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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풀꽃 이야기

‘이화(梨花)’로 불리는 배꽃, 그 청초(淸楚)한 애상(哀傷)의 심상

by 낮달2018 2024. 4.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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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초한 꽃으로 달콤한 맛의 과일로 함께한 ‘배’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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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는 장미목 장미과에 속하는 관속식물로 낙엽 활엽 교목이다. 꽃은 4~5월에 피고 열매는 9~10월에 다갈색으로 익는다. ⓒ pixabay
▲ 우리 동네 카페 뒤 산기슭에 핀 배꽃. 배꽃의 속성은 청초, 결백, 냉담, 애상이다.

 

시가의 ‘소재’로 쓰인 배꽃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은한(銀漢)이 삼경(三更)인 제

일지 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야 알랴마는

다정(多情)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 이조년, 『해동가요(海東歌謠)』·『청구영언(靑丘永言)』·『병와가곡집(甁窩歌曲集)』

 

고려 후기 성주 출신의 문인 매운당(梅雲堂) 이조년(李兆年, 1269~1343)의 평시조 ‘다정가’다. 배꽃이 활짝 핀 달밤의 정취를 노래한 감각적이고 애상적인 작품이다. 이화는 ‘배나무 리(梨)’, 배꽃을 가리키는 한자어로 오얏(자두)꽃을 뜻하는 ‘이화(李花)’와는 한자가 다르다.

 

요즘은 벚꽃이 봄꽃을 대표하고 있지만, 우리 고전문학에서는 벚꽃 대신 배꽃이 소재로 쓰였다. 고려 후기의 다정가 말고도 조선조 기생 시인 매창(梅窓, 1573~1610)이 당대의 문사 유희경(1545~1636)을 생각하며 지은 시조에서도 배꽃을 노래했다.

 

이화우(梨花雨) 흩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임

추풍낙엽(秋風落葉)에 저도 나를 생각하는가.

천 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하노라.

     - 매창, 『가곡원류(歌曲源流)』

 

이 시는 비처럼 배꽃이 흩날리는 때의 이별을 노래했다. 화자는 시간의 흐름과 함께 배꽃과 낙엽이 지는 하강의 이미지로 이별의 슬픔과 임에 대한 그리움을 묘사하며 그 정서를 심화한다. 비처럼 흩날리는 배꽃의 이미지를 빌어온 감각적 이미지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 지산샛강생태공원 앞의 배나무.

삼국시대 이전부터 자생했을 ‘배의 역사’

 

배는 장미목 장미과에 속하는 관속식물로 낙엽 활엽 큰키나무(교목)이다. 꽃은 4~5월에 피는데 열매는 9~10월에 다갈색으로 익는다. (일반) 배는 과수로 밭에서 기르며, 기본종인 돌배나무에 비해 잎과 열매가 크고, 많은 재배 품종이 있다. 일본 원산으로 우리나라 전역에서 널리 재배된다.

 

돌배와 같은 야생종은 삼국시대 이전부터 우리나라에 자생했을 것으로 보인다. 역사 기록에 ‘이현(梨峴)’과 같은 지명이 전하는데, 이는 배나무가 많은 고개, 즉 ‘배 고개’이니 그 시대에도 배나무가 흔했을 거로 추정하는 근거가 된다.

 

현재 대구와 대전에 각각 이현동이 있고, 서울에는 ‘배오개’라는 한글 이름 지명이 전한다. ‘배오개’는 ‘배 고개’에서 ‘ㄱ’이 탈락한 형태다. 이는 ‘송현(松峴)’, ‘솔고개’라는 지명이 서울과 대구 등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지역의 특징으로서 배의 존재를 드러내는 흔적이라고 볼 수 있다.

▲ 배나무를 언급한 문헌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삼국사기>의 연리지 기록이다. ⓒ 나무위키
▲ 배꽃이 만개한 중국의 어느 농원의 배나무 고목

배나무를 언급한 문헌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삼국사기>로 고구려 양원왕(재위 545~559) 때 왕도의 배나무가 서로 맞붙어 있다는 ‘연리지’의 기록이 전한다. 북송의 <신당서>에서는 발해의 배나무를 언급하였으며, 고려시대에는 배나무를 심어 소득을 높이도록 나라에서 권장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에도 배는 달콤한 맛의 귀한 과일로 수익 작물이었다는 얘기다.[관련 글 : 달고 아삭한 우리 배, 신품종·신기술로 소비자와 만나다]

 

하지만 배의 품종을 따지고 재배 기술이 발달한 것은 조선시대부터다. 배의 명산지와 여러 재래종이 언급됐는데 그중에서도 ‘함소리’와 ‘교리’는 문헌상에서 가장 맛있는 배로 전한다. 문인 서거정(1420~1488)은 ‘함소리’의 맛에 대해 ‘한 입 씹으니 혀 밑에 파도가 이는 것을 알겠다.’라는 기록을 남겼다.

 

중국의 약학서 <본초강목>에서도 함소리가 향기로운 즙이 넘치며 능히 병을 치료할 수 있는 배로 소개할 정도였다. ‘교리’의 맛도 훌륭하여 시인 이응희(1579~1651)는 ‘눈을 머금은 듯, 서리를 삼킨 듯하니 굳이 신선의 음료를 마실 필요가 없다.’라고 적었다. 배가 ‘조율시리(棗栗枾梨)’의 하나로 제수로 오르기에 이르렀다. [관련 글 : 조율시리(棗栗枾梨)’의 으뜸 대추이야기]

 

‘이화학당’의 배꽃과 그 속성

 

배꽃은 19세기 후반 선교사 메리 스크랜튼(1832~1909)이 문을 연 이화학당의 이름으로 다시 떠오른다. 정동 언덕에 문을 연 이 학교에 고종은 ‘배꽃같이 순결하고 아름답다’라는 뜻으로 ‘이화학당(梨花學堂)’이란 교명을 하사하며 국내 최초 여학교의 탄생을 축복한 것이다.

 

이화여대 누리집에는 이화를 소개하면서 그 속성으로 ‘청초(淸楚), 결백(潔白), 냉담(冷淡), 애상(哀傷)’을 들고 있다. “화려하지 않으면서 맑고 깨끗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음”이 청초이고, “깨끗하고 흼”이 결백이다. “태도나 마음씨가 동정심 없이 차가움”이 냉담이고, 애상은 “슬퍼하거나 가슴 아파함”이다.

▲ 우리 동네 카페 뒷산 기슭에 핀 배꽃. 지난해에도 살구와 매화를 찍느라 드나든 곳인데 이게 배나무인지는 몰랐다.

‘청초’와 ‘결백’은 한 몸과 다름없지만, ‘냉담’은 앞의 성질과 꽤 거리가 멀다. 그런데 ‘애상’은 나머지 속성을 무너뜨리는 성질이다. 청초하고 결백하면서도 차가운 이 꽃이 왜 ‘애통’의 정서를 드러내는가. 만개한 배꽃을 그윽이 들여다보면 그 이유가 분명해진다.

 

배꽃이 환기하는 ‘애상’의 정서

 

배꽃의 흰빛은 매화나 살구, 벚꽃과는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나머지 꽃들이 연한 분홍 기가 비친다면 배꽃의 그것은 순백의 백색이다. 배꽃을 볼 때마다 나는 소복의 흰빛을 떠올리곤 한다. 배꽃이 환기해 주는 애상의 정서는 바로 여기서 비롯하는 것이다.

 

지산 샛강생태공원 앞 도로변에 배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복사나무 한 그루와 나란히 선 이 나무를 무심히 지나치다가 꽃이 피고서야 그게 배나무라는 걸 알았다. 동네 카페 뒤쪽의 산기슭에 조팝꽃과 함께 하얀 꽃이 피었길래 가서 확인해 보니 그것도 배꽃이었다.

 

지난해 매화와 살구꽃을 찍느라 드나들던 곳인데, 꽃이 피기 전이어서 그게 배나무라는 걸 몰랐던가 보다. 샛강의 배나무보다는 조금 어린나무다. 고동색과 연녹색이 뒤섞인 연약한 이파리와 함께 어우러지는 꽃잎은 다섯 장, 가장자리에 얕은 물결 모양의 주름이 있다. 꽃술은 진하고 약간 붉은빛을 띠며, 필 무렵에는 분홍이었다가 점차 검어진다. 화사한 분홍이었다가 이내 검은 점으로 바뀌는 꽃술은 바로 이화가 청초, 결백의 품성을 거듭 환기하는 것이다.

▲ 배꽃이 피는 계절에 담근다고 해서 '이화주'라는 이름이 붙었을 뿐, 배꽃이 들어가지 않는다. 시중의 이화주들.

배꽃이 피는 계절에 담근 전통주인 ‘이화주(梨化酒)는 이름과는 달리, 배꽃을 넣어서 빚은 술은 아니다. 술의 빛깔이 눈처럼 희고 향이 좋아 ’백설향(白雪香)‘으로도 불렸다. 이화곡(梨花穀)이라는 쌀누룩을 이용한 전통 탁주로 고려시대부터 빚어 마시기 시작하였다는데, 〈산가요록(山家要錄)〉(1459), 〈수운잡방(需雲雜方)〉(1540),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1670) 등 여러 문헌에 소개되어 있다.

 

배가 익어서 시장에 나오려면 조생종의 경우는 8월에, 나머지는 대체로 9~10월이 되어야 한다. 요즘 과일값이 워낙 고공 행진을 하게 되자, 수입 과일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고 한다. 사과와 배 귤 대신 오렌지, 수입 포도, 파인애플 등의 매출이 늘었다고 한다.

▲ 국산 배 품종들. 농촌진흥청의 '그린 매거진'에서 가져온 사진을 재구성했다.

기후 문제로 날씨가 변동이 심하여 참외 같은 여름 과일도 생산량이 줄어서 농민들의 시름이 깊다고 한다. 매일 운동 가는 길에 배꽃을 먼빛으로 살펴보고 지나면서 깊어 가는 봄을 가늠해 본다.

 

 

2024. 4. 15.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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