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수확 – 가지와 고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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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하순, 가을 옥수수를 수확하고 나서 한 달가량 텃밭은 잊고 지냈다. 가서 옥수수도 뽑아내고, 대파도 정리하고, 들깨도 어찌할까를 정해야 하는데, 당장 급하지 않다고 차일피일했다. 결국 지난 10월 14일에 텃밭을 찾았다. 옥수수 대를 뽑아내고, 토란도 수확해야 했다. [관련 글 : 가을 옥수수, 절반의 수확]
오래 찾지 못했지만, 때가 이미 추분과 한로까지 지난 터라, 밭은 예전과 달리 어지럽지는 않았다. 이미 수확을 끝낸 옥수수는 말라서 죽어가고 있었고, 밭 주변의 풀도 더는 번지지 않고, 말라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내가 고추를 따는 동안, 나는 말라비틀어지고 있는 옥수수 대를 하나씩 뽑아냈다.
뿌리가 꽤 깊이 박힌 놈은 삽을 깊이 찔러 들쑤셔 놓고서 뽑아냈다. 뽑아낸 옥수수 대는 바로 거름더미 위에 쌓았다. 그리고 토란 대(줄기)는 낫으로 베어내고, 뿌리 쪽의 알줄기는 일일이 따서 봉지에 담았다. 딴 고추를 갈무리하고 온 아내는 정성스레 알줄기를 크기와 상관없이 모두 봉지에 담고, 알줄기를 베어낸 줄기도 따로 담았다.
토란은 ‘흙 난초’[토란(土蘭)]가 아니라, ‘흙알’[토란(土卵)]이다. 토란의 줄기(대)는 다듬어 말려 놓았다가 육개장·닭개장, 추어탕 따위에 들어가는 나물로 쓴다. 생 토란대는 아삭한 맛을 내지만 말린 토란대는 개장의 강한 맛을 중화해 차분하게 만들어 주면서도 씹히는 맛을 곁들여 준다. 말린 토란대는 비빔밥 재료로도 손색이 없다.
나는 별로 즐기지 않지만, 알줄기는 딸애가 무척 좋아한다. 아내가 알줄기 작은 것도 버리지 않고 봉지에 담는 뜻이다. 토란의 알줄기는 껍질을 벗겨내면 하얀 육질을 드러내는데, 이를 국으로 끓이면 아주 담백하면서 독특한 식감을 주는데, 딸애는 이를 즐기는 것이다. [관련 글 : 토란, 토란국, 토란대]
병충해를 입어 영 시원찮다고 퉁을 받았던 가지는 그새 거의 반 팔만 한 크기의 열매 여러 개를 달고 힘겹게 서 있었다. 따서 비닐봉지에 넣어 와 바구니에 담으니 그 크기가 예사롭지 않다. 그동안 신통찮다며 이런저런 퉁을 준 일이 오히려 민망할 정도다.
삭혀서 먹으려고 따온 고추도 마찬가지다. 병충해 때문에, 진작 빨갛게 익히는 건 포기해 버려두었던 고추는 마치 버려둔 자식이 잘 자라서 돌아온 듯 반갑고 대견했다. 병충해 때문에 더는 기대하기 어렵다고 간간이 지청구만 해댄 작물들은, 그러나 혼자서 자기 한계를 이겨내고 마지막 열매를 맺어온 것이었다.
“제대로 크지도 않고, 시원찮다고 나무라기만 한 게 어쩐지 미안하구먼.”
“정말! 그런데 이렇게 마지막까지 임자한테 수확을 안겨 주네요.”
이 대목에서 “역시 흙은 위대하다”라고 이야기하면 뒤늦게 작물과 흙에 미안한 마음을 면해 보려는 꼼수처럼 느껴질까. 그러나 어쨌든 흙은 자기 몫의 구실을 다하여 뿌리 내린 작물들의 마지막 결실을 도운 것이다. 이 소꿉장난 같은 텃밭 농사가 이럴진대, 흙과 더불어 살아가는 농민들의 삶에서 흙은 위대한 어머니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일흔 나이를 앞두고 얼치기 농부들은 이제야 그걸 희미하게 깨닫고 있지만, 내년엔 텃밭을 다시 가꿀 것인지는 결정하지 못했다. 감당하기 어렵다는 마음에 뒷걸음치다가도 흙과 작물이 함께 빚어내는 창조적 생산의 과실 앞에서 마음이 흔들리곤 하기 때문이다. 내년의 일은 내년에 생각하자, 우리는 우정 그렇게 갈무리하고 텃밭을 떠났다.
2024. 10. 16.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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