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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란, 토란국, 토란대

by 낮달2018 2020. 1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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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확한 토란으로 끓인 토란국과 개장에 쓸 토란대

▲ 토란은 천남성과의 인도 인도네시아 등 열대 원산의 여러해살이풀이다. '토란'은 '흙알'이다.

지지난 주말에 장모님의 밭에서 토란을 수확했다. 일손도 마땅치 않은 데다가 밭 위에 쓰러진 굵직한 아까시나무에 깔려 있어 수확하지 못했던 토란이었다. 트렁크에 넣어 다니던 비상용 톱으로 그걸 잘라내고 서둘러 알줄기를 캐냈다. 씨알은 그리 굵지 않았으나 꽤 양이 많았다.

 

그 알줄기를 트렁크에 싣고 돌아왔다. 딸애가 젊은 애답지 않게 별식으로 토란국을 매우 즐기는 것이다. 아이는 토란 알줄기를 보더니, 반색했고 이내 그걸 손질하기 시작했다. 아이가 토란 알줄기를 잔뜩 넣고 끓인 토란국에 맛을 들인 것은 언제쯤일까.

 

‘토란’은 식용하는 ‘알줄기’

 

토란은 천남성과의 인도·인도네시아 등 열대 원산의 여러해살이풀이다. 토란은 ‘흙 난초’[토란(土蘭)]가 아니라, ‘흙알’[토란(土卵)]이니, 곧 식용하는 ‘알줄기’를 가리킨다. 토란의 줄기는 땅속에서 거의 자라지 않고 비대해져 알줄기나 덩이줄기가 되는 것이다.

 

한국의 재래종 토란은 대개 일찍 자라는 조생으로서 줄기가 푸르고 새끼 토란이 여러 개 달리며 알이 작다고 한다. 토란은 약간 아린 맛이 나는데 이 맛은 소금물에 담그거나 삶으면 제거된다. 토란의 끈적끈적한 물질은 무틴인데 이는 신장을 튼튼하게 해주며 소화를 돕고 노화를 방지한다.

 

아이는 거실에 앉아서 일회용 비닐장갑을 끼고 차분하게 토란의 껍질을 벗겨 냈다. 내가 껍질을 벗겨 낸 하얀 육질의 토란을 만지려니까 아이는, 잘못하면 피부가 가려워질 수 있다고 말린다. 토란이 강한 알칼리성 식물이라서 그렇다는 것이다.

▲ 수확한 토란에서 얻은 토란의 알줄기.
▲ 일회용 비닐장갑을 끼고 차분하게 껍질을 벗겨 낸 하얀 육질의 토란.
▲ 토란으로 끓인 토란국. 딸애는 이 국의 담백한 느낌이 좋다며 토란국을 즐긴다.

다음 날 아침, 토란국이 식탁에 올랐다. 음식의 빛깔도 맛을 내는 요소라고 보면 토란국은 꽝이다. 된장을 풀고 배춧잎을 넣어서 끓인 국은 구수한 맛이 있지만, 빛깔로 치면 영 아니다. 국 안에 익은 토란은 약간 노란빛이 나 언뜻 보면 감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딸애의 별식 ‘토란국’

 

인터넷에 들여다보면 토란국 관련 조리법은 대체로 갈비나 양지머리 따위의 쇠고기를 쓰는 방식이 태반이다. 하긴 워낙 육식이 일상화되다 보니 고기가 들어가지 않으면 오히려 서운할 듯도 하다. 그러나 시골에서 자란 우리 내외에겐 고기 넣은 토란국은 생소하기만 하다. 우리 집 토란국은 익숙한 배춧국에다 토란이 들어갔을 뿐이다.

 

“뭐라고 할까. 감자보다 훨씬 타박타박하다는 느낌이 있는데 그 느낌이 담백해서 아주 좋아요.”

 

딸애의 고백이다. 담백하다는 데에는 이의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막상 어떤 맛이라고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묘한 식감을 선사한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은 묘한 여운을 남긴다. 인상적인 맛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토란에 손이 가는 것은 그런 이끌림 때문이다.

 

▲ 인터넷에 오른 말린 토란대

딸애와 아내는 비교적 토란을 즐겨 먹지만, 나는 좀 덤덤한 편이다. 그릇에 서너 개의 토란이 들어 있으면 한두 개쯤 입 안에 넣고 우물거리는 수준이다. 특별히 입에 당기는 맛이 아니면서도 굳이 그게 싫지도 않은 까닭이다. 대신 나는 토란과 배춧잎이 우러난 국물을 음미하는 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실 나는 알줄기보다는 다듬어 말려 놓았다가 개장 따위에 들어가는 나물로 쓰는 토란대가 훨씬 좋다. 생 토란대는 아삭한 맛을 내지만 말린 토란대는 개장의 강한 맛을 중화해 차분하게 만들어주면서도 씹히는 맛을 곁들이기까지 하니 말이다. 비빔밥 재료로도 말린 토란대는 손색이 없다.

 

토란 잎자루와 ‘물방울’

 

토란은 잎사귀가 독특하다. 대체로 심장 모양을 한 잎자루는 길이가 30~50cm, 나비는 25~30cm나 된다. 이 넓적한 잎사귀의 표면은 미끄럽기 짝이 없다. 거기 떨어진 이슬이나 빗물은 옹근 물방울 형태 그대로 남아 있다. 이른바 ‘표면장력’이라고 배운 그 현상이다.

▲ 토란의 넓쩍한 잎사귀에 굴러 다니는 물방울. 이른바 '표면장력' 현상이다.
▲ 장모님의 토란밭. 하우스 한쪽에 토란을 갈았고, 오른쪽은 호박이다.

시인 복효근이 ‘토란잎에 궁그는 물방울같이는’이라는 시를 쓰게 된 것은 순전히 그 물방울 때문이다. 시인은 토란잎에 남아 있는 그 물방울을 일러 ‘궁글궁글 투명한 리듬을 빚어내는/둥근 표정’이라 노래했고, ‘토란잎이 잠자면 그 배꼽 위에/하늘 빛깔로 함께 자’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토란잎 위에서 오롯이 맺혀 있는 그 물방울을 일러 ‘내 마음’으로, ‘토란잎이 물방울 털어내기도 전에/먼저 알고 흔적 없어지는 그 자취’를 ‘사랑’이라 부르면 안 되느냐고 반문하고 있다. 아무렴, 그걸 사랑이라고 부르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이제 장모님의 밭은 수확을 마쳤다. 지난여름 내내 이 밭이 주인에게 베푼 생산물은 정말 얼마였던가. 배추와 무, 고추, 가지, 깨, 호박, 땅콩 등 풍성한 수확의 몫을 다하고 난 밭은 겨우살이로 들어갔다. 내년 봄을 기약하는 마음으로 지난여름에 찍은 토란밭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2012. 11. 19.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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