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점 행상이 된 대기업 간부 출신의 옛 친구와 나눈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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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어영부영 내년이면 칠순이다. 그러나 인간은 생물학적 나이에 연연하기보단 스스로 느끼는 감각에 훨씬 더 익숙하다. 나는 때때로 스무 살이나 서른몇의 청년인 듯하기도 하고, 마흔을 갓 넘긴 장년이거나 쉰 고개를 넘긴 초로라고 자신을 인식하곤 한다는 말이다.
다시 만난 옛 친구, 연화지에서 노점을 펴다
지난 3월 말에 김천 연화지(鳶嘩池)에서 고교 동기인 옛 친구를 다시 만났을 때, 마치 50년 전으로 돌아간 듯한 심상한 느낌으로 그와 담소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여러 해 전부터 축제장을 찾아가는 노점상이 된 벗은 연화지의 벚꽃 축제가 시작되기 전에 일찌감치 연화지 주변에 자리를 잡았다고 알려왔다.
옛 친구 박(朴)은 50년도 전, 그러니까 고교 시절에 같은 문예 동아리에서 만난 친구다. 잘은 몰라도, 자취 집을 전전하는 시골뜨기인 나는 그를 유복한 집안의 도련님 같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모나지 않은 성격에 동아리 친구들과도 두루 친하게 지내는 친구였다.
2년 남짓 가까이 지냈지만, 우리가 더 각별한 사이였던 것은 아니다. 친한 벗들이 따로 있었던 그와 나는 어쩌다 한 번씩 어울렸을 뿐이었다. 고교를 졸업하면서 우리는 뿔뿔이 흩어져 저마다의 길을 갔는데, 만기 전역을 하고 돌아온 대학 교정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그러나 어쩐지 데면데면해져서 우리는 가볍게 인사를 나누는 게 고작이었다.
우리는 졸업 뒤 각각 기업과 학교로 가면서 소식이 끊어졌다. 내가 그를 다시 만난 게 해직 시기였는지 아니면 복직 이후인지는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그를 다시 만난 것은 복직한 첫해, 그가 근무하고 있던 대전의 건설 현장에서가 아니었나 싶다. 그는 굴지의 대기업에 공채로 들어가 그 무렵 과장으로 승진하여 건설 현장을 맡고 있었다.
4년 반 만에 학교에 돌아오긴 했는데, 나는 그 거리에서 보낸 시간의 틈새를 극복하지 못하고 적응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첫 여름방학이 되자, 나는 몸을 ‘몹시 하는’ 고역으로 위기를 넘고 싶어서 이른바 ‘노가다’ 할 데를 찾았는데 단박에 떠오른 게 친구였다. 나는 그에게 전화해 현장에 잡역부로 일할 수 있겠냐고 물었고, 그는 선선히 승낙해 주었다.
대기업 간부 사원에서 노점 행상까지
1994년 여름, 24, 5일을 나는 현장의 노동자 숙소에서 묵으며 일했다. 더위가 끔찍한 해였는데, 낮에는 일하고,밤이면 집에서 가져온 데스크 탑으로 일기를 썼다. 그때 쓴 글들을 다시 읽으면 무거운 마음을 다스리려 했던 흔적을 숨길 수 없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거기서 노동자들과 일하면서 나는 이런저런 생각도 정리할 수 있었다. [관련 글 : 노동 2제(題) - 불온한 시대, 불온한 언어]
일을 마치고 난 저녁 무렵에 가끔 친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나는, 단편적이긴 해도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세계를 살아가는 그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을 엿보면서 탄복하기도 했다. 그는 자기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있었고, 부친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말미암은 충격과 치명적 질병으로 죽음의 위기를 넘기면서 우리 나이에 비해 성큼 성장해 있다고 나는 느꼈었다.
그 여름의 끝 무렵에 나는 얼마간의 노임을 챙겨 집으로 돌아왔다. 신체적 가학이라는 내 의도가 성공했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그렇게 복직 이후의 삶을 꾸려갔다. 공사장에서 일하기 전인지 후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한번은 가족을 데리고 대전에 갔을 때 그는 우리에게 1급 호텔의 뷔페식을 대접했다. 난생처음 호텔 뷔페식 구경을 한 셈인데,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아이들은 지금도 그날의 기억을 잊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가 한 차례 안동을 다녀가기도 했는데, 어느 날인가부터 뜸해지던 소식이 시나브로 끊어졌다. 아마 내가 지역 조직을 맡으면서 바빠지게 된 탓이 아니었나 싶다. 그가 회사로부터 퇴직의 압력을 받는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 그가 그예 회사를 떠날 수밖에 없다는 걸 알게 된 것은 뒷날이다.
그를 다시 만난 것은 퇴직하려고 고향 근처로 학교를 옮겨온 10여 년 전이다. 예기치 않지만, 삶의 우여곡절이란 마치 드라마처럼 극적이다. 그는 퇴직하여 사업을 벌였으나 실패하고 거의 무일푼이 되어 임대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다. 부인은 판매원으로 일했고, 오래 ‘마음공부’를 해온 그는 마음을 앓는 이에게 가끔 ‘상담’을 해 주며 지내고 있었다.
10여 년 만에 만났지만, 우리는 마치 꾸준히 만나온 사람처럼 굴면서 안부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서로의 지난날을 마치 남의 얘기처럼 심드렁하게 나누었다. 아마 우리는 저마다 살아온 삶의 신산을 새삼스럽게 확인하고 싶지 않아 했는지 모르겠다.
그 뒤, 우리는 가끔 전화로 이런저런 옛날이야기, 이를테면 우리가 함께한 캠핑의 일화들을 포함하여 고교 시절의 단편적 기억을 나누며 서로의 교유를 확인하곤 했다. 그가 아이들 대상의 장난감 따위를 실은 트럭을 끌고 축제장 따위를 돌아다닌다는 얘기를 들은 게 언제쯤이었을까.
받아들일 수 없는 삶의 모습은 없다
나는 노점상이 된 그를 잘 상상할 수 없었지만, 그의 전신(轉身)을 심상하게 받아들였다. 노점 행상 노릇을 즐긴다는 얘기를 남의 얘기처럼 하는 그를 바라보면서 그의 삶을 내가 스스럼없이 받아들인 것처럼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는 삶의 모습이란 따로 없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우리가 이미 60줄을 넘기고 있었고, 최소한 인생이 교과서 같지 않다는 걸 깨우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었다.
그는 지난해 11월, 구미 시내에서 베풀어지는 라면 축제에 다녀갔다. 소형 승용차 가득 아이들의 성화를 대기 안성맞춤인 풍선과 반짝이들로 가득 찬 좌판을 펼쳐 놓고 그는 사흘쯤 바람 부는 거리를 지켰다. 나는 좌판 앞에 그와 나란히 앉아 소주를 마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를 배웅하곤 했다.
지난 3월 하순께 그는 벚꽃이 필 무렵이면 김천 연화지에 좌판을 펼치기로 했다는 소식을 알려왔다. 마침 지지난해 벚꽃이 지고 난 뒤 처음 연화지를 찾았던 나도 올 연화지 연꽃을 기대하던 터라, 거기서 만나자고 약속했다. 그리고 3월의 마지막 날, 연화지 봉황대 앞에 좌판을 펼치고 있던 그를 만났었다. [관련 글 : ‘연화지’와 ‘봉황대’가 벚꽃을 만났을 때]
마침 아들 녀석도 집에 와 있어서 가족 모두가 연화지로 가서 그를 만났었다. 그와 잠깐 인사를 나눈 뒤, 우리는 연화지를 한 바퀴 돌았고, 봉황대 근처의 2층 찻집에서 커피를 마셨다. 물론 그는 여전히 좌판을 지켰지만, 그의 가게는 영 한산하기만 했다. 두어 시간 뒤에 우리는 그와 작별하고 귀가했다.
우리는 그의 좌판이 성업하기를 바랐지만, 그건 전적으로 운수소관이다. 일찍이 자리를 선점했다고 했지만, 그게 헛방이었다고 그는 말했었다. 여전히 어디쯤이 장사가 제대로 되는 장소인지를 분간하는 눈은 갖추지 못했다고 하면서도 그는 담담했는데, 그건 그의 장사가 시원찮았다는 얘기였다.
다음 날 밤, 나는 혼자서 연화지를 찾았다. 연화지에 머무는 동안 그는 트럭에서 잤고, 연화지의 공중화장실에서 씻었다. 나는 그가 장사를 마감하는 시간까지 같이 있다가 근처의 여관에서 묵겠다는 생각이었지만, 힘들게 그럴 필요가 없다면서 그는 고개를 저었다. [관련 글 : 연화지는 ‘밤도 아름답다’]
내가 고집을 피우지 않고 그의 의견을 따른 것은 그의 태도가 생각보다 훨씬 단호해서였다. 뒷날 그게 나를 배려한 것임을 확인했지만, 나는 그가 상호 간에 유지해야 마땅한 ‘거리’를 말한 거라고 느꼈었다. 우리는 저만큼 좌판을 지켜보면서 10시까지 찻집 옆 담장 아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전히 소형 액세서리를 사는 손님 외에 좌판 앞은 조용하기만 했다. 10시가 가까워지면서 주변의 동료 상인들이 좌판을 천막으로 싸매고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던 젊은 상인들은 그에게 와서 인사를 하고 연화지를 떠났는데, 그들을 대하는 그의 모습에 만만찮은 관록이 붙어 있었다.
나는 10시 넘어 자리를 떴고, 그는 다음 날 저녁까지 연화지의 좌판을 지키다가 떠났다고 했다. 그리고 김천에서의 아쉬운 매출은 천안 어디에 가서 만회했노라고 했다. 그와는 얼마 전에는 집에서 혼자 술을 마시다가 꽤 장시간 통화도 했다. 언제 대전에 한 번 가마고 하고 나는 전화를 끊었다.
굳이 마음공부를 해서가 아니더라도 그는 자신이 맞닥뜨린 현실을 의연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궁색한 처지를 괴로워하거나 힘들어하지 않고, 섣부른 욕망 때문에 자신을 괴롭히지도 않았다. 그는 오히려 그걸 즐거이 받아들이려 하고 있었다. 삶은 절대 우리의 희망과 기대대로만 움직이지 않을진대 그걸 대체 어찌할 것인가 말이다.
서툴고 불완전한 삶으로 남은 노년의 초상
요즘은 한밤에 자주 잠에서 깬다. 나이 들수록 숙면하기가 힘들다. 두어 시간 자다 깨기를 여러 번 되풀이하다가 정 힘들면 일어나 앉아 버리기도 하는데, 그때 나는 잠깐씩 내가 머무는 삶의 한순간에 침잠하기도 한다.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는 이제 분명하게 드러난 셈이고, 우린 어느덧 삶의 막바지에 이르러 있다.
일흔이 내일모레, 이제 나는 ‘덤의 수명’을 사는 거라고 여기곤 한다. 갈 때를 알 수는 없어도, 우리는 현재의 존재 조건이 절대 달라지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다. 아무리 ‘인생은 70부터’라고 강변해도 미래는 이미 사위고 있으며, 미래의 콘텐츠를 갖지 못한 노년의 삶은 과거의 이력으로 더 손쉽게 규정된다.
더는 미래를 상상하지 않게 된 까닭도 거기 있다. 지나온 삶을 성찰적으로 돌아보면서 내가 확인하는 것은 서툴고 불완전한 삶, 거기 우두커니 남겨진 노년의 초상일 뿐이다. 우리의 교유는 얼마나 더 오래 이어질 수 있을까. 분명한 것은 아무도 그것을 예상할 수 없다는 것, 우리는 주체적 의지로 살아왔다고 믿지만, 기실은 초월적 주재자가 그려내는 거대한 장기판의 졸(卒)에 불과한 존재인지도 모른다는 사실뿐이다.
인터넷에서 고교 시절의 익숙한 옛 건물 사진을 찾았다. 학교는 이미 시 외곽으로 옮겨갔고, 옛 학교는 그 이전의 신학교로 복원되어 있었다. 로마네스크 양식과 고딕양식을 혼용했다는 오래된 붉은 벽돌 건물의 종탑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50년도 전에 우리가 머물렀던 소년기를 마치 남의 이야기처럼 쓸쓸하게 떠올려 본다.
2024. 5. 30.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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