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는 달라도 느티나무와 벚나무는 많이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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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먹을 만큼 먹으면 ‘어른’ 대접을 받고, 세상사에 대한 이해가 여느 젊은이들보다는 나아진다고 할 수 있긴 하다. 그건 학력이나 경제적 능력 따위에 영향을 받기보다는 여러 삶의 곡절을 겪으면서 얻어진 ‘경륜’ 같은 것이다. 그러나 치열한 삶의 장면에서 얼마간 비켜 나면서 문득 세상에 대한 자신의 이해가 참으로 보잘것없다는 걸 내가 깨달은 것은 50대 중반을 넘어서면서였다.
풀꽃에 이은 나무 공부 … 새로 만난 느티나무
이런저런 현학적 어휘를 주워섬기며 삶을 통찰한 것처럼 잔뜩 모양을 내긴 하지만, 정작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풀꽃이나 나무 이름조차 하나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그리 낯설지도 않은 듯한데, 막상 만나는 풀꽃마다 그 이름이 막히는 상황을 겪으면서 나는 씁쓸히 입맛을 다시곤 했다.
시골 출신이 아닌데도 벗들이 이런저런 풀꽃을 주제로 대화를 이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내 삶의 이력을 되돌아보곤 했다. 퇴직을 준비하려고 고향 근처로 돌아와 산과 들을 다니며 절로 눈에 익은 풀꽃들을 하나씩 알게 된 것은 그런 깨우침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풀꽃이나 나무는 무심히 지나치면 ‘바람이나 안개’의 일부처럼 느껴질 뿐이지만, 그것은 이름을 알게 되면 예사롭지 않은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게 된다. 김춘수 시인의 시구를 빌리면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인 것이다.
이름을 아는 것, 유의미한 관계의 출발점이라는 것은 인간관계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안다’라는 것의 의미는 매우 복합적인 층위가 있지만, 김춘수의 ‘꽃’은 ‘이름’을 부르는 행위를 통해서 존재의 본질에 대한 인식이 이루어진다는 전제 위에 서 있다. 인간 사회에서 ‘이름’을 아는 것은 인식의 출발점일 뿐이지만 꽃과 나무는 좀 다르지 않나 싶다.
인격적 상호 관계가 불가능하지만, 꽃과 나무는 이름을 아는 것만으로도 차원이 다른 관계가 열릴 수 있다. 퇴직 이듬해인 2017년에 쓴 글에서 나는 ‘꽃과 나무 알기 – 관계의 출발, 혹은 삶의 확장’이라고 썼다. 당시 1년여 산을 오르내릴 때마다 한 번 더 눈여겨 바라보는 것은 내가 ‘아는 꽃’이고 ‘아는 나무’다. 그때 나는 생강나무의 성장과 청미래덩굴의 생육 상태를 나날이 살펴보았었다.
이름은 안다는 것은 곧 의미 있는 관계의 출발점이다. “거기에 가면 좋은 꽃이 많아.”라고 하는 것보다는 “거긴 분홍낮달맞이꽃이 지천이야.”라고 말하는 것은 전혀 다르지 않은가. 이름을 불리는 순간부터 꽃과 나무는 단순한 객관적 사물에서 ‘상관물(相關物)’이 될 수 있는 존재로 바뀌는 것이다.
- 꽃과 나무 알기- 관계의 출발, 혹은 삶의 확장 중에서
그 뒤에 나는 무릎이 시원찮아 산은 오르지 못해도 들로 나가는 일은 멈추지 않았다. 자연 길가에서 만나는 풀꽃들 가운데 아는 이름의 목록이 늘어갔고, 그것은 천천히 진화를 거듭했다. 처음엔 꽃이 필 때 등 특정한 시기에만 보이던 이름이 시간이 지나면서 어린싹일 때부터 꽃이 지고 난 뒤의 모습까지도 갈무리할 수 있게 될 정도가 되었다.
풀꽃과 나무를 만나며 확인하는 ‘삶의 확장’
꽃과 나무 알기를 ‘삶의 확장’이라고 표현한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우리가 자기 삶과 이어진 세계의 일부라도 제대로 인식할 수 있다면 그것도 당연히 ‘삶의 확장’이라 해도 무방할 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짧은 글에서라도 ‘여러 종류의 풀꽃’으로 대신할 만한 상황도 ‘꽃다지와 매발톱꽃, 봄까치꽃, 애기똥풀’이라고 쓰면 훨씬 그 의미의 외연이 넓혀진다는 얘기다.
나는 산수유와 생강나무, 씀바귀와 고들빼기, 억새와 갈대를 구분하고, 텃밭에 끈질기게 돋아나는 바랭이와 괭이밥을 말할 수 있는 자신을 내심 매우 대견하게 여긴다. 그건 내가 교육을 통해서 얻은 여러 잡다한 지식이나 인식만큼이나 내게 소중한 자산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근년에 들어서 산수유와 느티나무, 벚나무 등을 새로 확실하게 알게 되면서 나는 그것을 매우 기껍게 받아들였다. 흔히 느티나무는 정자(亭子)나무, 또는 당(堂)나무의 주요 수종이지만, 나는 주변에서 느티나무를 보지 못하며 자랐다. 고향 마을에서 정월대보름에 동제를 올리던 당나무는 수령 200년의 왕버들이었고, 이웃 마을의 당나무는 수령 450년의 회화나무였다. 이들 동네의 수호신으로 기려진 나무를 우리는 ‘당수 나무’라고 불렀는데, ‘당수(堂樹)’는 ‘당나무’의 뜻이었던 듯하다.
나무는 주로 잎으로 구분하는데, 고목이 된 나무의 잎은 눈앞에서 쉽게 확인할 수 없으니, 눈이 나쁜 나는 대체로 그걸 확인하기가 쉽지 않았다. 근년에 들면서 잎뿐 아니라, 나무껍질도 수종을 구분하는 데 쓸모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소나무나 배롱나무는 껍질만 봐도 단박에 수종을 알아차릴 수 있지 않은가 말이다.
느티나무와 벚나무의 구별 - 잎사귀와 껍질눈을 보라
느티나무는 느릅나뭇과의 낙엽교목이다. 나는 늘 고목만 생각했지만, 요즘은 조경수로도 많이 심는 나무다. 느티나무는 어릴 때의 성장이 빠르고 비옥한 땅에서 잘 자라며 햇볕을 좋아한다. 높이는 26m, 지름은 3m에 이르며, 가지가 고루 사방으로 자라서 수형이 둥글게 되는 경향이 강하다고 한다.
느티나무는 정자나무로 사랑받는데, 이는 수관(樹冠 : 나무의 가지와 잎이 달린 부분으로 원 몸통에서 나온 줄기)이 크고, 고루 사방으로 퍼져 짙은 녹음을 만들며, 병충해가 없고 가을에는 단풍이 곱게 들기 때문이다.
동네의 초등학교에서 지난해 여름부터 맨발 걷기를 하고 있는데, 황톳길에 면한 울타리 주변에는 느티나무와 이팝나무, 그리고 잣나무가 이어진다. 시간이 넉넉하지 못할 땐 초등학교보다 가까운 중학교 운동장을 이용하기도 하는데, 여기도 울타리를 타라 이어진 나무는 느티나무다.
느티나무 잎은 좀 길쭉한 편인데, 묵은 나무 같은 경우는 벚나무와 잎의 생김새가 헛갈렸다.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둘을 구분하는 법이 꽤 상세하게 나와 있다. 벚나무는 장미과의 낙엽교목으로 과가 다르지만, 잎은 느티나무와 닮았다면 닮았다.
중학교 울타리의 느티나무 가운데 세 그루쯤은 유달리 잎의 빛깔도 짙고, 잎도 크고 둥근 듯하여 벚나무일 거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느티나무와 벚나무를 구별하는 법을 찾아보니 아뿔싸, 내 짐작은 틀렸다. 벚나무라고 봤던 것도 느티나무였다.
분류가 각각 느릅나뭇과와 장미과로 다르지만, 느티나무와 벚나무는 잎의 모양과 톱니에서 차이가 있다. 느티나무의 잎은 뾰족한 타원형으로 가장자리 톱니는 벚나무보다 크고 둥글다. 벚나무 잎은 둥글고 느티나무보다 크며, 가장자리 톱니는 날카롭고 촘촘하다.
또 나무껍질(수피)에서도 차이가 있는데, 줄기에는 공기 순환을 위한 숨구멍으로 ‘껍질눈’이라고 부르는 가로무늬 줄이 있다. 그런데 느티나무는 이 껍질눈이 직선으로 선명하게 보인다. 그러나 벚나무의 껍질눈은 굵다랗고 불규칙한 회갈색의 가로무늬다.
구미의 지산 샛강생태공원의 벚나무들도 꽤 고목이다. 그러나 벚나무 고목은 최대 높이가 15m(자료에 따라 서로 다른다)이고, 지름은 70cm 정도다. 거기 비기면 느티나무는 전통 마을 공동체의 당산나무로 쓰이는 수종으로 높이가 26m, 지름도 3m에 이른다.
느티나무는 ‘세월’, 벚나무는 ‘상춘’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충청북도 괴산군 장연면 오가리 느티나무가 국내의 느티나무 중 최고령이고, 규모도 가장 크다. 이 나무의 나이는 약 800살 정도, 높이 30m, 가슴높이의 둘레 7.66m의 상괴목(上槐木)과 높이 20.40m, 가슴높이의 둘레 9.24m의 하괴목, 그리고 상괴목 옆에 있는 높이 15m, 가슴높이의 둘레 4.45m의 작은 느티나무 등 세 그루의 느티나무로 구성되어 있다.
구미 지역에도 무을면 원1리에 있는 수령 330년의 느티나무를 비롯하여 20그루 이상의 느티나무가 흩어져 있다. 원1리의 느티나무는 높이 16m, 가슴높이 둘레 4.8m, 나무갓 너비 28m인데, 당나무로서가 아니라, 동네가 정자나무가 없어서 심은 나무라고 한다.
나라 안에서 가장 오래된 벚나무는 전남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화엄사 올벚나무다. 이 나무는 나이가 약 300살 정도로 추정(380년이라는 자료도 있다)되며, 높이 12m, 뿌리 부분 둘레 4.42m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있다. 병자호란(1636) 이후 인조는 오랑캐에게 짓밟혔던 기억을 되새기며 전쟁에 대비하고자 활을 만드는 데 쓰이는 벚나무를 많이 심게 했는데, 그 당시에 심은 나무 중 한 그루라고 한다.
벚나무는 꽃도 좋지만, 잎이 짙푸르게 바뀌면서 연출하는 신록과 녹음도 아름답다. 수종이 따라 다르긴 해도 가을 단풍도 고운 편이다. 한때 벚나무와 벚꽃은 일제강점기에 도입된 이래, 창경원 밤 벚꽃놀이에서 드러난 일본식 유흥과 민족의식 등이 뒤섞이고 원산지 논쟁을 거치면서 꽤 부정적인 여론이 일기도 했다. [관련 글 : 벚꽃과 ‘사쿠라’]
그러나 왕벚나무는 제주도와 전라북도 대둔산에서만 자생하는 우리나라 특산종이라는 게 밝혀지면서 벚꽃을 일본문화의 표상쯤으로 이해하는 데 대한 성찰이 이어졌다. 벚꽃 철에 몰리는 사람들의 의식에 거기 담긴 ‘왜색’의 그림자는 이미 잊힌 지 오래고 전국 곳곳에서 벚꽃을 즐기는 이들로 봄은 깊어 간다.
가을이 오면, 지역에 가보지 못한 동네의 당나무나 정자나무를 한번 돌아볼까 한다. 어쨌든, 느티나무와 벚나무를 구별할 수 있게 되면서 나는 이제 나무도 그냥 스쳐 지나가지 않고 눈여겨 들여다보게 된 것을 스스로 기꺼워하고 있다.
2024. 7. 23.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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