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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길 위에서

어버이날, 부모 안의 ‘부처’를 생각한다

by 낮달2018 2021. 5. 7.

▲ 김영훈 화백 ‘생각 줍기’(<한겨레> 2015.5.5.)

사람들이 자신의 불효를 뉘우칠 때쯤엔 이미 어버이들은 세상을 버리셨기 마련이다. 늘 때늦은 후회와 회한으로 속을 저미는 게 자식들의 숙명이다. “나무가 가만히 있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이 봉양하고자 하나 어버이는 기다리지 않는다.[수욕정이풍부지(樹欲靜而風不止) 자욕양이친부대(子欲養而親不待)]”는 오래된 글귀가 지적하는 게 그 어느 어름이다.

 

위로 어버이가 그렇다면 아래로 자식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아이들을 기르는 건 부모가 된 후의 일이니, 자식 기르기에 이골 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라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아, 어려서 이러저러하게 기를걸, 하고 무릎을 칠 때쯤엔 이미 아이들은 품 안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품 안의 ‘자식’과 품 밖의 ‘상전’

 

속담은 ‘품 안의 자식’이라 그랬다. ‘자식이 자라면 상전 된다.’라고도 한다. 불면 꺼질세라 고이 길렀건만 머리가 굵어진 아이들에게는 더는 부모의 말이 먹히지 않는다. 어버이의 품 안을 떠날 준비를 하던 그 어느 젊은 시절, 자신의 모습이 자식들에게 고스란히 겹친다. 젊은 날에 저지른 자신의 잘못을 그대로 되돌려 받는 셈이다.

 

어버이와 자식들 틈에서 어정쩡하게 끼인 존재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사람들은 나이를 먹는다. 그리고 아이들은 어른이 된다. 스무 살을 전후하여 아이들은 정신적으로 부모의 영향력을 벗어나려고 한다. 그런 자식들 앞에서 부모가 선택할 여지는 거의 없다. 자식의 선택이나 결정이 빗나가지 않기를 바랄 뿐, 거기 개입할 수 없을 만큼 부모는 무력해져 있는 것이다.

 

지난 5일, <한겨레>에 연재하는 ‘김영훈의 생각 줍기’는 “갑 중의 갑, 상전 중의 상전은 ‘자식’이다”다. 사장의 자리보다 높은 건 대통령의 자리지만, 그보다 더 높은 자리는 ‘물음표(?)’로 표시되어 있다. 아는 사람은 아는 일 아닌가. 그게 자식의 자리인 것을.

 

자식이 상전이 되는 건 전적으로 어버이의 사랑 때문이다. 스스로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자식의 모든 것을 받아 안는 부모의 ‘희생과 수용’ 덕분에 자식들은 상전이 되는 것이다. 상전이 된다는 것은 부모가 자식의 모든 요구를 받아들인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자식에게 기꺼이 져 주는 ‘부모의 사랑’이다.

 

“잘난 아들은 나라의 아들, 돈 잘 버는 아들은 사돈의 아들, 빚진 아들은 내 아들”이라는 얘기는 어버이로부터 독립한 자식들을 이르는 우스개다. 정작 친부모보다는 처부모로 기울고 있는 우리 시대의 풍속도가 거기 있다. 역시 핵심은 ‘상전이 된 아들’이다.

 

상전이 된 자식에게도 시간은 별로 없다. 그 역시 조만간 자신의 자식에게 상전의 자리를 내어주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식에서, 자식의 어버이가 되는 시간에 그는 어버이가 내준 상전 자리가 자신에게 베푼 사랑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까. 그걸 깨닫는 데는 얼마의 시간이 필요할까.

 

오늘 <오마이뉴스>에 실린 ‘정철 촌철’, ‘아버지, 고맙습니다’는 시골의 아버지께 안부 전화를 드렸더니 아버지는 ‘전화해 줘서 고맙다’라고 하더라는 내용이다. 자식의 전화에 고맙다고 하는 아버지께 ‘죄송하다’는 말은 전화를 끊은 후에 혼잣말이 되었단다. 백 마디 말이 필요 없다. 그게 부모다.

 

부모 속에는 부처, 자식 속에는 앙칼

 

▲ 정철 촌철(<오마이뉴스> 2015. 5. 8.)

오늘은 어버이날이다. 여느 날과 다르지 않은 금요일이지만, 이름 붙은 날이어서 무싯날과는 다른 분위기가 있다. 어쨌든 이름 있는 날이니 그에 걸맞은 선물을 주고받는 게 어느새 관행이 된 것이다. 꽃집에서는 해마다 오른 가격으로 카네이션이 팔리고 길거리에서도 꽃을 단 어버이들을 만나는 게 어렵지 않다.

 

언론은 이날에 어버이들이 가장 받기 싫어하는 선물로 카네이션을 꼽고, 어버이들은 받고 싶어 하는 선물은 ‘현금’이라고 전하고 있다. 그저 안부 묻는 전화만 해도 고마워하던 어버이들도 자식들의 선물 봉투가 없으면 서운해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리고 요즘 어버이는 그걸 당당하게 요구하기도 하는 모양인데, 그런 모습은 자식 처분만 기다리는 주눅 든 어버이보다는 훨씬 낫긴 하다.

 

우리 내외에게도 이제 섬길 어버이라고는 장모님 한 분뿐이다. 부모님에 이어 장인어른께서 돌아가신 게 2006년이다. 곁눈질할 틈도 없이 힘들게 살아오다 이제 겨우 한숨을 돌리겠다 싶을 때는 이미 어버이는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깊어지는 건 회한뿐이다.

 

장모님을 모셔 와 저녁을 대접해 드리고 밤늦게야 도착한다는 처제 식구들을 기다리며 모처럼 살갑고 평화로운 시간을 누린다. 아이들에게선 선물을 미리 받았고 전화로 안부를 나누는 걸로 이날을 갈음한다. 제각기 자기 뜻대로 살아가고 있는 아이들도 조만간 가정을 이루고 어버이가 될 것이다.

 

무심히 “부모 속에는 부처가 들어 있고 자식 속에는 앙칼(매우 모질고 날카로움)이 들어 있다.”라는 속담의 의미를 새삼 헤아려본다. 거기엔 자식으로 태어났다 어버이가 되어가는 이 누대에 걸친 순환, 그 진실이 담겨 있다. 새삼 가신 어버이를 떠올리면서 아프게 2015년의 어버이날을 보낸다.

 

 

2015. 5. 8. 낮달

 


장모님에게 그해의 어버이날은 생애 마지막 어버이날이 되었다.[관련 글 : 배웅, 다시 한 세대의 순환 앞에서] 그해 10월에 세상을 떠나신 것이다. 장모님의 별세로 나는 친가와 처가의 어버이를 모두 여의었다. 아버지는 1986년에, 어머니는 2002년에, 그리고 2005년 장인어른에 이어 장모님도 세상을 버린 것이다.

 

장모님 가신 지 5년이 훌쩍 흘렀다. 찾아갈 어버이가 계시지 않은 우리 내외는 아이들의 어버이날 인사를 들으며 어느새 우리가 선 자리에 옛날 그 어른들의 자리라는 걸 아프게 깨닫고 있다.

 

2021. 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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