교원이 되나 애인 홍섭으로부터 배신을 당하게 된다. 셋째 딸 용란은 관능적 미모를 갖추었으나 지적인 헤아림이 부족해 머슴의 아들 한돌과 놀아나는 바람에 지탄받고, 넷째 딸 용옥은 애정이 없는 남편 기두와 별거하다가 뱃길에서 죽음을 맞게 된다.
 
용란도 다시 나타난 한돌과 함께 있다가 남편인 연학에게 발각되어 한돌과 어머니 한실댁이 연학에게 살해당하게 된다. 그 충격으로 용란은 실성해 버린다.
 
계속되는 집안의 몰락을 지켜보면서도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김성수도 위암으로 죽는다. 결국, 용빈과 용혜가 통영을 떠나면서 작품은 끝난다.

▲유현목 감독의 영화 < 김약국의 딸들 >(1963) ⓒ 토지문학공원 누리집

시간이 있으면 나는 옛날의 흔적이 남아 있는 통영 거리를 걸어보고 싶었다. 통영 앞바다에서 김성수의 어장을 관리하던 용옥의 남편 서기두의 흔적을 찾고 싶었다. 미치광이가 된 용란이 발작하곤 했던 거리를 돌아보고 싶었다.

 

산양읍 미륵산 중턱의 박경리공원과 기념관

 

그러나, 늘 그렇듯 여정은 시간에 쫓긴다. 우리는 여수 진남관, 경복궁 경회루와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목조 건축물이라는 통영 시내의 ‘세병관(洗兵館)’을 서둘러 구경한 뒤 시내 남쪽 미륵도로 향했다. 유명한 해저터널로 이어져 있는 이 섬, 산양읍 신전리에 박경리 선생의 묘소가 있는 것이다.

 

박경리 (추모)공원은 통영시 산양읍 미륵산 중턱에 있는 양지농장 안에 있다. 선생이 세상을 떠났을 때, 농장 주인은 그이를 위하여 사유지 일부를 아낌없이 내놓았다. 통영시는 그 사유지에 추모공원을 조성했고, 내년까지는 ‘박경리 문학관’을 건립하기로 했다고 한다.

 

지방자치 시대가 되면서 지자체들은 ‘관광상품’을 만들어 내는 데 이골이 났다. 거의 잊히었던 실존 인물은 물론이거니와 고전소설의 주인공까지 자기 지역 사람으로 만드는 데 골몰한다. 뒤늦게 시인, 작가들이 그런 식으로 기려지는 걸 보면서 한편으로 정작 사람들은 그들 문인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싶은 생각마저 든다.

 

박경리 묘소를 찾는 사람들 가운데, <토지>나 <김약국의 딸들>, 아니 그이가 남긴 글 한 편이라도 제대로 읽은 이들은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을 쉬 버리지 못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문인들은 오히려 화석화된 기념관과 문학관, 거리 이름 따위로나 기억되는 것은 아닐까.

▲ 참배객들이 남긴 글이 담긴 항아리
▲ 육필 원고(위)와 마지막 산문(아래)

사흘 만에 날이 들더니 바다의 습기를 머금은 공기는 뜨겁고 역했다. 우리는 비스듬한 물매의 산기슭을 천천히 올라갔다. 묘소로 오르는 포장된 산길 주변은 고인과 관련된 시비와 친필원고를 새긴 돌 조형물 등이 홍접초와 베고니아 등의 꽃에 둘러싸여 있었다. 주변 잔디밭에는 배롱나무꽃이 화사했다.

 

선생의 연보를 새긴 안내판 앞에는 장독 두어 개와 남길 글이 있으면 단지 속에 넣어달라는 표지가 놓여 있었다. 뚜껑 열린 장독 안에는 참배객들이 남긴 편지가 담겨 있었다. 아무도 그게 궁금하지 않았는지 우리는 이내 거기를 지나쳤다.

 

선생의 묘소는 단출했다. 봉분도 높다기보다는 차라리 낮아 보였고, 봉분 뒤편을 빙 두른 흙벽도 소박했다. 애당초 선생의 무덤에는 비석은 물론이거니와 석물 하나도 없었다. 고인께서 화려한 것을 싫어했고, 유족의 뜻도 다르지 않아서라고 했다.

 

추모공원으로 꾸미면서 세운 것이리라. 봉분 앞 중앙에는 좀 두꺼운 몸피의 화강암 상석이 놓였고, 그 왼편으로는 검은 대리석에 선생의 이름을 새긴 표지석이 섰다. 한자로 쓴 이름은 선생의 자필 같아 보인다. 이름 아래 기록된 생몰연대(1926.10.28.~2008.5.5.)가 한 작가의 삶을 무심히 알려주고 있다.

▲ 추모공원으로 조성되기 이전의 박경리 묘소
▲상석 앞의 꽃은 조화고, 좌판 위에 놓인 것은 참배객들이 바친 솔방울이다 .

 

선생은 갓 스무 살이던 1946년에 결혼, 그해 딸을 얻었고, 1950년에 전쟁으로 남편을 잃었다. 그리고 58년. 그이가 딸 하나를 기르며, 소설가로 살아온 그 반세기를 무어라 표현할 수 있을까. 그이가 견뎌낸 그 고독했던 실존의 세월 동안 그이를 지탱해 준 것은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였다.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 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 시 <옛날의 그 집> 중에서

 

<사기>를 완성하기 위해 치욕적인 궁형(宮刑)을 감수한 역사가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 만큼 그이의 삶은 고통스러웠던가. 작가들의 예술적 열정을 ‘천형(天刑)’으로 표현하는 것은 단순한 문학적 수사가 아니라 작가들에겐 고통스러운 현실이었나 보다. 그이는 자신을 ‘눈먼 말’이라 이른다.

 

글기둥 하나 잡고
내 반평생
연자매 돌리는 눈먼 말이었네

아무도 무엇으로도
고삐를 풀어주지 않았고
풀 수도 없었네

영광이라고도 하고
사명이라고도 했지만
진정 내겐 그런 것 없었고

스치고 부딪치고
아프기만 했지
그래,
글기둥 하나 붙잡고
여까지 왔네

   - 시 <눈먼 말> 전문

 

묘소 상석 앞에 핀 야생화는 생화가 아니라 조화다. 한 친구가 그게 훨씬 낫다고 말한다. 생화가 말라 추하게 무덤 주변을 어지럽히는 것보다 조화가 낫다는 거다. 하기야 꽃에 따라 그 추모의 무게가 달라지지는 않을 터이다. 좌판 위에는 참배객들이 올려놓은 솔방울이 그득하다. 꽃이나 제물 대신 사람들은 인근의 소나무 열매를 바친 것이다.

 

묘소 앞에 둘러서서 묵념한 뒤 우리는 무덤을 등지고 소나무 사이로 저 멀리 바다를 바라보았다. 날은 맑았지만, 한려수도는 아련하게 멀어 보이기만 했다. 이제 작가는 ‘눈먼 말’, 연자매 돌리길 멈추고 고향의 맑고 푸른 바다를 내려다보며 언덕에 잠들어 있는 것이다.

▲ 묘소 앞 풍경 . 멀리 한려수도가 어렴풋이 보인다 .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 시 <옛날의 그 집> 중에서

 

그이는 이제 편안해졌는가. 주차장으로 내려오자, 그의 시 한 구절을 박은 입간판 하나가 방문객들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건넨다. ‘버리고 갈 것만 남’은 홀가분한 ‘늘그막’은 어떤 것일까를 곰곰 생각하며 우리는 박경리 공원과 통영을 떠났다.

▲ 가족여행으로 다시 찾은 통영. 완공된 박경리 기념관. (2015년 2월).
▲ 기념관 안 전시 사진 속의 박경리 선생
▲ 기념관 마당의 돌 구조물. 왼쪽은 <토지>의 '서(序)'를, 오른쪽엔 <김약국의 딸들>의 '통영'을 새겨놓았다.

 

2009. 8. 18.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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