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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다! 구미시 - ‘서약서’ 파문으로 가수 이승환 공연 무산

by 낮달2018 2024. 12. 25.

‘정치적 선동하지 않겠다’는 시대착오적 서약서 요구한 구미시장

▲ 구미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 금오산과 저수지인 금오지. '당신은 구미의 별'이라는 구조물이 시민을 반긴다. ⓒ 경북매일

크리스마스 날 공연할 예정이었던 가수 이승환의 공연이 이틀 전에 구미시가 대관을 취소하면서 무산되었단다. 그게 우리 같은 중늙은이에겐 무관한 일이긴 한데, 어째 듣고 있기가 거시기하다. 대관 취소의 대상이 되는 공연장은 구미문화예술회관이다.

 

구미시장은 왜 이승환 가수의 공연 대관을 취소했나

 

고 김수근(1931~1986) 건축가가 설계하여 1989년 10월에 개관한 구미문화예술회관(이하 회관)은 6,227평의 대지에 연면적 3,121평의 공연 시설이다. 1,183석의 대공연장과 283석의 소공연장, 각각 146평과 61평의 1, 2전시실에 야외 전시실(490평)까지 갖춘 곳이니 지방 소도시로선 자랑할 만한 시설이 아닐까 한다.

 

물론 시 소유의 공연장이니 대관 권한은 시에 있는 게 맞다. 그런데 지난 1989년 문을 연 뒤 35년 동안 대관을 허가했다가 취소한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하니, 이건 또 무슨 재변인가 싶다. 보도에 따르면 이 대관 취소 결정은 회관 주무자가 아니라, 김장호 시장이 직접 대관 취소 입장문을 발표했다고 한다.

▲ 구미문화예술회관. 고 김수근 건축가가 설계한 건물로 1989년 개관했다. 미술관도 박물관도 없는 구미에서 가장 중요한 문화시설이다..

애당초 25일 오후 5시 구미시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에서 ‘이승환 35주년 콘서트 - 헤븐(HEAVEN)’을 열 계획이었는데 지난 23일 구미시는 ‘예측할 수 없는 충돌 가능성’ 등을 이유로 공연장 대관 취소를 통보했다. 웬 충돌? 지난 12월 13일, 국회 앞에서 열린 탄핵 가결 촉구 집회에 이승환 씨가 참가하여 무료 공연을 한 것이 발단이다.

 

지역 보수단체의 이승환 탄핵 축하공연 반대’ 집회

 

그리고 이 ‘무엄한 딴따라’ 가수 때문에 열 받은 지역 보수단체의 반격(?)이 있었다. 지난 19일, 자유대한민국수호대 등 13개 보수단체는 경북 구미시청 앞에서 ‘이승환 탄핵 축하공연 반대’ 집회를 열어 “구미시는 탄핵 찬성 무대에 올라 정치적 발언으로 국민 분열에 앞장선 이승환 씨의 구미 콘서트 대관을 즉각 취소하라”고 주장했다.

 

이에 구미시에서는 대관 일자가 임박한 시기 이승환 측에게 공연장 안전 이용에 관한 서약서에 서명을 요구했고, 이를 이승환 측이 동의하지 않자, 콘서트를 취소한 것이다. 서약서란 “회관 공연 허가 규정에 따라 정치적 선동 및 정치적 오해 등 언행을 하지 않겠음”이라고 구미시에서 만든 서류를 말한다.

▲ 가수 이승환. 구미시의 서약 요구를 거부하면서 구미에서 공연이 무산됐다. 그러나 그는 잃을 게 없다.
▲ 가수 이승환이 구미시로부터 받은 서약서.
▲ 구미시청 자유게시판에는 이번 파동에 대한 시민들의 항의와 지지가 엇갈리고 있다.

아닌 21세기에 ‘정치선동 않겠다’는 서약 요구는 웬말

 

아닌 21세기에 웬 서약서? 감옥에서조차 사상전향서가 폐지된 게 언젠데, 이 난만한 21세기에 웬 서약서인가! 더불어민주당 구미갑·을 지역위원회가 “구미시는 보수단체와 콘서트 관객을 잠재적 범죄 집단으로 만들었고, 밝히지 않는 전문가 교수 그룹의 자문, 엉뚱한 부서의 위원회를 앞세워 구구절절 취소의 변을 늘어놓았다”며 “문화예술을 향유하고자 하는 시민은 안중에 없는가. 누구의 눈치를 보고 있는가. 당신은 시장에 맞지 않는다. 지금 당장 사퇴하라”고 밝힐 만하다.

 

시장은 왜 이런 황당한 결정을 내렸을까. 지역 주민들이나 보수단체의 눈치를 본 것일까. 시장의 속을 들여다볼 방법이 없으니 이런저런 짐작만 할 뿐이다. 김장호 시장 인적 사항을 검색해 보니 1969년생, 올해 55세다. 아직 젊다고 할 수 있겠는데, 이 사람은 아마 구미가 보수적인 지역이니 탄핵에 반대하는 주민들이 더 많다고 여겼던 걸까. 아니면, 보수단체의 서슬에 놀라서 그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여서 아예 탄핵 찬성 이승환 공연을 못하게 하는 게 좋다고 판단할 걸까.

 

서약서 요구 발상은 어디서 나왔을까

 

무엇보다도 그런 서약서를 요구하겠다는 발상은 누구의 머리에서 나온 걸까. 그리고 그런 서약 요구를 이승환이 받아들이리라고 생각한 걸까, 아니면 수용하지 않을 테니 되레 문제를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다고 판단할 걸까. 이런저런 짐작은 해보지만, 결론은 씁쓸하기 짝이 없다.

▲ 구미시 역대 민선시장. 3선 연임한 이가 2명, 7대 장세용만 민주당, 나머지는 모두 현재 여당 계열이었다.

구미는 지방자치제가 시행된 이후, 6번의 선거를 두 명의 보수 정당 후보가 각각 3선으로 채운 동네다. 제7회 지선에서 처음으로 민주당 후보가 시장으로 당선했고, 시의원도 후보를 낸 7선거구에서 모두 당선되는 이변이 있었다. 그러나 이는 다음 8회 선거에서 도루묵이 되었다. 그때 전임 민주당 시장을 누르고 김장호 현 시장이 70.29% 득표로 시장에 당선한 것이다. [관련 글 : 자유한국당 지지도 1경북, 민주당에도 볕이 들까 / 6·1 지선 결과, 구미는 ‘2018년 이전으로 다시 되돌려졌다]

 

된통 덮어쓴 곳은 구미시다

 

문제는 김 시장이 조자룡 헌 칼 쓰듯 시대착오적인 서약을 요구하면서 파행이 빚어졌는데, 결과적으로 된통 덮어쓴 곳은 구미시다. 아니 김장호 시장이다.

 

먼저 가수, 연주자, 프로듀서, 전공자, 평론가 등 음악인들 2,600여 명이 모인 ‘음악인선언 준비모임’은 23일 밤 ‘노래를 막지 마라!’는 제목의 성명을 내어 “구미시의 결정은 헌법적 가치를 정면으로 위반했다”라며 “김장호 시장은 공식 사과하라”고 촉구했다.

 

이승환 가수는 대관을 취소한 구미시장에게 예매자 100명과 함께 이승환 1억, 예매자 각 50만 원씩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한다고 한다. 정작 느닷없는 일격을 당한 이승환 가수는 잃을 게 없다. 논란이 세간에 알려지면서 이승환을 지지하는 팬들과 주요 정치인들의 공연 문의 및 러브콜이 폭주하였고, 2025년 3월까지 예정되어 있던 콘서트 일정이 7월까지로 대폭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 김수근 건축가의 설계로 세운 구미문화예술회관. 그러나 이 훌륭한 공연장에선 시민들을 끄는 뜻깊은 공연이 드물기만 하다.

역시 잃는 쪽은 구미시다. 성탄절 특수를 노리는 숙박업소는 취소 표로 타격을 입었고, 특히 공업도시에서 ‘문화와 예술이 흐르는 낭만 도시’로 이미지를 변화하려는 구미시의 문화예술정책은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었다. 이번에 알게 된 건데, 구미시청 직제 중에 문화체육관광국 낭만관광과가 있단다. 제대로 관광정책을 펴겠다는 것이었는데 이도 역시 적잖은 이미지의 손실을 입었을 것이다.

 

게시판에는 찬반이 교차하지만, 일단은 부정적 의견이 우세한 듯하다. <나무위키>에 따르면 24일 오전 구미시청사 앞에 경기 수원 거주 이승환을 지지하는 팬카페 회원이 ‘교통비, 숙박비, 취소 수수료를 포함한 비용을 구미시가 배상해 달라’는 손팻말을 들고 1인 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한편에는 이승환 콘서트 대관 취소를 환영하고 구미시의 입장을 격려하는 화환 10여 개가 전시됐다.

 

구미시장은 게시판에 오르는 ‘시장 응원’이나 화환에 취할 일이 아니라, 구미시가 이번 사태로 입게 될 이미지의 타격, 고리타분한 보수 여론이 우세한, 시대에 뒤떨어진 수구적 도시라는 인상을 두려워해야 마땅하다. 이는 시장의 조치를 엄호하는 시민뿐 아니라, 이번 사태를 안타까워하는 모든 시민과 함께 곱씹어 볼 문제이다.

 

 

2024. 12. 25.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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