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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선산(구미) 이야기

‘꽃신’을 신은 관세음보살

by 낮달2018 2024. 1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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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 광덕리 석조보살입상(경상북도 김천시 감문면 광덕리 산71)

*PC에서 ‘가로 이미지’는 클릭하면 큰 규격(1000×667픽셀)으로 볼 수 있음.

▲ 보물로 지정된 김천 광덕리 석조보살입상. 꽃신을 신고 있다.
▲ 김천시 감문면 광덕리 숯골마을 광덕 저수지 아래 보호각에 모셔진 석조 관세음보살 입상. 오른쪽에 저수지 둑이 보인다.

구미와 면한 김천시 감문면에 ‘보물’로 지정된 석조보살입상이 있음을 안 지는 꽤 오래되었다. 가 봐야지, 되뇌기만 하다 어저께 김천구미역에 다녀오는 길에 감문면 광덕리로 차를 몰았다. 감문은 삼한 시대 변한계 소국인 감문국(甘文國)에서 따온 이름이고, 감문에는 김천의 대표적 하천인 감천(甘川) 물길이 구미를 거쳐 낙동강으로 합류한다.

 

광덕리 석조보살입상은 김천시 감문면 광덕리 산71, 숯골이라 불리는 마을 저수지 뚝 아래 세워진 관세음보살상이다. 마을 저수지는 광덕 저수지인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탄동지(炭洞池)’로 적혀 있으니, ‘탄동’은 곧 ‘숯골’의 한자로 쓴 것이다.

 

1959년 광덕 저수지 확장공사 때 발견되었는데 지금은 보호각을 세워서 보존하고 있다. 석조보살입상이 서 있기엔 애매한 위치인데, 왜 그게 저수지에서 발견되었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인근 문수산에 있던 신라의 고찰 문수사와 관련된 불상으로 추정할 뿐이다.

 

석조보살입상은 화강암을 평평하게 다듬어서 돋을새김으로 조성한 관세음보살상이다. 관세음보살은 중생의 소리를 듣고 어디든지 몸을 나누어, 중생을 고통에서 구제해주는 보살로, 지장보살과 함께 불교 2대 보살, 문수보살과 보현보살까지 합하면 ‘4대 보살’로 일컬어진다.

▲ 관세음보살의 둥근 얼굴. 입술과 양볼에 떠오르는 미소는 편안하고 자비롭다.

김천 광덕리 석조보살입상은 경상북도 김천시 감문면의 일명 ‘숫골’이라고 부르는 마을 저수지 뚝 밑에 세워져 있다. 화강암을 다듬은 보살상의 머리에는 구슬로 만든 화려한 관(冠)을 쓰고 있고, 관 둘레에는 긴 뿔이 수평으로 나 있다. 이러한 특징은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강릉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국보)와 신복사지의 석조보살좌상과 같은 양식이라고 한다.

 

▲ 1980년대의 석조보살입상. ⓒ 한국학중앙연구원

둥근 얼굴은 살이 올라 둔중해 보이지만 입술과 양 볼에 떠오르는 미소는 편안하고 자비롭다. 옷은 양어깨를 덮는 천의(天衣)를 입었고, 신체는 풍만한 데 비겨 양팔은 빈약하게 표현되었다. 오른손에는 연꽃 가지를 들었고, 왼손은 가슴 앞에서 수평으로 들어 손끝을 아래로 내렸다. 전체적으로 풍만하고 화려한 모습이며 옷을 입고 있는 법, 관의 형식, 신체 표현 등에서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특이한 것은 이 보살상은 연화좌(蓮花座) 위에 서서 다시 연꽃으로 만든 신발을 신고 있다는 점이다. 관세음보살은 불교의 핵심 가치의 하나인 ‘자비’를 대표하는 보살이어서 보통 여성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인간을 초월한 상위 존재인 보살에게는 성별이 존재하지 않고, 불교 경전에서도 여성의 형상으로 규정짓지 않는다.

 

그러나 7세기 중엽 이후 동아시아에도 힌두교의 여성 숭배 신앙이 불교에 유입되면서 송나라와 고려에서 관세음보살의 여성적 이미지가 강조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광덕리 보살 입상을 새긴 석공도 관음보살이 여성이라고 의식하면서 이 불상을 조각한 것일지도 모른다.

▲ 머리에 쓴 원통형의 보관이나 풍만한 얼굴, 입가의 미소 등에서 광덕리 보살상과 비슷한 특징을 보여주는 보살상들.

언제쯤 보호각을 세웠는지는 알 수 없지만, 노천에 있을 때의 보살상 이미지(한국학중앙연구원)는 같은 조각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색감이나 분위기가 다르다. 아마 보호각을 세우면서 세척과 보호 조치가 있었기 때문일 터이다. 그나마 보호 창살이 높지 않아서 사진을 찍는 데 도움이 되었다. 전신 정면은 휴대 전화로 찍었다.

 

마을 어귀로 내려오니 거대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장자와 함께 서 있었다. 1982년에 보호수를 지정된 나문데, 수령은 당시 468년이니 이미 500년을 넘겼다. 나무높이는 15m, 나무 둘레는 8.3m다. 여전히 새파란 이파리를 빽빽하게 달고 있는 나무의 모습은 거대하면서도 균형 잡힌 모습으로 파인더에 의젓하게 들어왔다.

 

마을을 개척할 때 느티나무를 심어 마을이 있음을 알렸는데 지금도 마을 어귀에 웅장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이 느티나무는 옛날 인근 현의 수령들이 부임할 때마다 나무에 관인(官印)을 걸어 놓고 인수인계를 했다 하여 오수정(五授亭)으로 불리었다. 임진왜란 때 인근 다섯 고을의 수령들이 모여 나무에 관인을 걸어 두고 회의를 했다 하여 오인정(五印亭)이라고도 하였다고 한다.

▲ 숯골마을 어귀의 느티나무. 보호수로 지정된 이 나무의 높이는 15m, 나무 둘레는 8.3m, 수령은 500년을 넘겼다.
▲ 저수지 쪽에서 바라본 숯골마을의 느티나무. 실제로 이보다 훨씬 거대했으나 태풍으로 가지가 떨어져 나갔다고 한다.
▲ 이 나무는 옛날 인근 현의 수령들이 부임할 때마다 나무에 관인을 걸어 놓고 인수인계를 했다 하여 오수정으로 불리었다고 한다.

마을 입구에 ‘탄동’이라고 쓰인 이정표가 있다. ‘숯골’의 행정동 이름은 광덕 2리다. 광덕리는 탄동(炭洞)·가척(加尺)·장내(牆內) 등 세 마을로 구성돼 있는데, 가척은 ‘개자’, 장내는 ‘담안’ 등 우리말 이름으로 불린다. 숯골이라는 이름만으로는 ‘숯을 만드는 마을’을 떠올릴지 모르지만, 그 풍수적 유래가 있다.

 

탄동은 조선 초 해주 정씨가 난을 피해 와 살면서, 정씨(鄭)는 오행으로 화성(火姓)에 해당하므로 ‘불 화(火)’ 자가 들어 있으며 또 땅에 묻어도 변함이 없는 숯처럼 고고한 충절과 효심을 간직하자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김천의 향토지 가운데 하나인 <탄동지(炭洞誌)>가 이 마을에서 쓰였다.

▲ 솣골마을의 느티나무 앞의 마을 표석. 광덕리는 탄동과 가척, 그리고 장내마을로 이루어진다.

<탄동지>는 1600년대에 정후시가 필사본으로 저술한 21×33㎝ 크기에 68쪽 분량의 향토지다. 내용은 탄동의 마을 개척에 관한 것과 해주 정씨 일가 사적(事績)으로 해주 정씨 종가에서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숯골마을 동쪽에 광덕산이 솟아 있고, 마을 뒤로 감문면에서 가장 큰 저수지인 광덕 저수지가 있다. 저수지 아래로 넓은 평야지가 펼쳐져 벼농사가 발달했는데 최근에는 참외와 포도를 주로 재배한다고 한다. ‘광덕(廣德)’이라는 마을 이름이 자꾸 석조보살입상과 겹치면서 예사롭지 않게 느껴진다. 신라의 10구체 향가 ‘원왕생가(願往生歌)’를 지은 승려도 광덕이니 말이다.

▲ 1995년에 광덕리에 세워진 감로사의 와불. 터를 닦다가 발견한 300톤 화강암으로 조성한 가로 5m, 세로 2m의, 국내 가장 긴 석조와불이다.

부근에 절이 있는가 물어보려 했는데 그냥 돌아왔다. 돌아와서야 광덕리에 감로사라는 절이 있음을 알았다. 1995년에 지은 절로, 절을 지으려고 터를 닦던 중 땅속에서 발견한 300톤에 달하는 화강암을 조각하여 가로 5m, 세로 2m 크기로 만든 국내 최장 석조 와불이 있다.

 

언제 근처를 지날 때, 한 번 들러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와불을 물끄러미 들여다본다.

 

 

2024. 1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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